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영화광의 수첩
2001-07-26

인용과 모방을 통해 현실의 구조를 보여주는 <브랜단 앤 트루디>

영화를 보고나서 <브랜단 앤 트루디>에 등장하는 도둑 커플의 낭만적인(?) 로맨스나 그들의 리버럴한 삶의 방식에 매혹되는 이도 있겠으나 이러한 소재는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1997)이나 <제너럴>(1998)과 같은 영국감독들의 영화들에 묘사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고 로디 도일(소설가·<브랜단 앤 트루디>의 각본가이자 공동프로듀서)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다른 영화들- 특히 스티븐 프리어즈가 만든 <스내퍼>(1993), <>(1996), 그리고 앨런 파커의 <커미트먼트>(1991)- 이 보여주는 아일랜드 노동계급의 삶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깃들여 있는 것도 아니다.

극중 두 주인공의 입을 통해 아일랜드 노동계급의 삶에 대한 몇몇 짤막한 언급이 제시되기는 하지만 이것이 영화의 주제적 층위에 영향을 끼칠 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독이 조금쯤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주인공 브랜단과 그 주변의 동료들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을 통해 겉보기에 안온하고 평화스러워 보이는 중산층의 도덕적 허위의식을 슬쩍 들춰보이는 것이다. `더블린 사람들`의 삶의 양식을 통해 도덕적 주제들을 고찰해보려 한 제임스 조이스만큼의 야심을 가지고 만든 영화는 아니라 해도 <브랜단 앤 트루디>에 현대사회의 가치붕괴에 대한 조소가 유쾌하고 풍자적으로 표현돼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영화적 인용, 혹은 각색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브랜단 앤 트루디>가 유발하는 웃음 가운데 상당 부분이 이 영화가 ‘인용’하고 있는 많은 고전영화들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혹은 몇줄이나마 장식한 영화들을 인용한다는 것은 감독에게 어떤 의미일까? 무엇보다 관객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러한 영화적 인용은 때로 단지 베껴먹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원전에 경의를 바친다는 뜻의 ‘오마주’라는 그럴싸한 표현을 통해 옹호되기도 한다. 물론 속칭 `패러디영화`라 불리는 영화들에서처럼 원전의 권위를 마구 깔아뭉개며 조롱하고 말아먹는 방식의 영화적 인용도 있을 수 있다. 어떠한 영화적 인용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가와는 무관하게 정작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영화적 인용이란 것이 진정 ‘인용’이라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물음이다.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영화 <집시의 시간>(1989), <언더그라운드>(1995) 등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집시의 시간>에 등장하는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 성 조지 축제일에 강에서 벌어지는 집시들의 축제, 공중에 뜬 채 해산하는 임산부의 모습, 하늘을 나는 하얀 칠면조- 은 명백히 러시아의 영화작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료프>(1965), <거울>(1975) 혹은 <희생>(1986)에 대한 언급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들이다. 또 <언더그라운드>에서 물 속을 떠돌던 새신랑이 죽은 아내의 환영과 만나는 인상적인 장면은 장 비고의 영화 <라탈랑트>(1934)의 유명한 장면을 차용해온 것이다. 그러나 쿠스투리차의 영화 속에서 이와 같은 장면들은 원전과의 관계에 대한 지식없이도 충분히 향유할 만한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감독은 원전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밝히는 일은 피하고 있다.

즉 이러한 영화적 인용은 문학에 빗대자면 따옴표가 빠진 직접인용이거나 원전에 대한 기술이 빠진 간접인용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독의 이러한 전략을 후안무치한 행위로 매도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영화적 인용의 방식은 이른바 `예술영화` 혹은 `작가영화`의 한 컨벤션으로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이건 인용이라기보다 각색에 가깝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구로사와의 <>(1985)의 관계, 혹은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대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의 관계처럼.

왜 진정한 비극이 불가능한가?

영화와 무관하게 웬 서론이 이렇게 기냐고 반문할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브랜단 앤 트루디>에 나타난 영화적 인용이 다른 영화들의 그것과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이제부터는 <브랜단 앤 트루디>가 취하는 영화적 인용의 방식에 대해 차근차근 살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감독 키에론 J. 월시와 각본가 로디 도일의 관심은 그들이 모범으로 삼은 듯한 고다르의 영화적 인용방식을 빌려 대중영화의 유희전략을 세우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브랜단 앤 트루디>는 빌리 와일더가 만든 <선셋 대로>(1950)의 음울한 결말을 어떻게든 다시 바꾸어보려는 시도가 결국 좌절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의 표현- 브랜단과 트루디는 결국 결혼에 이르지만 곧 이혼하고 또다시 결합하여 많은 아이들을 낳는다. 이 아이들의 미래의 모습을 제시하는 자막과 극중 등장인물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엔딩 크레디트 시퀀스는 결국 해피엔딩에 대한 비웃음이다. 우리는 매우 즐겁게 웃을 수도 있지만 이 웃음은 결국 돌아와 우리 자신에게 향하는 냉소이기도 하다- 임과 동시에 고다르와 <네 멋대로 해라>(1959)에 대한 찬가이다.

사자(死者)의 내레이션을 통한 <선셋 대로>의 구성을 차용하면서 <브랜단 앤 트루디>는 <선셋 대로>의 사자의 내레이션 자체를 흡사 따옴표를 치듯 고스란히 인용한다. 그리고 그러한 내레이션과 구성이 지니고 있던 운명론적 결말을 거부한다 해도 왜 결국 인물들이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는가를 문제삼는다. 이것은 역시 <선셋 대로>의 사자의 내레이션을 끌어온 영화인 마틴 스코시즈의 <카지노>(1996)가 보여주는 태도와 유사한 것이다. 너무 지나친 비약이 아니냐고? 나는 앞서 감독 월시의 관심은 대중영화의 유희전략을 세우는 데 있다고 말했다. <브랜단 앤 트루디>가 분명 인용과 그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른바 ‘작가영화’의 사뭇 엄숙한 태도 대신에 <네 멋대로 해라>, <여자는 여자다>(1961), <미치광이 피에로>(1965)의 유희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초기의 고다르에게 영화적 형식은 전복의 대상임과 동시에 유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브랜단 앤 트루디>에서 관심의 방향은 영화적 형식에 쏠려 있지 않다. 험프리 보가트를 흉내내며 하워드 혹스, 빈센트 미넬리, 그리고 프리츠 랑의 영화공간을 유영하는 인물들을 통해 영화적으로 유희하고자 했던 (영화작가로서가 아닌) 영화광으로서의 고다르의 태도를 다시 대중영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브랜단은 장 폴 벨몽도와 존 웨인, 그리고 윌리엄 홀든 등을 흉내내며 고다르와 존 포드의 영화공간을 유영하는 인물이다.

<브랜단 앤 트루디>가 다른 영화들을 인용하는 여타의 영화들, 가령 쿠엔틴 타란티노나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영화들과 조금 다른 지점이 있다면 인용되는 영화들이 하나의 공통된 정서를 환기시키기 위해 적절히 선택되어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그냥 웃고 즐기기 위한 소재로서 영화사의 창고를 뒤지는 일은 하지 않는다. 옛 영화의 인물들을 따라 행동해보지만 왜 우리에게는 그들과 같은 진정한 비극이 불가능한 것일까, 하는 물음이 <브랜단 앤 트루디>의 바탕에 깔려 있다. 트루디와 헤어진 뒤 윌리엄 홀든의 죽음을 흉내내보던 브랜단의 행위- 아마 그는 진정 그 순간 죽음의 체험에 이르기를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이 행위조차 트루디의 관심을 끌기 위해 참가했던 시위에서 보여준 태도처럼 순전한 허위일 수도 있다- 는 ‘이건 또 뭔 영화냐’는 트루디의 한마디로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으며 낭만적인 도주자 커플의 삶은 도둑질이라는 트루디의 목적에 부합되는 한에서만 존속될 수 있는 것이다. 브랜단과 트루디는 <미치광이 피에로>의 커플과 같을 수 없지만 <하나뿐인 삶>(프리츠 랑·1937)의 커플로부터는 더더욱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서부영화들,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69), 특히 존 포드의 <수색자들>(1956)이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의 인용은 비슷한 맥락에서 읽힌다. 이 두 영화에서 ‘영예로운(?)’ 일을 행한 주인공(존 웨인)은 결국 쓸쓸히 가정을 등지고 황야를 떠돌거나(<브랜단 앤 트루디>에 인용된 <수색자들>의 마지막 장면) 자신의 공을 남에게 넘긴 채 새 집을 불태우고 홀로 외롭게 죽어간다(<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브랜단은 자신이 존 웨인과 같은 낭만적 영웅의 위치에 서볼 수 있기를 기대하지만 그가 머무르는 곳은 제임스 스튜어트의 자리일 뿐이다. 자신의 삶이 비극이 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비극(이러한 인식에서 <브랜단 앤 트루디>는 우디 앨런의 초기 영화들 즉 <당신이 섹스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모든 것>(1972), <슬리퍼>(1973), <사랑과 죽음>(1975) 등과 닮아 있다). 영화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생활이 곧 비극이라는 것이다.

영화광의 수첩 속에 담긴 것

앞에서 언급한 영화들 이외에도 많은 영화들이 <브랜단 앤 트루디>에 인용되어 있지만 이를 모두 열거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영화를 이미 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브랜단 앤 트루디>는 인용된 영화들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관객이라 할지라도 보고 즐기고 정서를 느끼는 데에 전혀 어려움이 없게끔 만들어져 있다. ‘따옴표를 찍듯’ 원전을 꼼꼼히 밝히는 인용과 원전에 대한 모방을 통해 결국 삶의 비극성을 웃음과 함께 체험하게끔 하는 이 영화는 흡사 자랑하듯 자신이 본 영화의 목록을 늘어놓는 수다쟁이 영화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용이라기보다는 창조적 각색을 지향하는 작가영화나 예술영화의 인용방식에 기대어 야심을 드러내는 영화도 아니다. <브랜단 앤 트루디>는 온전히 영화광의 애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면서 수줍게 펼쳐진 꼬깃꼬깃한 메모용 수첩 같은 영화다. 영화에 바친 자신의 애정이 적힌 빛바랜 수첩. 하지만 이 수첩에 적힌 영화 이미지들에 대한 기억이 우리에게 드러내보이는 것은 결국 현실의 구조이다. 남루하고 평범하고 지루하고 속되더라도 결국은 감내해야 할 삶. 성취되지 못할 비극을 꿈꾸는 자들에게 웃음과 함께 삶을 되돌려주고자 하는 이 영화의 시도가 다소 안이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영화 이미지들을 통해 경험한 남들의 비극에만 공감할 뿐 현실의 구조를 바라보는 데는 둔감한 (나 자신을 포함한) 많은 영화광들에게 따끔한 경종을 울리기에는 충분한 영화가 아닐까. 혹 이 영화가 영화광에 의해 구상되었음에도 영화광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는 점에 실망할 골수들- “별 대단치도 않은 영화적 지식을 가지고 떠들어대는군”이라고 말하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일 수도 있겠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