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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가 자세가 될 때, <리볼버>의 영화적 품위

오승욱의 <리볼버>는 드라마의 성질과 장르의 본질을 따르는 척하면서 거스른다. 드라마의 얼개는 있지만 극적인 충격은 없다. 대신 묘사가 있다. 시각적 층위에서 드라마의 극성이 사라진 부분을 자세히 묘사함으로써 극적 수사를 대신한다. 그게 상당수 관객의 심기를 건드렸다. 폼을 잡으며 허세를 부리는 재수 없는 영화, 겉만 그럴싸하며 알맹이는 없는 인물들만 나오는 영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그게 삶의 본질이 아닐까라는 겸손한 통찰을 품고 있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통로인 극적 장치, 클리셰, 선입견 등을 동원하면 안된다는 강박감의 발로로서 우리가 이해하고 싶은 명쾌한 방법론을 거부하고 궤도를 이탈한 채 인간의 이해는 클리셰를 넘어서는 곳에 있을 수 있다는 신중한 묘사를 취한다. 굉장한 척 보이지만 실은 시시한 것들을 묘사하면서 이 영화는 영화적 품격이라는 걸 성취하고 있다. 그 수법이 치밀하고 성실하며 다양한 장인적 기예를 포함하고 있어 연출과 연기, 촬영 등 영화 표현 층위의 모든 것들에서 빼어난 완성도를 이뤄낸다. 평양냉면의 깊은 맛과 유사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맛이 없거나 맛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깊이 있는 척하는 게 아니라 깊이 자체였다.

존엄과 윤리의 표현 방식

<리볼버>에는 분명 허세가 있지만 허세가 일종의 예술적 자세로 용인될 수 있다는 걸 차치하고서라도, 그 허세가 품위가 되는 게 이 영화의 묘미다. <리볼버>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비루하거나 야비한 것들 사이에서 남루한 인간이 존엄을 지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비리 경찰 하수영(전도연)은 허세가 있는 인물이다. 아파트를 보러 다니고 물질적 안정을 위해 부패와 타협한다. 굳이 강조해 묘사한 초반 장면에서 하수영은 위스키를 물에 타 공들여 마시며 위엄 있는 척한다. 위스키를 마실 줄 아는 인간인 그는 혼자 술을 마실 때 물을 떨어뜨려 산도를 높인다.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신중하게. 재수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선 아래의 삶은 살지 않겠다는 자세의 그는 세속적이며 그만큼 자신을 보호하는 데 진지하다. 하수영 역의 전도연의 과도한 긴장을 누르는 존재감은 남들에게 다치지도 남들을 다치게 하지도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며 큰 에너지 소모로 소진됐지만 그걸 발각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물이다. 처음에는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이윽고 우리는 그의 존엄에 존경을 표하게 된다.

허세와 연관지어 보자면 하수영의 폼은 장르영화의 클리셰, 누아르영화의 주인공, 리볼버 한 자루로 복수에 나서는 히로인에 어울린다. 그는 단단한 인격적 갑옷으로 무장하고 수준을 가늠할 수 없는 육체적 강인함을 가장하며 누구에게도 허투루 빈틈을 보이지 않겠다는 철통같은 경계심으로 무장한 인물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어느 젊은 감독과 대화를 나눴는데 그는 영화 초반 하수영이 수상하게 돈을 굴리는 기업 이스턴 프라미스 관계자들을 만나 죄를 뒤집어쓰는 대가에 관해 거래할 때 감독 오승욱이 조율하고 전도연이 수행하는 대화의 호흡에 감탄했다고 말했다. 하수영은 이스턴 프라미스의 범죄를 뒤집어쓰는 대신에 뭘 얻을 수 있는지 계산하는데 하수영의 애인이자 동료 경찰인 임석용(이정재)이 빨리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충고하자 파르르 떠는 기색으로 자신에게 그 정도밖에 못하는 애인/동료를 말로 쏘아붙인다. 거래 과정에서 튀어나온 사적인 분노 표출은 이스턴 프라미스 관계자들과 그들에게 엮여 자신을 희생양으로 몰고 가는 애인에 대해 자신은 강하다는 걸 부질없이 드러내는 허세의 표현이지만 이 느닷없는 대사 전환은 하수영 캐릭터와 연관된 것이다.

한국 사회의 대다수 인간들이 그런 것처럼 하수영은 자신의 본체가 남들에게 보여지는 상태라는 걸 인정하는 캐릭터다. 남들처럼 번듯한 아파트를 구입하기 위해 아마도 그는 임석용과 공모해 부패에 연루됐을 것이다. 남다른 외모를 가진 그는 경찰 아나운서로서 성공한 커리어우먼처럼 맵시나는 정장 차림으로 다니며, 또박또박 걷는 걸음걸이는 그의 자부심/허영심의 표현이다. 수감 생활이 끝나갈 무렵 하수영은 애인 임석용의 자살 뉴스를 접하고 약속받았던 돈 7억원이 날아갔다는 걸 알았으며, 모든 게 무너진 상태에서 강한 전사처럼 비장한 모습으로 출소하지만 자신이나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지 않지만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처절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제부터 그는 강한 전사 역을 연기하고 수행할 것이지만 그 과정의 긴장과 피로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 영화가 관객을 속였다고 오해받을 지점은 이것인데 누아르 장르의 히로인이 예상만큼 강하지 않고 복수의 실행도 힘겹게 행운의 힘을 빌려 이뤄내기 때문이다. 히로인의 수행 능력을 설정하면서 감독 오승욱은 장르 히로인의 관행을 계속 조금씩 신중하게 수정하는 쪽으로 묘사에 공을 들인다. 전도연은 장르 히로인의 외피를 미세하게 벗겨내어 자기식으로 변형시키는 탈피의 최적 수행자로, 자신의 불안과 긴장을 최대한 감추는 경직도를 얼굴과 몸에 드러내는 표정과 몸짓을 전시한다.

전도연이 극 중 부여받은 히로인의 자질을 연기하기 위해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억누른다면 임지연이 연기한 정 마담, 정윤선은 팔색조처럼 감정을 다양하게 표출한다.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밑바닥 인생이지만 두려움조차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이쪽저쪽 도구로 쓰이는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면서 전도연/하수영과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윤리적 척도를 본능적으로 지키는 인물이다. 그는 이스턴 프라미스측 관계자들과 하수영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면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저울질하며 해야 할 행동과 하고 싶은 행동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임지연의 표현주의적 연기는 정 마담 캐릭터와 딱 맞아떨어지며 직업적 관계들 속에서 인간은 여하튼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존재라는 명제를 그럴듯하게 구현하는데 그 와중에 소름 끼치는 순간은 그런 그가 의도치 않게 진심을 드러낼 때다. 도대체 하수영의 어디가 좋아서 그의 편을 드는지 극 중 주변인물뿐 아니라 관객인 우리도 궁금해할 때 정윤선의 대답은 ‘에브리싱’이다. 그 말을 할 때 그의 표정, 억양은 이런저런 거추장스러운 극적 핑계를 날려버리는 명쾌함이 있다.

지창욱이 연기한 앤디도 정윤선 못지않게 내지르는 연기를 보여주지만 그의 활달함과 야비함이 불안과 외로움의 외화라는 걸 알기까지는 극적 대단원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는 손에 잡히는 누구든 파멸시키고 조롱하고 막돼먹게 굴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 말종인데 최고급으로 치장한 그의 물질적 위세와 아름다운 외모에 비해 빈약하고 비열한 품성의 비대칭 맞물림은 캐릭터의 휘발성을 극도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이 영화의 반드라마적 본질은 영웅은 영웅답게 폼을 잡지만 영웅다운 강인함을 갖추지 못했고 악인은 최상의 힘을 갖춘 듯하지만 내면의 연약함을 비열함으로 포장한 것뿐이라는 진실을 드러내는데 앤디는 이 양극 반대편에 있는 인물이다. 드라마의 극성이 누적되며 폭발해야 할 지점에서 캐릭터들의 외형과 본성은 계속 어긋나며 결국 다 별 볼 일 없는 힘의 소유자들이라는 자명한 진실만 남는다. 그럴 때 남는 것은 각자 자신에게 물어야 할 존엄과 윤리뿐이다.

하수영과 정윤선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포장한 존엄과 윤리의 표현 방식은 이 영화의 수많은 조단역 캐릭터들에 고루 분배돼 있다. 카메오로 출연한 정재영은 강직한 전직 형사의 모습에 배어 있는, 세파에 밀려난 분노와 연륜이 무엇인지를 경탄할 만한 연기로 보여준다. 이정재는 하수영이라는 연인을 배반하고도 최소한의 안전판을 마련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인간의 굳은 처연함을 화면에 보여주지 않고도, 곧 사건화를 통해 드러내지 않고도 간헐적인 회상 장면에서의 단단한 자태로 암시해낸다. 비루함과 야비함의 전시장이라 할 이 영화의 캐릭터 목록에서 하수영과 정윤선을 비롯한 모든 인물들은 그들 각자의 캐릭터의 이유를 사건 설명을 통한 드라마가 아니라, 곧 플롯이 아니라 그들의 자태와 행동을 통해 표상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전혜진이 연기한 이스턴 프라미스의 최종 보스 그레이스는 뜻밖에도 냉혈한이 아닌 연약한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어쩔 수 없이 보여준다. 캐릭터들의 본질은 사건화된 플롯 속에서 용해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파편화된 행동을 통해 외화되는 바, 이는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사단의 핵심고리 역할 인물인 무당 황정미의 정체가 끝내 자세히 밝혀지지 않는 것과 통한다. 황정미를 찾아서 횡단하는 것처럼 보였던 하수영의 플롯상의 여정은 황정미가 일종의 맥거핀이었던 것으로 귀결된다. 황정미를 둘러싼 사건의 여진을 밝히는 게 플롯의 목적인 것처럼 보였으나 그게 아니었으므로 드라마의 맥락은 허무하게 소실되고 대신 강렬한 캐릭터의 여진만 남는다. 사건들의 윤곽은 세워놨으되 그걸 인과적으로 풀어내는 것은 이 영화의 목표가 아니었다. 대단원에 밤의 숲에서 벌어지는 대결 장면과 새벽의 대치 장면이 액션의 대환장 시퀀스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피로와 회한이 짙게 배어나는 허무의 시퀀스로 끝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감독 오승욱이 보여주려 한 것은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각자 부여받은 존엄에의 의무를 힘겹게 완수하는 캐릭터들의 긴장과 힘이었다. 그건 시시한 게 아니라 치열한 것이고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며 가짜 같으면서도 진짜를 겨냥한 또 다른 차원의 일급 묘사다.

시각적 쾌락은 어디서 발생하는가

<리볼버>에서 강해 보이는 악당들의 실제는 모두 허상이며 연극적 페르소나 뒤에 그들이 감추고 있는 것은 약하고 야비하며 그걸 위엄으로 포장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가련함이다. 그들은 강한 척하지만 약하고 야비하다. 영화 대단원에 그들의 이면이 드러날 때 앤디는 “엄마 나 버리지마”라고 애원한다. 그는 분리불안장애 환자였다. 그는 계속 사고를 침으로써 엄마에게 자기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의 엄마 그레이스는 대단원에 제법 그럴싸하게 본격적으로 등장하지만 실은 혼자서는 휠체어 하나도 이동시키지 못해 쩔쩔매는 연약한 중년 여자다. 보스이자 엄마 노릇에 지친 그는 휠체어를 내팽개치고 그냥 자리를 떠나려 한다. 영화의 속성, 허세/클리셰에 어울리는 퇴장은 아니지만 인위적인 가면들이 공기처럼 연소해 없어져버리는 듯한 해방감을 이 장면은 만끽하게 해준다. 바로 이것, 허세를 예술적 자세로 치장했으나 종국에 남게 되는 허무감에서 인간의 페르소나와 관계의 면면을 직시하게 하는 침착한 품위의 향기가 <리볼버>의 훌륭한 점이다. 영화에 허다하게 나오는 인물들의 대화 장면은 사건의 해결보다는 인물의 캐릭터성에 방점을 찍는 뛰어난 숏/리버스숏의 조합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정확도와 타이밍, 리듬의 완성도는 장피에르 멜빌의 그것에 비할 만큼 정교하며 영화학교 교재로 쓸 수 있을 수준이다. 영화는 스펙터클에서 출발했고 거기에 이야기 장치가 부가됐으며 다양한 이야기 장치와 시각적 관습을 가리켜 우리는 장르 관행이라 부른다. 좋은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메타포를 품게 되어 있고 대개 우리는 거기에 만족한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가 스펙터클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모든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맥거핀이라는 것을 뻔뻔스럽게 증명하면서도 돈을 끌어들여 독자적인 표현을 이뤄낸 감독들을 20세기에는 ‘작가’라고 불렀다. 스펙터클이 대규모 자본을 투입한 물량의 크기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인물의 눈동자를 보여주는 것에서도 시각적 쾌락이 발생한다는 것을 그들은 다양한 색깔의 영화를 통해 증명했다. 스펙터클과 이야기의 허세와 과장이 영화 매체의 필수품으로 장착된 오늘날에 얼굴 표정과 몸짓의 떨림, 활달한 행동 묘사와 연출만으로도 시네마틱한 스펙터클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영화론은 소수의 것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그 맥은 유장하게 이어져 21세기에도 유효할 것이다. <리볼버>는 감독과 배우, 촬영을 비롯한 여타 기술 스태프들이 영화의 무시된 본질을 오늘에 되살려 장엄하게 구현해낸 업적이다. 나는 영화란 무엇인가, 장르란 무엇인가, 시네마틱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는 이 영화가 범람하는 액션 포르노에 대한 값비싼 방부제이며 초라한 흥행이라는 슬픈 결과에도 불구하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영화적 성과로 길이 평가받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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