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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아카데미 영화상
2001-04-03

지상 최대의 쇼, 모범답안 공개하다

The 73rd

Annual Academy Awards

◆ 3월25일 열린 제73회 아카데미 영화상, 작품상은 <글래디에이터>에 돌아가

“혹시 아카데미 회원들이 보름달이 뜬 베벌리힐스 언덕에 몰래 모여 이마를 맞대고 사전 회합이라도 가진 게 아닐까?”

어느 해보다 치열하고 기발했던 스튜디오들의 홍보 전장을 통과해 지난 3월25일(현지시각) 저녁 LA 슈라인 오디토리엄에서 스티브 마틴의 사회로

커튼을 연 2001년 아카데미 영화상은 그런 허무맹랑한 상상력이 슬며시 발동할 정도로 주요 후보작에 트로피를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12개 부문의

최다 후보 지명을 받은 드림웍스의 <글래디에이터>와 외국어영화 사상 최고 기록인 10개 부문 노미네이션을 따낸 동방의 센세이션 <와호장룡>,

5개 부문 후보로 오른 <트래픽>, 세 영화는 25일 저녁 내내 벤허와 메살라의 전차처럼 말머리를 다툰 끝에 <글래디에이터>가 작품상을 위시한

5개, <와호장룡>이 4개, <트래픽>이 감독상을 포함한 4개의 오스카를 수확했다.

좀처럼 손에 땀이 쥐어지지 않는 이상한 접전. 심지어 이들이 배분받은 상의 면면도 모서리가 깔끔했다. 시적인 미감으로 수놓인 <와호장룡>은

외국어영화상 외에 촬영상과 음악상, 미술상으로 ‘가장 아름다운 영화’로서 명예를 인증받았고, 면밀한 구성과 명석한 영화적 연출이 돋보인 <트래픽>은

감독상과 편집상, 각색상 위에 베네치오 델 토로의 남우조연상을 얹었다. 할리우드 팝콘무비의 전통적인 쾌락을, 고전 장르의 부활과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조력을 통해 한뼘 더 밀어붙인 <글래디에이터>는, 의상상, 음향상, 시각효과상, 남우주연상으로 이어진 개가를 작품상으로 마무리했다.

<글래디에이터><와호장룡><트래픽> 3파전

최다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가 최후에 왕관을 쓰는 오스카의 관례는 올해도 지켜졌고, <아메리칸 뷰티>의 오스카 팡파르를 신호탄으로 2000년

내내 풍작을 누렸던 <글래디에이터>의 제작사 드림웍스는 또 한번 행운의 해를 꿈꿀 수 있게 됐다. 작품상과 감독상을 두 영화가 나눠 갖는 것은,

두편의 후보작에 어슷비슷한 호감을 가진 투표자들이 한 영화에 표를 몰아주기 미안하게 느낄 때 흔히 택하는 절충안의 결과. 가깝게는 제71회

시상식에서 <셰익스피어 인 러브>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나란히 트로피를 받은 바 있다. 봄에 개봉해 1억8700만달러의

국내 수입을 올린 블록버스터로서는 매우 드물게 아카데미 작품상의 주인이 된 <글래디에이터>의 제작자 더글러스 윅은 “세 대륙(촬영지)을 그의

완벽주의로 침공한” 리들리 스콧 감독에게 감사를 표했으나, 앞서 감독상을 소더버그에게 빼앗긴 객석의 스콧 감독은 굳은 얼굴을 끝내 풀지 못했다.

작품상과 감독상에서 고배를 들기는 했으나 <와호장룡>의 선전은 리안, 주윤발, 양자경, 탄 둔, 요요마 등의 얼굴로 오스카 시상식을 메워,

중국영화인들의 입지 강화와 이질적 문화를 점점 빠른 속도로 흡수 소화하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탄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와호장룡>

외에도 올해 오스카에서는 대사의 1/3이 자막으로 상영된 <트래픽>이 노미네이트된 5개 부문 중 4개 부문을 수상하고, 영국, 호주, 프랑스,

뉴질랜드 출신의 영화인들이 후보 지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 할리우드의 실체에 대해 부지런한 재고찰이 필요한 시점임을 간접적으로 일깨웠다.

스티븐 마틴, 우주정거장에서 착륙한 오스카의 호스트

소품으로 우주정거장이 척척 동원되고 세계 정상의 음악인들이 막간을 메우는 최고급 엔터테인먼트 패키지 아카데미 영화상은 영화 페스티벌이라기보다

영화를 테마로 한 ‘지상 최대의 쇼’에 가까운 행사. 하나씩 떼어놓고 보는 일도 하늘에 별따기인 할리우드 스타들이 제일 좋은 나들이옷을 차려입고

떼지어 앉아 있는 비현실적인 장관은- 참석한 스타들 자신을 포함해- 지켜보는 사람들을 압도한다. 그리고 그 스펙터클 안에서 할리우드는 원로를

기리고 새로운 스타를 등극시키며 할리우드의 번영과 영향력을 자축하는 ‘연례 부흥회’를 갖는다. 세계 8억 인구가 지켜본 올해 오스카 시상식에서

관심의 초점은 7차례나 시상식을 이끈 빌리 크리스털로부터 사회자 마이크를 넘겨받은 코미디언 스티브 마틴의 처녀 진행. 크리스털이 즐기던 뮤지컬

형식의 오프닝 대신 지상 235마일 상공의 우주정거장 알파에서 종이인형의 형태로 쏘아내려져 슈라인 오디토리엄 무대에 착륙한 마틴은 우피 골드버그나

빌리 크리스털에 비해 한결 도회적이고 은근한 성인용 조크로 쇼를 주도했다. “1월에 MC 제의를 받고 주름살 수술이 회복될 시간이 충분할까

고민했다”고 말문을 연 마틴은, 개런티 높은 줄리아 로버츠에게 극장표 값 인상의 책임을 물은 것을 비롯해 염문설, 성형수술, 자선파티 등 할리우드의

우스꽝스러운 풍속들을 신랄하지만 무례하지는 않게 절묘하게 수위를 조절한 농담으로 가격하며 시상식을 매끄럽게 끌어갔다.

크로와 로버츠,할리우드 대관식을 치르다

최근의 스캔들 덕택에 스티브 마틴이 쏘아대는 짓궂은 농담의 주요 과녁이 된 러셀 크로는 지난해 <인사이더>의 빼어난 연기로

후보에 올랐다가 수상하지 못한 남우주연상을 뒤늦게 접수해 <여인의 향기>의 알 파치노, <아메리칸 뷰티>의 케빈 스페이시가 그랬듯 경력 최고의

연기로 오스카를 차지하는 배우는 많지 않음을 입증했다. 1980년대 뉴로맨틱스 밴드를 연상시키는 앞머리와 좀 어색한 연미복 차림으로 단상에

오른 크로는 “리들리 스콧이나 제이미 벨, 그리고 나처럼 어딘가의 ‘변두리’에서 자란 사람에게 이런 꿈은 상상도 못할 엄청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순간은 그런 유년의 상상과 직접적으로 이어져 있다”고 초라한 그늘에서 꿈을 키우고 있는 세상의 젊은이들을 향한 연대감을 표했다.

이로써 <캐스트 어웨이>에서 고독한 원맨쇼를 벌인 톰 행크스는 스펜서 트레이시와 공유한 동률 기록을 넘어 세개째의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수집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선배 스펜서 트레이시가 2회 수상 뒤 6차례의 노미네이션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수상에 실패했던 아카데미 야사를 돌아보면

행크스는 아직 참을성을 발휘해야 할 때라는 것이 여론이다.

행크스와 크로가 줄다리기를 벌인 남우주연상과 달리 여우주연상은 오래 전부터 ‘양쪽 면에 모두 줄리아 로버츠의 얼굴이 그려진 동전 던지기’라는

평판이 나돌았던 부문. <에린 브로코비치>의 강인한 독신모 연기로 자신에게 꼭 들어맞았던 출세작 <귀여운 여인>의 캐릭터를 확대 강화한 줄리아

로버츠는 이름이 호명되자, 예상한 결과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졸업 무도회 여왕으로 뽑힌 여고생처럼 상기된 얼굴로 “어머, 이 트로피 너무

예뻐요!”를 외쳐대며 단상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 여태 무관으로 할리우드를 지배해온 여왕이 마침내 대관식을 치르는 순간이었다. 짐짓 통제력을

잃은 척, 줄리아 로버츠 표 사랑스러움의 극치를 과시하며 “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던 좋은 연기자가 되기를 욕심내도록 나를 자극한

감독에게 감사한다”는 적절한 멘트와 탈락한 후보자들을 향한 자매애까지 천명한 로버츠의 모습은 ‘프로 스타’의 진면목을 실감케 했다. 주·조연

구분이 없는 각종 영화상에서 러셀 크로와 톰 행크스를 제친 베네치오 델 토로도 일찌감치 수상이 예견됐던 후보. 무려 네 시간을 넘긴 지난해

시상식 중계를 의식해 시상식 프로듀서 길 케이츠가 식전에 가장 짧은 수상소감 발표자에게 상품으로 내건 와이드 스크린 TV를 마다하고 수다를

떤 줄리아 로버츠와 대조적으로, 베네치오 델 토로는 단 37초 만에 촬영지 주민에 대한 감사를 곁들인 무뚝뚝한 소감을 마쳤다.

오스카, 영화에 대한 화려한 블록버스터

대체로 모범답안을 낸 제73회 오스카 시상식에서 비교적 의외의 수상자가 나온 부문은 여우조연상과 감독상, 그리고 각본상 정도. 마샤

게이 허든은, 에드 해리스가 주연, 감독한 추상 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의 전기영화 <폴록>에서 화가의 일생을 지탱한 아내 리 크레스너로 ‘조연상’의

개념에 딱 맞는 역을 열연해 영국의 두 원로 줄리 월터스와 주디 덴치, <올모스트 페이머스>의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케이트 허드슨을 꺾었다.

<글래디에이터>와 <와호장룡>이 용호상박의 결투를 벌이는 듯하던 싸움판에 홀연히 끼어들어 감독상을 가볍게 챙긴 ‘제3의 사나이’ 스티븐 소더버그는

“갑자기 내일 (<오션스 일레븐>의) 촬영을 나가기 싫어졌다”고 미소짓고는 “그것이 책이건 영화건 춤이건 그의 인생 하루를 창작으로 보내 본

모든 이에게 감사하고 싶다. 예술이 없다면 이 생은 살 만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근사한 말을 오스카 어록에 남겼다. 한편 리안 감독은 감독

길드가 주는 상을 받고도 오스카를 놓친 다섯 번째 감독이 되는 불운을 곱씹어야 했다. 흔히 주요 부문에서 외면당한 지적인 작은 영화들에 위로로

주어지는 각본상 역시 작가 길드 상을 받은 <나를 의지해> 대신, 카메론 크로의 <올모스트 페이머스>에 돌아갔다. 한편 시드니에서 위성중계로

<원더 보이스>의 <`things Have Changed`>

를 들려준 밥 딜런은 골든글러브에 이어 오스카 주제가 상을 받은 다음 아카데미의 ‘대담한’ 결정에 감사하면서 “여러분 모두 평화와 고요와

선의지로 축복받길 바란다”는 경건한 인사를 덧붙였다.

과거 시상식의 클라이맥스를 이뤘던 역대 수상자들의 감격적인 조우, 노배우 잭 팔란스의 팔굽혀펴기, 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배우 크리스토퍼

리브의 등장처럼 우발적인 드라마가 없었던 올해 오스카에서 그나마 감동과 명상의 순간을 제공한 것은 원로 영화인들. 어빙 탈버그 상을 수상한

이탈리아 출신 노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는 어빙 탈버그도 MGM을 운영할 당시 스물세살이었음을 상기시키며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젊고 새로운

재능에 좀더 넓게 문호를 개방하라고 권고했다. 한편 <왕과 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사브리나> 등을 쓴 시나리오 작가 어니스트

레만은 명예 오스카상을 받고 “작가들은 익명성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고통받아왔다”며 평론가들에게 “모든 영화는 각본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기억해 달라”고 청했다.

촬영감독으로 최초로 평생공로상을 받은 영국의 베테랑 잭 카디프(<흑수선> <분홍신> <아프리카의 여왕>)는 천진한 기쁨을 84살의 얼굴

위에 한껏 피워올렸다. “분명 꿈은 아닌데, 아주 꿈과 비슷하네요. 오늘밤은 내가 찍었던 그 많은 테이크와 수백만의 리테이크들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수고로 보이게 합니다. 이 많은 엑스트라들, 검은 타이들, 특수효과, 이 ‘영화’는 분명 예산을 초과할 거예요.” 그의 떨리는

고백은 어쩌면 취향의 차이를 막론하고 오스카라는 판타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영화팬 모두의 소회가 아닐까. 74년을 계속되어온 영화에

대한 길고 긴 영화, 오스카상은 내년에도 변함없는 블록버스터로서 우리의 소매를 잡아당길 것이다.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