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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를 흐르는 두개의 시간, 임권택과 홍상수

아버지-임권택과 아들-홍상수의 서로 다른 ‘길 가기’

길 위의 소년·소녀로 끝나는 엄청나게 다른 두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사마리아>를 매개로, 얼마 전 나는 어설프게나마 ‘아버지’를 둘러싼 한국영화의 지형도를 그려보려 했다(<씨네21> 448호). 그뒤 임권택과 홍상수가 돌아왔다. 공교롭게도 <하류인생>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역시 길 위에서 끝난다. 아버지가 된 남자와 아버지가 될 것 같지 않은 남자가 명동과 부천 어딘가를 터벅터벅 걸어가거나 뻘쭘하게 서성인다. 이 묘한 중첩은 그러나 길가기의 작가에 다름 아닌 임권택과 홍상수로선 절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그 길가기는 얼마나 다른 시간을 살아내는가? 그 시간성의 단층들 위에서, 정신분석에 묶였던 공시적 지형도는 통시적으로 확장돼야 할 것 같다. 다행히 지난호의 김소영·정성일·허문영 대담은 몇몇 영감어린 화두들을 툭툭 던져주었다. 남은 일은 좀더 텍스트에 천착하여 숙제를 푸는 것일 테다.

임권택의 시간 - 근대적 아버지 체제

임권택은 90년대 들어 줄곧 한국 근현대사를 훑어왔다. 지난 1세기에 대한 뒤늦은 되새김이었다. 그 구멍난 역사의 마지막 한 조각인 <하류인생>은 임권택이 유독 비워둔 60년대 전후를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기분으로 여지없이 주파해버린다. 심지어 당시의 열악하고 검열 많았던 영화제작 현장까지 들추는 감독은 70년대까지 자신이 왜 반공영화 따위나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내비치기도 한다. 물론 이 고백록은 권력과 무관하면서도 닮아가고 권력에 기생하면서도 반발했던 건달의 초상화로 변형된다. 그런데 시위대와 전경 사이를 얼결에 빠져나오던 최태웅은, 적절히 비굴하고 영악하게 ‘더러움을 매니지하며’ 살았을 대다수 소시민과 먼 존재가 아니다. 임권택에겐 체제/반체제, 진보/보수로 재단될 수 없는 틈새의 인간이 늘 관심사였기 때문. <하류인생>은 그 인간이 하류의 체제 아래서 어떻게 먹고살아야 했는지를 유례없이 보여준다. 최태웅은 정치깡패에서 영화제작자로, 미군에 빌붙는 군납업자로, 정보부에 알랑대는 건설업자로 아무 전문성도 없이 둔갑하는데, 고아에서 벼락부자로 출세하는 그 하류의 인생유전은 하류의 국가권력 및 천민자본주의와 한 몸이다.

우연찮게도 <효자동 이발사>는 터프한 건달 대신 순박한 소시민을 내세운 <하류인생>처럼 보인다. 임권택이 자기 세대를 얘기하는 동안 임권택의 아들뻘인(역시 임씨인) 임찬상은 아버지 세대의 얘기를 한다. 그 아버지 성한모 또한 권력의 머리맡까지 진입했다가 여지없이 퉁겨나는 하류인생이다. 이승만 때만 해도 세상물정 모르는 소년과 다름없던 성한모와 최태웅은 4·19와 5·16에 맞춰 아들(386세대)을 얻더니, 박정희 말기엔 세상만사 다 겪은 아버지(박정희 세대)가 돼버린다. 곧,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 이름없는 떠돌이 아비의 아들인 최태웅은 부재하는 아버지 대신 나쁜 아버지(권력) 밑에서 나쁜 아버지-되기를 학습한다. 성한모는 그 나쁜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살해한 뒤에야 겨우 아버지 구실을 한다. 한데 최태웅이 맑아질 즈음을 기준으로 <하류인생>을 뒤집으면 <박하사탕>이 된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성한모의 아들 낙안과 동갑내기일 김영호는, 20여년 뒤 IMF로 파탄날 차세대 아버지 아니던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넘나들던 그는 독재자들의 전성시대를 거쳐온 대부분의 하류인생에 온전한 아버지-되기가 불가능함을 이미 보여준 것 아닐까? 요컨대 ‘한국영화가 애타게 찾는 자기 이미지’의 한축은 (박정희 세대든 386세대든, 체제/반체제, 진보/보수 이전에) 허문영 말대로 프랭크 카프라의 주인공과 같은 근대적 시민-아버지일 텐데, 그 자리는 늘 근대화를 획책한 권력이 차지했던 거다.

근대적 아버지-되기의 실패는 다리의 상처를 반복한다. 최태웅은 다리에 칼이 꽂히고, 성낙안은 고문으로 주저앉으며, 김영호는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그런데 신화 속의 오이디푸스 또한 친부로부터 버려질 때 생긴 발의 상처를 운명의 표지처럼 갖고 있다(오이디푸스=‘부은 발’이란 뜻). 물론 이런 물증이 없더라도, 해방 뒤 남한의 아들들은 국가권력을 겨냥한 부친살해와 그것에 굴복하는 나쁜 아버지-되기라는 딜레마에 처한 오이디푸스였다. 위안이라곤 창녀 아니면 어머니뿐. 어머니로 표상되는 순수를 앗아간 건 (한국영화에 줄기차게 등장해온) 기차로 표상되는 근대화의 시간, 곧 아버지 체제의 시간이다. 김영호가 절뚝거릴 때면 종종 기차가 지나가는데, 기차와 인간의 그 속도차는 근대화의 비극을 상징한다. 김영호는 그 일방적이고 거대한 완력을 멈추고자 팔을 벌리며 상상적으로 기차를 거꾸로 돌린다. <하류인생>은 하천가로 내려가며 시작했다가 하천가에서 올라오며 끝나는데, 최태웅이 하천가로 뛰어내릴 때 다리 위로 기차가 후닥닥 지나간다. 이 짧은 컷이야말로 이후에 펼쳐질 초고속 하류의 시대, 앞만 보고 내달리는 근대적 시간을 내포한 주름과 같다. 그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단 한번의 순간들을 일직선으로 주파한다.

근대를 질문하며 천착하는 노장

불행히도 남한의 근대화는 기차의 관점에선 진보지만 인간의 관점에선 타락이었다. <하류인생>의 잃어버린 시간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기 변명과 ‘그래서 안타깝다’는 자기 연민으로 추억된다. 386세대의 과거는 한발 더 나아가 종종 ‘되찾고 싶다’는 열망으로 향수되었다. <박하사탕><친구><말죽거리 잔혹사><올드보이> 등이 돌아가는 70년대 후반은 박정희 죽음 직전의 폭풍전야 같은, 시간이 멈춘 듯한 찬란한 한때다. 그 순수의 기원은 <하류인생>에선 순수가 회복되려는 종착지처럼 어른거린다(“그의 인생이 맑아지려는 조짐이 보였다”). 이처럼 오염되지 않은 기원을 희구하는 건 그것을 유토피아처럼 투사하려는 열망과 닿아있다. 현재는 부정적이지만 과거와 미래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긍정되는 과거는, 사실 지금보다 덜 혹독했을 리 없는! 그때를 역사에서 떼어내어 판타지로 박제할 위험과 멀지 않다(유토피아도 마찬가지다). 많은 과거회귀 영화들이 노스탤지어에 그치는 이유가 그러하다. 역사는 세트에 안치된 채 지워지고, 그 자리엔 오이디푸스식 가족드라마와 휴머니즘이 상투적이고 장르적으로 들어선다. <효자동 이발사>는 허구와 역사 사이의 어긋난 균형을 배우의 개인기에 기댄 휴머니즘으로 땜질한다. <하류인생>도 이념, 체제, 역사적 성찰보다 세월을 해쳐온 인간의 정서에 주목하는 임권택 특유의 휴머니즘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임권택은 근대적 시간 위에서 꿈꿀 만한 판타지를 서늘하게, 때로 가볍게 피해가며 놀라움을 전해왔다. <길소뜸>이나 <서편제>에서 가족은 서로를 확인하면서도 헤어지며, <창>에서 그토록 그리던 고향은 싱겁게 확인되고 무시된다. 이창동에게선 고향-집-가족으로 연결되는 정주의 꿈을 임권택은 길 위에 풀어놓고 가버린다. 많은 영화들은 길을 비추며 끝나고, 그 길은 다음 영화로 이어진다. 어찌 보면 밋밋할 정도인 <하류인생>은 균질적이고 비가역적인 근대적 시간을 15년치만 뚝 잘라낸 영화다. 진짜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시간 자체로 보일 정도다. 임권택은 시간 위에서 인간을 묶어둘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너무 잘 아는 걸까? 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원상태를 회복하려는 바람은 그것이 판타지라 해도 시간을 견뎌내는 동력과 같다. 이데올로기적인 허구라 해도, 가족이나 민족 같은 상상적 공동체는 근대의 시간을 살게 하는 힘인 것이다. <하류인생>조차 그 이면에는 여전히 우리가 거처할 집은 어디인지, 제대로 아버지-되기는 가능할지, 의붓남매는 온전한 가족을 이룰 수 있을지 질문하는 임권택의 시선이 있다. 아직 분단 한국이 해결하지 못한 근대의 숙제에 이토록 매달리는 작가는 이 노장밖에 없다.

홍상수의 시간 - 끊임없이 자리이탈하는 아들

물론 근대의 숙제에 무관심하다 해도 대부분 영화는 어쨌든 근대적 시간 패러다임에 속한다. 즉, 과거-현재-미래의 일목요연한 재현법칙을 따른다. 여기서 유일한 예외가 홍상수다. 시간에 앞서 공간부터 보자. 가령 <하류인생>의 명동은 그 자체로 캐릭터지만, <여자는…>의 부천은 춘천이나 경주여도 무관한 떠도는 지명일 뿐이다. 의미 부여되지 않고, 고정되지 않으며, 어디나 엇비슷한 도시는 익명의 길과 같다. 그 안의 식당·술집, 정류소·탈것들, 길·공터 등도 모두 길의 변주다. 도처에서 왕래되고 교차하며 뻗어간다. 여관·호텔조차 ‘길 위의 집’일 뿐이다. 인물들은 이 무차별적이고 상투적인 공간들을 그저 떠돈다. 의미의 닻을 내릴 어떠한 허구적 관습적 종착지도 없는 길가기를 행할 뿐이다. 상상적 공동체의 거처인 유토피아가 뿌리내릴 과거 혹은 미래는 없다. 오직 현재의 끊임없는 자리이탈, 즉 아토피아(a-: 벗어난, topia: 장소)의 운동만이 가능하다. 일관된 방향없이 공전하는 이러한 시간을 편의상 탈근대적 시간이라 해두자.

그 시간을 선입관 없이 관찰하기 위해 카메라는 철저히 거리를 유지한다. 보이는 건 표면뿐이다. 그런데 표면을 보다보면 우리의 삶이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우리가 주인이 아닌 어떤 우발적인 요소들로 훨씬 많이 채워져 있음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생활의 발견>에서, “내 안의 당신, 당신 안의 나”와 “당신 속의 나! 내 속의 당신!”이라는 메모의 원본 및 저작권자는 사실 없는 것이다. 그것은 유사한 언어구조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를 떠다니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기표일 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순수하면서 유치하며, 독창적일 때도 상투적이다. 자기만의 속내를 드러내는 순간 자기를 잃는다. 인간이 주체적으로 말한다기보다 언어가 인간을 통해 말하는 것처럼. 홍상수가 말하는 ‘모방’은 사실 인간들 사이로 기호와 사건, 습관과 욕망이 ‘전염’되는 과정이다. 그는 오직 그의 ! 가시범위에 있는 이 헐벗은 주체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 주체가 세상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자 껴입는 의미들은 인간의 본질을 가릴 뿐이다. 임권택이 체제/반체제, 진보/보수 사이를 파고든다면, 홍상수는 그런 이분법 자체가 이미 수상쩍은 이데올로기요 부정해야 할 믿음의 틀이라 여긴다.

그랬을 때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가? 놀랍게도 현재는 늘 과거와 뒤섞인다. 명숙과 선영이 비슷한 메모를 남길 때처럼, 경수에게 과거는 끝없이 다시 씌어진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근대적 시간은 공간적으로도(<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강원도의 힘>), 기억 속에서도(<오! 수정>) 다시 씌어진다. 다시 쓰기는 곧 지우고 쓰기인데, 지운 자리엔 과거의 흔적이 남는다. 한데 <여자는…>의 헌준은 첫눈을 밟듯 선화를 깨끗한 백지로 만들어 최초로 쓰고 싶어한다. 처음 쓰기는 서명처럼 소유의 환상을 주니까. 그 인간적인 환상이 순결 이데올로기다. 하지만 선화를 다시 쓰는 헌준도 문호도 기존의 흔적을 지우진 못하며, 그 흔적을 좇아 선화를 찾아간다. 게다가 태연하게 강간을 고백하는 선화는 애당초 처녀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선화는 과거-현재-미래로 근대적 시간을 따라 성숙해가는 긍정적인 여성이라기보다 이미 더렵혀진 백지이며, 계속해서 다시 씌어지는 탈근대적 시간 자체다. 그 위에서 의미는 고정될 수 없고 욕망은 충족될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한 여자는 결코 도래하지 않는 미래, 홍상수 말대로 무(nothing)일지 모른다. 그러니 ‘시간의 뫼비우스’나 ‘낯술의 나쁜 꿈’(정성일)으로 굳이 짜 맞추지 않아도 <여자는…>은 애당초 선형적 시간과 무관하지 않을까? 과거-현재-미래가 원형으로 순환해서가 아니라 무정형으로 공존하고 공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딜 가나 이미 와본 듯한 길가기는 기시감과 기억과 꿈까지 뒤섞이는 방향성 없는 시간과 같다. 내러티브가 샛길로 빠지는 것도 홍상수에게 늘 그렇듯 문호의 길가기가 귀가를 지연시키며 탈중심적으로 지속되기 때문이다.

탈근대적 시간은 이처럼 가출 중이다. 그것이 돌아갈 집은 아버지-되기가 강요되는 근대적 시공간일지 모른다. 상습적인 오이디푸스 도식이 욕망을 가족삼각형에 붙들어매는 곳. 김기덕보다 더 아버지에 무심한 홍상수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앉는다. 집 바깥에서도, 선배의 여자를 늘 후배가 차지하는 삼각형은 또 다른 삼각형으로 이어지며 와해된다. 이런 욕망의 운동은 물론 최종적인 충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 길가기는 매순간 씌어지는 작은 흔적들로 충만하다. 홍상수는 그것들이 주체를 해체 재구성하는 탈근대적 시간으로부터 비롯됨을 보여준다. 거기선 감독 자신도 몰랐을 숨은 그림들이 관객 나름의 발견을 기다린다. 이야말로 전에 없던 한국영화 보기의 경지였고, 임권택을 단번에 넘어서는 포스트모던시네마의 드물게 긍정적인 지평이었다.

90년대의 클리셰에 안주하는 홍상수

그러나 <여자는…>은 나무 대신 숲의 매너리즘을 노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양식화되고 빈약해진 디테일 탓인지 영화는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로 전락했고, 페미니즘 운운하게 한 빌미도 거기 있다. 홍상수의 장점은 죽고, 피상적인 단점은 더없이 도드라진 거다. 무엇보다 이젠 그만 봐도 될만한 자조적 지식인이 10년 가까이 불가지론과 부정의 철학을 변함없는 안주삼아 술주정을 읊어댄다. 거기서부터 흔히 홍상수 하면 얘기되는 모든 것들- 지리멸렬한 일상, 비루한 욕망, 퇴행적 나르시시즘, 냉소와 위악, 삶의 부조리 등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이 환멸의 테마들은 80년대를 부정한 90년대의 클리셰 아닌가? 부정을 얘기할 때마다 홍상수는 여전히 90년대, 또한 80년대에 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 때 탈근대적 시간은 근대적 시간과 대면하지 않으려는 도피의 시간처럼 보인다. 철저히 사적 영역만을 배회하며 시간관념 모호한 행위들을 반복하는 거다. 그것은 시간의 진정한 가능성을 열지 못하고 상투화된 포스트모던의 명제로 환원돼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홍상수가 역사와 사회도 담아주길 바라곤 한다! 하지만 큰 이야기가 능사라면 90년대의 시대성을 집약하며 홍상수가 등장할 필요도 없었을 테다. 그땐 분명히 근대화의 반성과 함께 근대적 시간이 한계를 노출하던 때였다. 그럼 제3의 시간이라도 필요한 걸까?

김소영은 임권택을 일컬어 “아버지가 되지 못하게 하는 역사에 볼모잡히고 그것을 앓아냄으로써 영화의 아버지가 된다”고 했다(<씨네21> 450호). 이 아버지의 시간을 아들뻘인 홍상수는 기어코 모른 척하며 전혀 다른 시간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관객은 둘 모두의 시간을 혼란 없이 경험할 수 있다. 관객은 임권택과 홍상수를, 두 개의 시간을 가로지른다. 사실 사회적인 시간과 개별적인 시간, 선형적인 시간과 비선형적인 시간은 모순이 아니다. 또한 전자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선 허구적인 정체성이나마 필요하며, 그것이 억압적일 땐 후자의 시간으로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근대적 시간/탈근대적 시간이란 이름도 실은 환원적인 도식이자 관념에 불과할 테다. 안타까운 건 해방 후 한국사가 여태 전자만을 강요해왔단 점. 그래서 임권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할 때 거기엔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시간이 있지만, 그 아버지가 이제는 넘어서야할 존재인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홍상수는 분명 대안적인 시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임권택보다 홍상수를 지지해도, <하류인생>보다 <여자는…>을 지지하긴 어려운 지점이 있다.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아무래도 홍상수는 80년대의 부정으로서의 90년대로부터 먼저 벗어나야할 것만 같다. 그럴 때 소위 탈근대적 시간도 근대적 시간의 부정이 아니라, 시간 자체의 충만한 가능성으로 해방되지 않을까? 그건 영화적 시간의 가능성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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