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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사탄의 태양 아래>의 감독 모리스 피알라
2003-01-22

그의 죽음으로,프랑스 영화는 고아가 됐다

<사탄의 태양 아래>(1987)가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1987년 칸영화제에서 있었던 일은 아마도 모리스 피알라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시상식에서 이 영화에 황금종려상이 안겨지자 관중은 이건 말도 안 되는 결과라는 듯 야유를 퍼부었다. 피알라는 이렇게 수상 소감을 말하며 관중의 반응을 되받아쳤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게 쏟아진 야유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 당신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나도 당신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다.” 피알라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이미지가 절대 타협을 거부하는 고집쟁이라고 한다면 이 에피소드는 그것을 잘 드러내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하겠다(피알라를 정의하는 또 다른 이미지들로 성가신 불평꾼, 지독한 염세주의자, 같이하기가 까다로운 영화감독 등이 있다). 단언하자면 피알라라는 이는 여기서 보여주는 태도, 즉 영화를 보는 이들이 구하고자 하는 만족감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 듯 거의 호전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당연히 불친절하기가 이를 데 없는 자기식의 영화 만들기를 추구했던, 비타협의 시네아스트였다.

44살에 감독 크레딧

피알라는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우회로를 거친 뒤에 본격적으로 영화감독의 길에 접어든 사람이었다. 에콜 데 아르데코와 에콜 데 보자르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던 그는 40년대 말에 여러 번의 작품 전시회를 열곤 했던 화가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50년대에 그는 연극무대 위에 선 배우로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고(이런 경력을 살려 그는 이후 클로드 샤브롤의 <야수는 죽어야 한다>(1969)나 장 외스타슈의 <나의 작은 연인들>(1975) 등과 자기 영화들을 비롯해 몇편의 영화들에도 배우로 출연했다) 그러면서 꽤 많은 아마추어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피알라는 60년에 베니스영화제에서 호평받은 단편 <사랑은 존재한다>를 완성한 뒤로 16mm 단편영화와 TV다큐멘터리들을 만들며 60년대를 보냈다. 그러나 그에게 장편영화를 만들 기회는 비교적 늦게 찾아왔다. 69년이 되어서야 피알라는 첫 장편 <벌거벗은 어린 시절>을 만들며 본격적으로 영화감독의 경력을 시작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마흔네살이었다.

피알라는 우선 장 외스타슈, 필립 가렐, 앙드레 테시네 등과 함께 포스트 누벨바그 시대의 시네아스트로 분류되곤 한다. 그러나 영화감독으로서의 세대가 아니라 자연인으로서의 세대를 말한다면, 피알라(1925년생)의 그것은 앞에 언급한 감독들보다 10년에서 15년 정도 앞선 것이다. 나이로만 치자면 피알라는 누벨바그의 대열에 합류했어야 했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누벨바그 멤버들과 자신의 관계를 토끼와 거북이의 그것에 비유할 만큼 그는 자기 세대의 흐름에서 소외된 존재였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누벨바그의 파벌의식을 싫어한다고 말하면서 심지어는 누벨바그의 무효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누벨바그는 일군의 친구들로 이뤄져 있었다. 그래서 그들 일원에 속해 있지 않을 경우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여하튼 자기가 속해 있어도 됐을 조류로부터의 ‘소외’는 피알라를 고독한 시네아스트로 보이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누벨바그에 대한 그 자신의 혐오에도 불구하고 피알라를 그것과 완전히 절연한 존재로 보기는 어렵다. 장 르누아르의 유산을 이어받았고- 르누아르는 피알라가 자신의 정신적 스승으로 생각하는 이였고 르누아르의 <인간야수>(1938)는 특히 피알라가 찬탄한 영화였다- 그의 후계자들임을 자처했던 누벨바그의 영향으로부터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았던 피알라는, 어떤 면에서는 누벨바그보다도 훨씬 누벨바그적인 영화들을 만들었던 시네아스트였다. 피알라의 영화들은 픽션 안에다가 리얼리티를 끌어들이려 하는 영화, 그러기 위해서는 자발성을 살려야 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누벨바그영화들의 미학, 그것들의 윤리와 겹치는 것들이었다. 동시에 그런 식의 미학과 윤리라는 측면에서는 누벨바그영화들을 넘어서는 것들이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샤를 테송의 말을 빌리자면, 그런 피알라의 영화들은 “누벨바그가 약속은 했지만 배출해내지는 못했던 것들”이었다.

리얼리스트, 혹은 자연주의자의 시선

피알라는 장편 데뷔작 <벌거벗은 어린 시절>에서부터 배우가 아닌 현실의 인물들을 기용하는 방식과 디테일에 집중하는 식의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을 통해 이미 리얼리티에 가까이 다가가는 픽션영화를 만들었다. 이후로도 피알라가 만든 영화들은, 영화들마다 어느 정도 편차는 있겠지만 엄정한 리얼리스트의 시선, 혹은 자연주의자의 그것으로부터 나온 산물들이었다. 피알라는 자기 영화들에다가 시각적인 장식을 부여하는 것을 혐오했고 스토리 전개에다가 조작(이를테면 시간 조작 같은)을 부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보는 이의 감정을 조작하기를 원하지 않는 그는 여간해서는 자기 영화들에 음악을 이용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판단을 집어넣길 자제하면서 피알라는 진행 중인 현재의 순간들, 그 디테일들에 집중했다. 동시대의 환경 속에 놓인 사람들을 그린 영화들은 그렇다쳐도, 이런 식의 미학이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영화들, 이를테면 ‘폴라’(polar)라 불리는 프랑스식 범죄영화(<폴리스>, 1985)나, 사탄의 지배를 두려워하는 신부의 내면갈등을 다룬 영화(<사탄의 태양 아래>, 1987), 그리고 정열적인 예술혼의 상징이다시피한 한 예술가의 삶을 그린 영화(<반 고호>, 1991)에서도 여전히 피알라적인 미학이 구사된다는 점에서 피알라의 노력은 정말이지 완고하다는 인상을 준다. 예컨대, <폴리스> 같은 경우는 형사와 마약상의 애인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는 스토리만 보면 영락없는 범죄 장르의 영화로 생각하지 쉽지만, 피알라는 여기에 자기 식의 리얼리즘적 미학을 동원해 이걸 전형적인 ‘피알라의 영화’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사탄의 태양 아래>에서 피알라는 외양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으면서 한 신부의 내면적 투쟁기를 그려냈고 <반 고호>에서 그는 불타는 예술혼을 주체하지 못하는 고흐가 아니라 숨쉬며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고흐를 보여줬다.

피알라는 우회적 표현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까다로운 리얼리스트의 카메라에다가 어떤 위기의 순간들을 포착해낸다. 그의 영화들은 종종 무언가 위기를 맞은 사람들이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것들이다. 사회보호기관에 맡겨지면서 비행에 빠져드는 소년(<벌거벗은 어린 시절>), 서로를 파괴하기에 이르는 커플(<우리는 같이 늙어가지 않을 것이다>, 1972), 여러 남자들을 ‘섭렵’함으로써 가족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를 꿈꾸는 소녀(<사랑이야기>, 1983) 등은 모두가 그들의 삶에서 어떤 위기의 순간에 몰려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리얼리스트의 냉정한 시선에 담긴 이들의 이야기는 보는 이들에게 심각한 부담감과 갑갑함을 안겨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스토리와 형식미를 가지고 다른 누구도 보여주지 못할 감동의 순간을 선사해주는 것도 피알라의 영화다.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되고 만 <르 가르슈>(1995)의 마지막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둔중한 감동을 안겨줄 만큼 대단히 인상적인 순간이다. 영화는 부인을 그저 쾌락의 대상 정도로밖에 보지 않는 한 ‘인간야수’의 이야기를 그린다. 자신은 모르겠지만 여하튼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 대해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이 남자 제라르는 부인 소피와 별거를 포함한 갈등을 빚는다. 서로 헤어졌던 제라르와 소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과 함께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 이건 통상적인 멜로드라마라면 가족간의 ‘감동적인’(실은 감상적인) 화해로 그려지겠지만, 피알라는, 그리고 그의 인물들은 이것이 그들을 실존의 굴레로 이끄는 어떤 위기(즉 결정적인 순간)임을 알아차린다. 실존에 대한 이같은 미묘한 인식으로 인해 이 장면은 묵묵히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그로 인해 언어적 이해로 잘 포섭되지 않는 느꺼운 감동을 만들어낸다.

피알라의 마지막 영화 <르 가르슈>는 분명 대단히 높게 평가받을 만한 작품이지만 이 대단한 자존심의 소유자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이 영화에 대해 실망한 나머지 ‘완성’을 마치기 전에 잠적해버리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나중에 이렇게 설명했다. “영화가 나를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피알라의 이 말을 바꿔서 이야기해보자면, 첫 장편을 만든 이후 30여년 동안 10편의 장편영화를 만들며 고집스럽게 자신의 견고한 영화세계를 만들어갔던 그를 아마도 후대의 영화사는 결코 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의 죽음 앞에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인 질 자콥은 “피알라가 죽음으로써 프랑스 영화계는 고아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프랑스 영화계는 정말이지 거목을 하나 잃었다. 글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