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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ters’ Talk] <트위스터스> 정이삭 감독에게 <콘크리트 유토피아> 엄태화 감독이 묻다, 정이삭 x 엄태화
남선우 사진 최성열 2024-08-16

<트위스터스>의 주인공들에게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은 조금 다른 의미로 들릴 것이다. 그들은 재해로부터 도망칠 수 없어 순응하는 척하는 게 아니라 그 불가피한 속성 자체에 매료된다. 토네이도가 새긴 트라우마에 반문하듯, 끝내 돌풍을 길들여보겠다는 패기로 무장한다. 재난물로서 <트위스터스>가 딛고 선 지대는 이렇게 정서적으로 풍요로워진다. 자연을 향한 경외가 드라마를 추동할 뿐 아니라 스펙터클을 지탱하는 감각으로서도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이 특별함에 반응해 정이삭 감독에게 대화를 청한 이가 있다. 지난해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한국 재난영화의 새 챕터를 연 엄태화 감독이다. 마침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재밌게 봤다는 정이삭 감독이 내한 일정 중 엄태화 감독과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유사한 소재를 채택했음에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서사를 쌓아올린 서로에 대한 지지를 바탕으로 질문을 주고받았다. 지진과 토네이도, 대립과 협업, 안티히어로와 히어로. 비슷한 고민을 통과해 색다른 결과를 낳은 이들의 만남에 LG OLED TV가 함께했다. 감독의 의도를 그대로 화면에 담아내는 LG OLED TV로 각 영화의 장면들을 확인하며 대화를 나눈 덕분에 ‘마스터스 토크’도 한결 생생해졌다.

엄태화 <트위스터스>를 얼른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밌게 봤습니다. 기존의 재난영화들보다 인간이 좀더 보이는 재난영화였어요. 그 점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정이삭 저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봤어요. 영화관에서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작은 화면으로 봐도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어요. 무척 영리한 영화인 동시에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어요. 저는 이병헌 배우를 정말 좋아하는데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의 퍼포먼스가 그가 보여준 최고의 연기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배우들의 연기력을 이끌어낸 감독님도 대단하세요. 무엇보다 인간적인 이야기라서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우리 두 사람 다 전작은 아주 개인적인 영화였고, 근작은 더 블록버스터 타입의 영화라 할 수 있죠. 어떻게 보면 평행 이론처럼 비슷한 행보예요. (웃음) 독립영화를 해오다 이제는 큰 스튜디오와 작업을 하니까요. 엄태화 감독님의 경험도 궁금하네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같은 대규모 영화작업은 어떠셨나요?

엄태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작업이 전작과 크게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작품의 규모가 커지고, 유명한 배우들이 나온다는 변화는 있었지만 본질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프로페셔널한 스태프가 많아진 덕에 현장이 빠르게 돌아가서 제가 할 일이 좀 줄어든 것 같았어요.

정이삭 저 또한 <트위스터스>가 <미나리>와 근본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느꼈어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작업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크게 다르진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스태프가 많아지면서 모두의 이름을 외우기 어려웠다는 아쉬움은 있어요. 예전에는 소규모로 촬영해서 모두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바람에 우리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처럼 함께 일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죠.

엄태화 사실 <미나리>를 만든 감독님이 이렇게 큰 블록버스터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처음에는 변화가 되게 크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트위스터스>를 보고 나서는 이 영화도 결국은 전작과 같은 선상에 있는 영화라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정이삭 감독님이 그런 유사성을 발견해줘서 기뻐요. 요즘 인터뷰를 할 때마다 첫 번째로 받는 질문이 어떻게 <미나리>에서 <트위스터스>로 넘어왔냐는 거예요. 프로듀서들과 스튜디오는 제 스타일대로 <트위스터스>를 찍어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존중을 받았기 때문에 제안을 수락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감독님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찍으면서 그런 자유를 느끼셨나요? 아니면 좀 다른 종류의 부담을 느끼셨나요?

엄태화 저도 운이 좋았어요. 어떻게 보면 전형성에서 벗어난 이야기임에도 같이 작업하는 분들이 제 의도를 이해해줘서 꽤나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큰 예산이 들어가는 영화인 데다 여름에 개봉하는 텐트폴 영화라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음에도 관객들은 결국 좋은 영화를 알아본다는 믿음을 갖고 작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이삭 한국 극장가의 여름, 가을 관객 성향은 다른 편인가요?

엄태화 예전에는, 특히 팬데믹 이전에는 여름 시장의 파이가 훨씬 컸어요. 가장 규모가 큰 블록버스터영화들이 그때 많이 개봉했고, 파이가 크다 보니 관객이 나뉘어도 큰 숫자였는데 코로나19를 겪고 나서는 관객 성향이 바뀐 것 같아요. 단순히 유명 배우가 나온대서 영화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를 찾아보면서 자신이 재밌게 볼 영화인지 아닌지 미리 판단한 다음에 극장에 가는 듯해요. 그래서 여름에 개봉한다고 관객수가 더 많은 것 같지도 않고, 비수기에 개봉하더라도 입소문이 나면 관객이 많아지죠.

정이삭 한국 관객들은 굉장히 세련됐네요. 물론 미국에서도 모두가 좋은 영화를 보고 싶어 하지만 여름 시장은 그래도 좀 특별해요. 방학 시즌이라 가족들이 함께 극장을 찾는 문화가 있거든요. 저는 이 영화가 여름에 개봉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좀더 재미에 초점을 맞춘 오락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했어요. 제가 어렸을 적 여름에 극장을 찾아 감상했던 그런 블록버스터영화처럼요. 어떻게 보면 <미나리>와는 다른 관객을 염두에 뒀던 것 같아요. 그런 ‘여름영화’라는 개념 자체가 제게 크게 다가오지 않았나 싶어요.

과학적으로 정확하면서 오락적으로 훌륭하게

정이삭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촬영 기간은 어느 정도였나요?

엄태화 4개월 반 정도, 80회차 촬영했던 것 같아요.

정이삭 저희는 60일간 촬영했습니다. 아무래도 미국에선 촬영 기간이 더 짧은 편이죠. 한국은 촬영 기간이 길어져도 스태프들이 열심히 한다고 들었어요. 세트는 직접 지었나요? 로케이션 촬영은 어느 정도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엄태화 올 세트 촬영이었고요, 3층까지만 아파트를 지어놓고, 그 위쪽은 CG로 연장했어요. <트위스터스>는 어땠나요? 마지막에 나오는 마을 같은 경우는 세트였나요?

정이삭 그 마을은 실제로 존재하는 마을이에요. 저희는 대부분 로케이션 촬영을 했어요. 영화관이나 헛간의 경우 세트가 필요하긴 했지만 운전 장면을 포함한 대다수의 장면을 야외의 실제 장소에서 찍었죠. 솔직히 촬영 중에 배우들에게 토네이도에 대해 설명하기가 까다로웠어요. 그냥 토네이도가 엄청 클 거라고만 말했는데 배우들 입장에서는 토네이도가 어떻게 구현될지 상상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저는 배우들에게 토네이도가 무척 공포스러울 테니 큰 동작으로 과장해도 좋다고, 저를 믿고 연기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결국에는 배우들도 결과물에 만족한 것 같아요. 파란 하늘 아래서 완벽한 날씨를 만끽하며 촬영했음에도 토네이도에 겁먹은 표정을 제대로 연기해냈으니까요.

엄태화 아, 그렇죠. 그때가 되게 어려운 것 같아요. 최종적인 그림은 감독의 머릿속에 있는데 그걸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 설명하고 설득시켜야 한다는 게 어렵죠.

정이삭 맞아요. 어려운 동시에 아주 재밌는 작업이죠. 어떻게 보면 감독은 대의를 알고 있잖아요. 모두가 어떤 목적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지 아는 거죠. 그래도 <트위스터스>에 참여한 많은 아티스트들은 이 영화에 대해 훨씬 더 큰 꿈과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VFX 전문가들이나 배우들이 의견을 냈을 때 제작진이 그 의견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 순간들이 참 좋았습니다. 저 혼자 우리 영화의 비전을 설파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저렇게 하면 어떨까’ 제안할 수 있는 것이요.

엄태화 오클라호마라는 지역이 주는 느낌도 현실적이었어요. <미나리>에도 나오지만 감독님도 예전에 토네이도를 경험한 적이 있으신가요?

정이삭 <미나리>에서는 한 가족이 농장으로 이사를 가잖아요. 그리고 한밤중 토네이도가 들이닥칩니다. 이사 간 지 2주 후일 거예요. 제가 실제로 경험한 일이죠. 어렸을 적의 개인적인 경험을 영화에 그대로 투영했다고 볼 수 있어요. 제가 4살 정도 됐을 때인데 부모님이 저와 누나를 차에 태우고 토네이도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운전해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 기억이 제법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제가 자라는 동안 토네이도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였던 거죠. <트위스터스>의 배경인 아칸소, 오클라호마의 풍경과 그곳의 사람들, 음악, 농장의 일거리들이 다 제 기억의 일부예요. 그래서 <트위스터스>에도 그것들이 그대로 반영됐어요.

엄태화 그곳 사람들의 무드, 공기 냄새까지 전해져서 토네이도가 더 무섭게 느껴졌어요.

정이삭 실제 토네이도를 보면 그야말로 장엄하다는 느낌을 받게 돼요. 어떤 사람들은 옛날 중세 유럽에서 토네이도를 본 사람들이 토네이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용이라는 상상의 동물을 고안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해요. 미국에는 이런 토네이도를 추격하는 마니아들의 문화가 있는데 용처럼 특이한 존재를 쫓아가보고 싶은 심리와 비슷하겠죠. 저도 꽤 흥미를 느꼈습니다. 토네이도에 관한 유튜브 영상들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꼈고 점점 그 매력에 빠져들었죠. 한때 토네이도 영상을 너무 많이 봤답니다. 보기에 놀라워서 그랬을 뿐 아니라 매우 영화적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저는 <트위스터스>를 이런 영화적인 장면들로 채울 뿐 아니라 관객들이 가능한 폭풍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자연에 경외감을 느낄 수 있도록요. 영화에 등장하는 ‘폭풍을 쫓는 자들’(stormchaser)이나 토네이도와 관련한 문화도 최대한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했어요. 실제로 폭풍을 찾아다니는 분들을 섭외해 영화에 출연시켰죠. 과학자들의 자문도 받았고요. 실제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토네이도를 따라다니고 연구하며 느낄 법한 흥분을 영화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 감정을 묘사하는 것에 충실하면서도 액션영화로서 관객에게 롤러코스터 타는 듯한 재미를 주려 노력했습니다. 그걸 염두에 두고 자료조사를 했죠. 과학적으로 정확한 동시에 오락적으로 훌륭한 영화여야 했으니까요.

엄태화 그래서 <트위스터스>의 토네이도에서 다른 재난영화에서 봤던 토네이도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나봅니다. 그 지역을 정말 잘 알고 묘사했기 때문에 토네이도를 다른 방식으로 체감할 수 있었어요.

정이삭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 영화는 평범한 일상이 흘러가는 와중에 토네이도와 같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우리의 실제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아름답지 않나 싶어요. 이런 종류의 인간사를 다룰 수 있다는 건 아주 특별한 일이고 우리 삶에는 그런 예시들이 많다고 생각해요. <트위스터스>로 한국에 온 제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한국에서 보는 풍경은 모두 특별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은 이미 자주 본 풍경이겠죠? 저는 영화가 이런 일상 속 특별함을 더 많이 조명했으면 좋겠어요. <트위스터스>를 통해 제가 자란 고향으로 돌아가 그런 시선을 내포한 영화를 만들 수 있어 정말 좋았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찍을 때도 지진이나 재난이 발생할 때 인물들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연구할 부분이 많았을 것 같아요.

엄태화 한국은 사실 재난이 이렇게까지 큰 규모로 일어나는 나라는 아니다보니 지진이나 토네이도 같은 소재가 판타지로 읽히는 경향이 있어요. 저도 애초에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만들 때 자연재해보다는 사람들이 만든 재난에 좀더 초점을 맞추려 했고, 지진 자체는 인물들을 더 극단적으로 몰아가기 위한 환경 정도로 생각하고 접근했죠. 그럼에도 지진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가짜처럼 보이면 안됐기 때문에 지진이 일어나는 방식에 대해서는 많이 조사했어요. 그런데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일본에서 개봉할 때쯤 일본에 실제로 지진이 일어난 상황이었어요. 일본 관객에게는 이 영화가 다르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지점이 있었죠. 감독님도 <트위스터스>를 찍으면서 실제로 토네이도를 겪은 분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정이삭 네, 그 부분을 굉장히 많이 고민했어요. 영화는 2024년에 개봉하기로 했는데 그때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모르잖아요. 촬영은 2023년에 했는데, 상대적으로 토네이도가 많이 발생한 해가 아니었어요. 그래도 내년이나 향후 몇년은 토네이도가 잦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이 영화에 접근했습니다. 특히 토네이도로 인해 피해를 입은 분들이 겪는 여러 감정적인 문제들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존중하는 자세로 임했죠. 저희가 그런 부분을 영화의 재미를 위해 이용하는 게 아니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보듬는 태도로 영화를 찍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확실히 올해는 토네이도로 인해 많은 사람이 힘들었어요. 전세계적으로 올해가 재난으로 인한 재산 피해가 가장 심각하다는 뉴스가 있을 정도로 많은 피해가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라고 생각해요.

엄태화 그런데 <트위스터스>의 주인공들은 기존 재난물의 주인공들과 다르게 다가오는 재난을 피하는 게 아니라 쫓아가잖아요? 그런 태도가 ‘무언가를 사랑하면 그걸 평생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라는 대사로도 표현되는데, 토네이도가 인간과 인생을 이야기하게 좋은 소재로 쓰이지 않았나 싶어요. 살다 보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이해하기 힘든 고통을 인간의 입장에서 영화 속에 담으려고 한 게 느껴졌어요.

정이삭 말씀하신 것처럼 미국은 재난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고 그게 제가 <트위스터스>를 작업해보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해요. 이 영화는 두려움이라는 문제를 흥미로운 시각으로, 젊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라고 봤거든요.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트라우마와 불안감과 공포를 겪고 있어요. 알다시피 재난영화는 우리 사회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하나의 흥미로운 방법이에요. 물론 감독님께서 한국은 재난이 많지 않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럼에도 재난영화가 한국에서 인기가 는 이유는 관객들이 영화 속 재난이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말 그대로의 재난이 일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재난이 일어날 수 있잖아요. 그런 상상을 가능케 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표현력이 좋았어요. 힘없는 사람들의 시각에 집중하면서 힘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는 방식이 특히 좋았어요. 마지막에는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보여주며 누군가가 주인공에게 음식을 주고, 살아 있으면 살아가도 된다고 말하잖아요.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어요. 우리는 감독으로서 영화를 찍을 수 있고, 우리가 원하는 현실을 영화를 통해 보여줄 수 있죠. 그 장면들이 현실적이지 않더라도, 가능성 있는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게 우리가 스토리텔러로서 가진 아름다운 재능 아닐까요? 그래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엔딩이 꽤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양면성에 이끌리다

엄태화 이번에 1996년작 <트위스터>를 다시 찾아봤는데, 물론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는 있지만 장르적인 표현이 더 메인이 된 영화 같더라고요. 그런데 <트위스터스>에는 장르를 뚫고 나오는 무언가가 있어요. 주인공 케이트(데이지 에드거존스)는 남자 친구를 앗아간 토네이도를 정복하겠다는 생각으로 토네이도에 접근하다 나중에는 토네이도를 자신의 삶에서 함께 가야 할 존재로, 보듬어야 할 존재로 받아들이잖아요. 그렇게 인물이 한발 더 나아간다는 지점이 좋았어요.

정이삭 물론 저도 장르물로 즐길 수 있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 <트위스터스>도 모험영화이자 재난영화고 관객의 시선에 따라 일종의 괴수물이라고도 볼 수 있죠. 그런데 저는 인간의 내면을 깊게 건드리는 영화도 좋아해요.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말하고자 영화를 찍은 게 아니라 제가 느끼는 인간성을 영화로 보여주고자 했는데 그 또한 궁극적으로는 정치적인 지점이 있더라고요. 사람들과 그들이 겪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자체가 강렬하잖아요. 제가 하고 싶었던 게 바로 그런 거였어요. <미나리>가 사람들의 삶과 관계를 보여준 것처럼 <트위스터스>도 재난물이라는 맥락에서 아주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같은 원리로 인간을 보여주려 했어요.

엄태화 <트위스터스>는 재난 자체의 스펙터클 또한 리얼해서 그것만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장르적인 매력이 있는 영화죠.

정이삭 고민이 많았어요. 첫 시퀀스만 해도 시나리오상에 설명이 이렇게만 적혀 있었어요. ‘토네이도가 보인다.’ (웃음) 그런데 제 생각에는 영화가 시작할 때는 토네이도를 보여주지 않아야 더 임팩트가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엄 감독님이 얘기한 것처럼 VFX는 항상 예산의 압박을 받죠. 그런데 이런 제약은 창의력을 돋우는 긍정적인 한계라고 느낍니다. 예를 들어 <트위스터스>의 프로듀서로서 함께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죠스>(1975) 촬영 당시의 이야기를 곁들여 <트위스터스>에 대한 조언을 해주셨는데 <죠스>를 위해 제작한 상어 모형이 갑자기 작동을 안 하더래요. 그래서 영화에서 상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지만 덕분에 영화를 더 재밌고 무섭게 하는 창의적인 장면들이 탄생한 거죠.

엄태화 저도 스필버그의 조언을 받아보고 싶네요. (웃음) 각색 이야기도 여쭤보고 싶었어요. 원작 <트위스터>에서는 선악 구도가 분명했는데, <트위스터스>는 이걸 조금 흐릿하게 표현하면서 재난과 인간의 관계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 것 같아요. 어떻게 작업했나요.

정이삭 모든 게 자연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봤어요. 토네이도조차 완벽히 나쁘다고만 할 수 없죠. <트위스터스>의 테릴린 슈롭샤이어 편집감독이 말해준 아프리카 속담이 있어요. ‘물에게는 적이 없다.’ 물이 인간에게 해를 입히기도 하지만 도움을 주기도 한다는 뜻이죠. 자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 속 토네이도 또한 인간이 사랑하고 경외할 수 있는 존재예요. 동시에 파괴력 있는 공포스러운 존재이기도 하죠. 그 양면성에 끌려서 <트위스터스>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이 영화 속 인물들이 태풍을 바라보는 시선처럼 우리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도 흑백으로 나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누구든 위험할 수도 있지만, 선할 수도 있고, 세상에 나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보여준 인간성의 반전이 마음에 들었어요. 예를 들어 이병헌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는 안티히어로에 가깝지만 감독님이 여러모로 그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영화에 잘 표현된 것 같아요.

엄태화 그 점을 가장 신경 쓰면서 만들었던 것 같아요. 또 하나 무척 궁금했던 부분인데, 원작에서는 클라이맥스에 영화 속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작품이 <샤이닝>(1980)이죠. 잭 니컬슨이 막 도끼질을 하는 장면에서 컷이 넘어가잖아요? 이번에는 영화 속 영화를 <프랑켄슈타인>(1931)으로 바뀌었어요.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정이삭 영화 속 마지막 토네이도가 마치 괴물 같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면에서는 조금 부자연스러운 형체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괴수물처럼 느꼈고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오마주를 하고 싶어서 선택했어요. 재밌게도 <프랑켄슈타인> 속 사운드와 대사를 <트위스터스>에서도 실시간으로 사용했어요. <프랑켄슈타인>과 저희 영화를 동시에 재생하면 소리가 일치하는 장면이 생기는 거죠. 조금 다듬기는 했지만 <프랑켄슈타인>의 사운드를 <트위스터스>에서도 최대한 비슷하게 유지하려고 했어요.

엄태화 어떻게 보면 <프랑켄슈타인>도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이야기잖아요. 그게 토네이도에 도전하는 주인공들의 모습하고 겹쳐서 흥미로웠습니다.

정이삭 <트위스터스>는 인간의 오만함 또한 다루고 있어요. 토네이도를 파괴하려는 캐릭터들의 오만뿐 아니라 토네이도가 생겨나는 과정에서 엿볼 수 있는 인간의 오만을 포함하죠. 전세계의 기상이변은 여러모로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라 할 수 있잖아요.

엄태화 그리고 <트위스터스>에서 원작에서 나온 분과 비슷한 캐릭터 한명을 제가 발견했어요. 모자와 헤드폰을 끼고 앤서니 라모스 배우 옆에 있던 캐릭터요. 처음에는 중요하지 않은 배역처럼 보였는데 깨알같은 재미를 주더라고요.

정이삭 스콧 역의 데이비드 코런스 배우예요. 데이비드는 <트위스터스> 촬영 기간에 차기 슈퍼맨으로 캐스팅되기도 했어요. 제임스 건 감독이 연출하는 다음 <슈퍼맨>의 주인공이죠. 그런데 우리 영화에서는 악역에 가까운 연기를 했어요. 시나리오상에서 스콧은 아주 작은 배역이었지만 데이비드가 여러 아이디어를 내면서 연기한 덕분에 역할이 점점 커졌어요. 그가 보여준 것들이 아주 마음에 들었죠. 그는 <트위스터스>를 촬영하는 동시에 <슈퍼맨> 오디션도 봤는데 그 또한 아주 재밌었어요. 그가 마침내 슈퍼맨으로 캐스팅되었을 때 모든 배우들이 신났답니다. 다 같이 환호하며 그 순간을 영상으로 남겼고 정말 즐거웠어요.

엄태화 배우들 얘기를 더 여쭤보고 싶어요. 타일러 역의 글렌 파월은 <탑건: 매버릭>에, 케이트 역의 데이지 에드거존스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출연하면서 알려졌지만 한국에서는 약간 생소한 배우들이기도 하거든요.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지, 캐스팅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요.

정이삭 우리 배우들은 지금 미국에서 굉장히 잘 알려진 배우들이에요. 저희가 캐스팅을 하던 지난해까지만 해도 엄청 유명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배우로서는 굉장히 인정받고 있었죠. 앤서니 라모스는 <트랜스포머: 비스트의 서막> 개봉을 앞두고 있었고, 글렌 파월은 <탑건: 매버릭>으로 이름을 알렸어요. 그의 다른 출연작인 <페이크 러브>나 <히트맨>은 공개되기 전이었죠. 우리가 촬영을 시작하고 나서 앤서니가 주연한 <트랜스포머: 비스트의 서막>이 개봉했는데 앤서니가 큰 영화에서 활약하는 걸 봤고 글렌의 작품도 공개 후에 굉장히 잘됐어요. 그러면서 그의 인지도와 인기가 많이 올라갔고요. 데이지 에드거존스는 TV시리즈로 잘 알려졌고 몇편의 좋은 영화에도 출연했어요. 그래서 <트위스터스>가 아직 슈퍼스타로 호명되지 못한 스타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어요. ‘아직’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슈퍼스타가 될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진짜 멋진 점은 스튜디오도 할리우드의 미래가 될 엄청난 재능을 가진 이 배우들에게 진정으로 투자하고 싶어 했다는 거예요. <트위스터스>는 그들이 얼마나 놀라운 배우인지 증명하는 장이었어요. 이 영화를 통해 미국 관객에게 이들이 할리우드의 미래 스타라는 인식이 확고해졌으면 좋겠어요. 이들이 보여줄 미래가 몹시 기대돼요.

엄태화 덕분에 장르적인 재미뿐 아니라 사람이 보이는 영화로 완성된 것 같아요. 관객들도 극장에서 보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영화입니다. 오늘 감독님과 대화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정이삭 저도 엄태화 감독님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트위스터스>에 대해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엄태화 감독님은 재능이 무척 많으니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인간적인 영화들을 통해 한국은 물론 전세계 영화계를 위해 많은 역할을 해주리라 기대합니다. 감독님과 재난과 인간성에 대해 대화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감독님의 행운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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