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종려상 다르덴 형제의 <아이>… 허우샤오시엔, 홍상수 등은 수상실패
58회 칸영화제는 정치적인 구호의 깃발이 나부끼는 대신 거장들의 입성으로 술렁였다. 현존하는 영화 작가들 중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한 이들이 이곳 칸으로 몰려든 것이다. 그중에서도 황금종려상을 쥐고 돌아간 이는 벨기에 출신의 형제 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이다. 그러나 거장들의 집결이 영화제 자체를 평가하는 데 있어 오히려 우려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영화제 본연의 가치인 발견의 눈을 버리고 단지 존립을 위한 안정을 꾀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칸이 해결해나가야 할 중요한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한편, 한국영화는 7작품이라는 사상 초유의 입성을 기록했고, 제각기 호평을 얻었다. <씨네21>은 지난해 칸 결산기사에서 영미 3대 산업지에 ‘영화제에 대한 평가’를 제의한 것에 이어, 올해는 프랑스 양대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와 <포지티프>에 ‘한국영화에 관한 평’을 제의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 장 미셸 프로동은 홍상수 감독의 신작 <극장전>에 대한 유려한 감상평을 써주었고, <포지티프>의 편집위원 위베르 니오그레는 전반적인 총평을 해주었다. 58회 칸영화제는 끝났지만, 여기 등장한 영화들의 항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어디선가 다시 마주하길 기다리면서 칸에 대한 결산기사를 싣는다.
수상작 목록
황금종려상 <아이> |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벨기에) 심사위원 대상 <망가진 꽃들> | 짐 자무시(미국) 감독상 <히든> | 미카엘 하네케(프랑스) 남우주연상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의 세번의 장례식> | 토미 리 존스(미국) 여우주연상 <프리존> | 안나 하슬로(이스라엘) 각본상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의 세번의 장례식 | 기예르모 아리아가(멕시코) 심사위원상 <상하이 드림즈> | 왕샤오솨이(중국) 황금카메라상 <버려진 땅> | 비묵티 자야순다라(스리랑카) | <미 앤 유 앤 에브리원> | 미란다 줄라이(미국)
굳이 비밀이랄 것도 없는 공공연한 절차 하나가 칸의 영광을 예고한다. 행여 수상자들이 불참하여 체통없이 허공에다 상패를 수여하는 불상사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영화제쪽이 폐막식 몇 시간 전 각 부문 주요 수상자들에게 ‘시상식에 꼭 참여하라’는 전화통보를 하는 관례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전화를 받는 감독은 그날 무엇이 됐건 상을 하나쯤은 탄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 그날의 주요부문 수상자는 레드 카펫을 밟고 들어서는 그들의 주사위 배열 안에서 주로 판명난다는 것이다. 지난 5월21일 저녁 7시30분, 영화제 마지막 행사로 거행되는 폐막 입장식. <상하이 드림즈>의 왕샤오솨이, <킬로미터 제로>의 히네르 살림, <프리존>의 아모스 기타이,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의 세번의 장례식>의 토미 리 존스, <씬 시티>의 로버트 로드리게즈와 프랭크 밀러가 들어선다. 여기까지는 거의 낙망이다. 이들의 영화가 감독상이나, 심사위원 대상, 황금종려상감은 아니다. <히든>의 미카엘 하네케, <망가진 꽃들>의 짐 자무시, <아이>의 다르덴 형제의 입장을 보면서 그래도 피날레가 제대로 되려면 이 세 감독의 영화가 주요부문을 나눠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58회 칸영화제의 마지막을 장식한 주인공들은 과연 그들이다. 아쉽게도 홍상수가 보이질 않았다.
화제작 <아이> <망가진 꽃들> <히든> 주요부문 수상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왕샤오솨이는 “중국 날짜로 오늘은 내 생일”이라면서 생일날 상받은 감독답게 상기된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여우주연상은 <프리존>의 두 여주인공 중 한명인(내털리 포트먼이 아니라) 안나 라슬로가 가져갔다. 이스라엘 출신의 그녀는 코미디언인 자신을 용감하게 주연으로 기용해준 감독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한편 레드 카펫을 오르는 토미 리 존스를 보며 그가 무슨 상을 탈 것인가 궁금해했는데, 심사위원단은 이 영화의 각본가 기예르모 아리아가에게 먼저 각본상을 수상했다. 여기서 그치는가 했더니, 감독상을 지나 남우주연상을 발표하는 순간 토미 리 존스의 이름이 다시 불린다. 1994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도망자>로 남우조연상을 탄 것 외에는 뚜렷한 상복이 없던 토미 리 존스가 자신이 연출하고 출연한 영화를 들고온 칸에서 남우주연상을 탄 것이다. 그러나 토미 리 존스는 영광에 겨워 즐거워하는 배우의 표정이 아니라, 근엄하고도 뭔가 부족하다는 듯한 감독의 표정으로 무대에 오른다. 그 표정이 말하던 것. 필시 그가 받고 싶어했던 것은 남우주연상이 아니라 적어도 감독상이었을 것이다.
충격요법으로 영화제를 강타한 감독상 수상자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 돌풍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렇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감독상을 받으러 올라온 미카엘 하네케는 영화의 스타일과는 대조적으로 점잖고 온화한 짧은 공식 멘트만 남기고 내려갔다. 그보다는 심사위원 대상으로 무대에 오른 짐 자무시의 수상소감이 걸작이었다. “빌 머레이가 없었으면 이 시나리오는 없었을 것이다. (내게 상을 준) 이상한 심사위원들에게도 감사한다”면서 입을 뗀 뒤, 존경의 뜻으로 경쟁에 함께 오른 동료 감독들의 몇몇 이름을 호명했다. 그중 허우샤오시엔을 부를 때는 특히 ‘미스터’를 붙이며 “나는 당신에게 배울 것이 너무 많다”(직역하면 나는 당신의 영화 학생입니다라고 말했다)면서 더욱 존경의 뜻을 보였다. 그러나 허우샤오시엔은 아무 상도 받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진심을 따라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 중 하나로 인정해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짐 자무시는 내려갔다. <씬 시티>의 로버트 로드리게즈가 그 상을 가져갈 일은 없으므로 이제 황금종려상을 받을 만한 감독은 다르덴 형제밖에 없다. 58회 칸 황금종려상은 <아이>를 만든 다르덴 형제에게 돌아갔고, 그들은 1999년 <로제타>로 같은 상을 받은 것을 포함하여 몇 안 되는 황금종려상 2회 수상자가 됐다. 인간 구제의 성찰자들답게 이라크 무장단체에 납치된 “플로랑스 오브나와 후세인 하눈 알 사디에게 이 상을 바친다”고 그들은 수상소감을 밝혔다.
아마도 <아이>에 뒤이어 <망가진 꽃들>과 <히든>이 수상한 것은 영화제 내내 이어진 언론과 관객의 호의적 평가 및 반응을 크게 참조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망가진 꽃들>의 인기는 엄청났다(가령 <씨네 21> 취재팀만 해도 <망가진 꽃들>을 보기 위해 이틀 동안 세번의 시사회를 쫓아 뛰어다녔고, 시간표를 이잡듯이 뒤진 끝에 겨우 원고 마감 직전 칸 외곽에서 열리는 일반 관객 상대의 상영회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영화를 끝내 못 보고 돌아온 기자들이 꽤 있을 것이다). 그리고 <히든>은 평론가들의 화제작이었다. 특히 영미권 매체들은 2003년 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브라운 버니>와 <히든>을 비교하기를 즐겨 했다. 비경쟁에 초대된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가 그 자체로 대중적 호응을 일으킨 것이라면, <히든>은 현지 언론과 평단을 상대로 같은 수준의 호응을 끌어낸 영화였다. <망가진 꽃들>과 <히든>이 수상작 안에 포함된 것에는 역시 이런 이유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다음날 열린 심사위원 기자회견에서 심사위원장 에미르 쿠스투리차는 “이견은 있었지만 차이를 최소화한 것이다. 대중적이고 미학적인 영화들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요부문 세편에 대한 선정 기준을 밝혔다. 덧붙여 심사 중 고충과 고민의 노력을 백분 토로하기 위해 “크로넨버그의 영화와 빔 벤더스의 영화는 극장에 다시 가서 두번씩 봤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오브나스 기자에게 황금종려상을 바친 다르덴 형제
“당신들의 <아이>가 내 아이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아이>는 다르덴 영화 중 최고일 것이다. 이 영화는 불안한 경제와 찬란하지 않은 유럽의 한구석, 자유주의의의 정글 속에서 아무 가진 것 없는 자들을 보여주는 현대의 진정한 영웅주의이다. 연출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정확하다. 더구나 우리는 다르덴 형제가 오브나스 기자의 이름을 언급하는 데에 큰 감동을 받았다.” <리베라시옹>은 5월23일치 칸 관련 기사에서 다르덴 형제가 황금종려상 수상 직후 “이 상을 이라크에 납치된 오브나스 기자와 통역자 후세인 하눈 알 사디에게 바칩니다”라고 말한 것에 이런 격찬의 논조로 화답했다. 그럴 만도 하다. 플로랑스 오브나스 기자는 지난 1월5일 이라크 무장단체에 납치된 <리베라시옹>의 기자다. 올해 칸영화제는 주상영관 팔레 드 페스티벌에 그녀의 얼굴이 담긴 현수막을 걸고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안에는 감동적인 일화가 더 있었다. 오브나스 기자의 어머니는 브뤼셀 왕립 시네마테크를 드나드는 시네필이었고, 다르덴 형제와는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 <약속>(1996)이 나왔을 때 딸인 오브나스가 다르덴 형제를 취재할 생각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본 적도 있다고 한다. 그때까지 그들은 국제적인 스타 감독도 아니었다. 오브나스와 다르덴 형제의 보이지 않는 인연은 오래전부터였던 것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다르덴 형제는 그들이 이번에 어떤 상을 타든지 그것을 꼭 오브나스 기자에게 헌정하기로 이미 합의했다고 한다. 시상식장에서의 찰나적인 폼이 결코 아니었던 셈이다. 한편 딸에게 황금종려상을 헌정한 다르덴 형제에게 오브나스 기자의 어머니는 <리베라시옹> 지면을 통해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거기에는 “당신들의 <아이>가 내 아이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마음을 열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한없이 슬프지만 올해 칸영화제가 연출해낸 장면 중 이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은 없다. 오브나스가 그의 어머니 품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