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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아버지의 초상, 숭고하기보단 아득한 회한으로서의 <희생>
이우빈 2024-08-13

<안드레이 루블료프>

“예술은 인간의 다른 활동과 달리 이기적이지 않아.”(<잠입자>) 정말 그럴까. 적어도 <희생>의 바로 전작인 <노스텔지아>까지의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는 꽤 그렇게 생각한 듯하다. 15세기 몽골제국의 침략 등 러시아의 온갖 수난을 거치며 <삼위일체>를 그려 인간들의 구원을 도모하고자 했던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수도사도, <노스텔지아>의 고르차코프도 촛불 하나를 세상의 온 믿음인 양 소중히 감싸며 무한히 이타적인 예술가의 숭고를 지켜냈다.

타르콥스키가 꾸준히 도스토옙스키류의 ‘약한 인간’을 그려왔다고는 하나, 사실 그 면면을 자세히 살피면 그 인간들은 약한 만큼 동시에 드센 자기만의 숭고를 지켜낸 위인들에 가까웠다. 전세계 관객들이 타르콥스키의 인물에 절절히 감동한 이유도 그들의 약한 듯하면서 위대한 숭고에 있었다. 여기서 숭고란 인간이 도저히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득한 세계의 압도감을 언어화한, 형용할 수 없는 것을 그나마 인간의 말로 옮겨낸 작은 그릇이다.

그런데 솔직히 <희생>의 주인공 알렉산더는 타르콥스키가 그간 그려왔던 인물들에 비해 유독 유약하고 혼란스러워하며 그 끝 역시 그다지 숭고해 보이지 않는다. 세계를 위해, 예술을 위해, 혹은 평화를 위해 아니면 러시아를 위해 한몸 바쳐왔던 지난 작품의 주인공들과 그 결은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알렉산더가 포기한 것은 오직 단 하나의 집뿐이며, 그는 순교자도 희생자도 성인도 아닌 그저 병자로서 구급차에 실려 갔을 뿐인 이상한 노인에 가까워 보인다.알렉산더의 비숭고함 혹은 다분히 인간다움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대목은 그가 어머니의 정원을 기억하며 지난날을 후회할 때다. 그는 어머니의 집을 둘러싼 정원을 괜스레 청소하고 손질하여 “전체를 내 식으로 만들고” 싶었으나 결국 그 결과는 “아름다움이 사라져버린, 자연미라곤 전혀 없는 너무도 추한 풍경”으로 도래했다. 그렇게 알렉산더는 세상에 대한 어떠한 조작, 그러니까 자연에 대비되는 예술의 결과를 무척이나 후회하고 불신한다는 부정의 사유를 펼친다. 이것은 <거울>에서 보여줬던 과거의 그리움을 통한 안타까움을 넘어 그때 그 과거를 완전히 회피하고 부정하려는 뒷걸음질로 느껴진다. 언제나 영화예술의 수호자로 불렸던 그가 자신의 예술론에 이토록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이 약함의 연유는 무엇일까.

<희생>이란 마지막 성전

<솔라리스>

그의 마지막인 <희생>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처음인 <이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다.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타르콥스키는 전쟁이란 현상을 스크린 위로 대놓고 후경화했다. 영화 속에 폭음이 들려올 때면 화면 저 먼 곳에 실제 반짝이는 낙하물을 보여주면서 사운드와 이미지의 서사적 일치, 그리고 전쟁의 폭격이 영화의 디제시스 안에 존재함을 증명했다.

반면에 <희생>은 외부 세계의 전쟁을 겨우 라디오를 통한 뉴스로만 구성하며 타르콥스키는 사실 바깥의 일에 어느 정도는 손을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솔라리스>의 캘빈이 TV 속의 버튼 보고서를 보며 행성 ‘솔라리스’의 정체를 제대로 믿지 못했듯이 타르콥스키는 미디어너머의 진실을 제대로 신뢰하지 않아왔다. 즉 알렉산더가 외계의 비극과 진실을 본능적으로 밀어내고 자신의 영역에서 배제하려 한다는 인상이 인다.

왜 타르콥스키는 조금은 덜 전투적이고, 약해졌을까. 그의 다른 영화를 빗대어 이러한 상상을 해보면 어떠한가. 마치 세계 바깥 어딘가에 동떨어진 듯한 <희생>의 무대가 <솔라리스>의 마지막에 캘빈이 발견한 재현의 섬이라고 가정한다면, <희생>은 타르콥스키가 재현의 바다에서 구축하고자 했던, 과거에 대한 회한 끝에 그려낸 어떠한 영화적 이상향의 세계인 것이다. 아니면 또 이러한 상상은 어떠한가. <희생>의 좁은 무대가 사실은 <잠입자>에서 이미 세계 멸망의 징후를 겪은 ‘구역’의 과거나 미래라면 <희생>은 타르콥스키가 만든 제3의 SF이자 가상의 영화적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희생>은 <안드레이 루블료프>나 <노스텔지아>, 혹은 <이반의 어린 시절>처럼 리얼리즘의 대지 위에 펼친 숭고의 서사시가 아니라 애초부터 가상의 세계 위에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얹어놓은 자그마한 상상의 사상누각에 불과해진다. 겨우 이 자그마한 오두막, 이곳이 러시아인지 어머니의 대지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 타르콥스키만의 내면을 응축한, 그렇기에 이 시공간이 좁고 특정되지 않을수록 이곳은 너무도 개인적이고 사적인 곳으로 구성되며 동시에 타르콥스키의 모든 것이 된다. 통상적인 내러티브가 불가능한 내면적 혼돈의 역장이 필요했다면 <희생>이 보여준 지루함과 불친절한 이야기는 필시 타르콥스키가 가닿아야 했던 내면의 종착역이자 최후의 성전을 남기기 위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처음에서 끝으로, 점차 느리게 찍는 나무

<희생>

김이석 동의대 교수는 앞선 글의 ‘두 그루의 나무와 두명의 소년’이라는 대목에서 <이반의 어린 시절>의 시작과 <희생>의 끝이 절묘하게 감응한다고 크리스 마커의 말을 빌려 말한다. 정성일 평론가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각인> 서문에서 그는 “하늘에서 대지로 내려오는 첫 장면(<이반의 어린 시절>)으로 시작해서 대지에서 다시 살아난 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마지막 장면(<희생>)으로 끝나는 일곱편의 영화”라며 타르콥스키의 수미쌍관을 강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 가지 보태고자 하는 흥미로운 사실은 <이반의 어린 시절> 각본에서 발견된다. 각본엔 이반이 “나무에 손을 대려 한다”(He holds out his hand to touch the tree)라는 문장이 명시돼 있지만, 실제 영화를 보면 이반의 손이 나무에 닿는지 혹은 이반의 눈이나 몸, 카메라가 나무를 향해 고꾸라지는지 판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짤막한 교감만이 일어난다.

반면에 <희생>은 어떠한가. 고센과 나무의 교감은 그 느릿느릿한 카메라의 속도감에 기반한 상승의 지속으로 무척이나 길게 닿아간다. 타르콥스키는 후대의 인간이 진정 나무와 교감하기를, 확대하면 세계의 믿음에 대한 본인의 유지를 이어가기를 <희생>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길게 찍게 된 것이다. <안드레이 루블료프> 역시 종 만드는 아이를 끌어안는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이미지로 끝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어른(타르콥스키)이 아이(아들)와 함께한다는 합일의 이미지로 끝나고 말았다. 타르콥스키의 장대한 필모그래피는 점차 자신이란 예술가의 의미를 내려놓고 결국 고센에게 언어(예술)와 나무(대지 혹은 믿음)를 제대로 물려주기 위한 내려놓음의 과정이자 그 과정을 어떻게라도 천천히 바라보고자 하는 개인적 욕심의 장이다. 그 끝에서 종말의 무대가 된 <희생>은 자연스레 미련과 회한 같은, 인간이라면 느낄 수밖에 없는 미약한 감정들로 가득 차게 됐다.

요컨대 <희생>의 숭고미란 한 예술가의 거대한 희생에서 나오지 않는다. <희생>이란 최후의 성전에서 타르콥스키는 영화의 순교자라든지 성인이라든지 불멸의 시인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이 되고자 한다. 그는 그저 개인적인 바람에서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희생>의 마지막 자막이 밝히듯 이 영화는 순전히 그의 아들 앤드류사에게 바치는 아버지의 고백이자 연서이자 반성문이며, 이 거대한 예술가마저 결국 아들의 발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는 가장 보수적이고 인간적인 이야기다. 어쩔 수 없는 인간애의 한계를 인정하는 한 아버지의 깊은 부끄러움과 한 예술가의 깊은 회한에 다름 아니다. 영화감독이란 지칭, 그간 쌓아왔던 예술의 정원과 집을 희생하면서까지 평범한 한명의 아버지가 되고자 한 고고한 예술가의 부끄럽고 낯 뜨거운 은퇴기에 가깝다. <희생>을 상찬하되 <희생>에 얽힌 신화를 마냥 비장하게만 바라보아서는 안되는 이유다. <희생>은 타르콥스키의 가장 위대한 영화인 동시에 가장 작고 개인적인, 별것 아닌 포부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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