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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ITUARY] 알랭 들롱 (Alain Delon, 1935~2024) 부고, 태양을 닮은 매혹

영화 <하프 어 찬스>(1998)를 촬영하던 시기에 알랭 들롱은 60대 초반이었다. 이 영화의 감독인 파트리스 르콩트는 촬영 중 있었던 일을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네사 파라디 때문에 사람들은 동요했다. 장폴 벨몽도가 세트장에 나타나면 흥분은 더 커졌다. 하지만 알랭 들롱이 도착하면 고요해졌다. 소리도 말도 없었다. 겁을 먹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앨랭 들롱이었다.” 전성기가 훌쩍 지난 시기였지만 여전히 강력했던 그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닿을 수 없는 신화, 누군가의 말처럼 그는 영화계의 성스러운 괴물이자 대체할수 없는 스타였다. 지난 8월18일, 88살로 알랭 들롱이 사망했다. 반세기간 그의 활동을 돌아보며 그가 영화계에 남긴 발자취를 추모하고자 한다.

1935년 11월8일, 파리 남부의 오드센 지역에서 태어난 알랭 들롱은 불행에 가까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작은 영화관을 운영하던 아버지와 약국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아이가 4살이던 무렵에 결별했고, 이후 그는 위탁가정에 맡겨져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제대로 학업을 성취하지 못한 채 17살 때 해군에 입대했다. 인도 차이나 파병 시절에 그는 리볼버를 훔친 혐의로 징역형을 받은 적도 있었다. 알랭 들롱이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것은 20대 초반 즈음으로, 파리에서 그는 바텐더 등의 작은 일을 했다. 그사이에 3명의 여성을 만나며 그의 인생은 바뀐다. 가장 먼저 배우 브리지트 오버를 통해 처음으로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영화 감독 이브 알레그레의 아내인 미셸 코르두의 추천으로 <여자가 참견할 때>(1957)에 캐스팅 됐다. 신인으로서 얻기 힘든 기회였다. 이 영화의 경력은 곧장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1960)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억만장자의 아들 역이었지만 감독의 아내인 벨라 클레망의 의견으로 그는 톰 리플리 역에 낙점됐다. 이 영화에서 그가 거울을 보며 자신을 쓰다듬는 치명적인 장면은 지금 보아도 인상적이다. 맑고 건조한 눈빛, 확실히 그는 도시의 공허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후 그의 경력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0)에 출연했고, 연달아 <레오파드>(1963)에 캐스팅됐다. 특히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레오파드>는 그에게 표범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고양이과 맹수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그의 외모에 덧입혀졌다. 그리고 1962년, 또 다른 거장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작업했다. 이 작품이 바로 <일식>(1962)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아름다운 소년의 마음에 숨겨진 폭력적이고 추악한 진실을 연기한다. 당시 누벨바그 감독들과 작업했던 것은 아니지만 알랭 들롱은 프랑스 예술영화의 독보적인 배우로 떠오르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거장들과의 작업에만 매달리지는 않았다. <지하실의 멜로디>(1963) 같은 상업적인 범죄영화에도 출연했고, <수영장>(1969) 같은 현대물도 경험했다. 특히 자크 드레이의 <수영장>은 여러모로 화제작이었다. 영화 속 럭셔리한 배경과 화려한 이미지는 1960년대의 이상향을 드러냈고, 이 영화의 결말은 <태양은 가득히>의 범죄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게다가 촬영 도중 발생한 경호원 사망 사건으로 경찰 심문을 받으면서 그는 유명세는 더 치러야 했다. 당시 헤어진 것으로 알려진 로미 슈나이더와의 재결합에도 대중은 관심을 보였다. 허구와 현실의 평행선 같은 연결고리, 이 영화에서 알랭 들롱의 어두운 면모는 현실과 상충작용을 일으키며 더욱더 미스터리해졌다.

개인적으로는 <사무라이>(1967)에서 보인 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어둠의 암살자로 변신한 배우가 모자를 매만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인물의 불안하고 모호한 감정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어떤 영화들은 피상적인 표현만으로도 시나리오의 내용을 정확히 전달할 때가 있다. 장피에르 멜빌과 알랭 들롱의 협업은 대부분 그러했다. 이후로도 그들은 함께 작업했고 이 행보는 감독의 마지막 영화 <형사>(1972)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970년대에 알랭 들롱은 제작 분야에 뛰어들었다. 직접 출연하고 제작한 영화들 중에는 <애정의 미로>(1971)와 같은 로맨틱코미디도 있었지만 대다수 장르는 장 루이 트랭티냥이나 클로드 브라소가 출연한 누아르물이었다. 그중 각본을 쓰고 출연까지 한 <세 번째 희생자>(1980)는 대중적으로도 크게 성공 했다. 하지만 <세 번째 희생자> 이후 그의 활동 반경은 좁아지게 된다. 주로 수사물에 가까운 스릴러나 갱 이야기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알랭 들롱이 직접 연출한 <형사 이야기>(1981) 나 <최후의 방어선>(1983)도 그런 성향의 영화들이었다.

많은 활약이 있었지만 1980년대 대중에게 그는 여전히 제작자가 아닌 배우로 인식됐다. 당시 텔레비전의 미니시리즈에서 연기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러 스캔들 덕분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로미 슈나이더, 나탈리 들롱, 미레유 다르크, 로잘리 반 브레멘 등과의 사생활 뉴스가 그랬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알랭 들롱은 뉴스에 자주 모습을 보였다. 장마리 르펜을 지지한 내용은 특히 유명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알랭 들롱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아트하우스영화의 목록이 비워진 것을 아쉬워했 다. 그리하여 칸영화제를 겨냥해서 에두아르 니르만즈의 <카사노바>(1993)를 작업했고, 장뤼크 고다르의 프로듀서 알랭 사르드에게 연락해서 <누벨바그>(1990)에 출연했다. 그 후로도 상업영화 대작인 <아스테릭스: 미션 올림픽 게임>(2009)에서 그는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를 패러디하는 역할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굳이 2009년 디오르의 향수 모델로 과거 사진을 사용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영화계에서의 활동만으로도 충분히 알랭 들롱은 3세대 이상의 관객들에게 각인된 유명 배우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칸영화제는 명예 황금종려상을 그에게 수여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배우 중 한명, 누구보다 강한 성격을 가진 공인으로서 활약, 드넓은 음역을 거칠고 강하게 한곳으로 끌어모은 한 사내의 모습을 떠올린다. 매혹적이지만 뜨거운 태양 같은 배우, 그의 단호함과 용기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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