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랑이와 많이 닮았다.” 박신혜가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에서 주인공 ‘이랑’을 맡아 목소리 연기를 하던 중 한혜진 감독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단순히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달리기에 지기 싫어 일부러 넘어져서 스스로 생각하는 자존심을 지키고, 자신보다 훨씬 어른 같은 친구 ‘수민’에게 동경과 질투심을 가지고, 우연히 만난 ‘철수’에게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을 가지는 등 사춘기를 겪는 ‘이랑’의 모습에서 이제 막 스무살을 통과한 배우 박신혜를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다. <소중한 날의 꿈>의 목소리 출연이라는 또 하나의 숙제를 막 끝낸 박신혜를 만나 이런저런 수다를 나눴다.
-응원하는 기아 타이거즈가 2위(6월6일 기준)에 올랐다. =LG와 공동 2위다. 선두 SK와 한 게임밖에 차이가 안 난다. 어디 팬인가. 롯데 팬? 롯데만 4위에 오르면 ‘엘롯기’(LG, 롯데, 기아를 지칭하는 말)네. 롯데와 기아 함께 잘했으면 좋겠다. (웃음)
-요즘은 드라마 <넌 내게 반했어>를 촬영하느라 야구 경기를 못 보겠다. =최근 지인들에게 목동 구장에서 야구를 보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드라마 촬영하러 인천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마침 목동 구장 옆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저걸 보러 가야 하는데’ 하며 어찌나 아쉬워했던지.
-<소중한 날의 꿈>의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이랑’은 어떤 친구였나. =극중 이랑이가 하는 고민이 실제 내가 하고 있는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친구가 더 멋져 보이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학창 시절에는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등 이런 고민들은 성장 과정에서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다 하는 고민이잖나. 그래서 시나리오를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이랑이의 성격도 너무 귀여웠고.
-목소리 출연은 처음인데 보통 하던 연기와 어떻게 다르던가. =처음에는 목소리로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어색했다. 잘할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했고. <천년여우 여우비><빨간모자의 진실2> 등 여러 국내 애니메이션도 참고삼아 봤는데, <천년여우 여우비>의 (류)덕환 오빠가 너무 잘하더라. 목소리 연기는 평소 연기하는 느낌, 톤보다 훨씬 더 밝아야 하고, 내 표정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이랑이의 표정에 맞추는 거라 어려웠다.
-하다보니 이랑이 얼굴과 닮아가는 것 같다고 했다. =아무래도 더빙을 하다보면 이랑이의 행동, 제스처를 따라하게 된다. 극중 친구인 수민이와 빵집에서 만나 대화하는 장면에서 “아하!” 하며 맞장구치는 장면은 나도 모르게 따라하게 되더라. 그러다보니 이랑이의 행동 패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이 행동이 나오겠지 싶을 때 정말 그런 액션이 나오더라.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또 다른 숙제였을 것 같다. =나의 틀을 넓히는 시험대였다. 처음에는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관객 사이에서 이런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좋은 애니메이션에는 전문 성우를 써야지 배우를 써서 작품을 망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부담감이 제법 컸다. 그런데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때 호평을 받고 난 뒤 ‘어 그래? 괜찮은가보네?’라며 자신감을 좀 얻었다. 일단 30점은 받고 가는 기분?
-30점? 점수를 좀더 줘도 될 텐데. =오늘 열리는 기자시사회 반응에 따라 50점이 될 수도, 70점을 받을 수도 있겠다.
-스무살이던 지난해에 출연한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과 드라마 <미남이시네요>는 배우 박신혜에게 터닝 포인트였을 것 같다. =<미남이시네요>를 하면서 배우로서 자신감을 얻었다. 그 전작인 드라마 <깍두기>(2007)는 선생님들 울타리 안에서 배우면서 연기를 했다면 <미남이시네요>는 내가 중심이 돼 끌고 가야 하는 역할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주연을 맡은 적이 있지만 당시 어린 나에게는 너무 큰 짐들이라 다른 옷을 입은 것 같았다. 또 드라마 <천국의 계단>(2003), <비천무>(2004) 등 아역 시절에 연기한 캐릭터도 비장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역할이었다. 반면 <미남이시네요>의 고미남은 내 또래라 내 감정, 내 느낌을 그대로 연기했다. 덕분에 아역에서 성인 연기로 자연스럽게 전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미남이시네요> 이후 스스로가 더 돋보일 수 있는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왔을 텐데, 선택한 작품은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민영’이다. =주위에서도 다들 궁금해했다. <미남이시네요>에서 상종가를 쳤는데 드라마를 한편 더 하거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야 하는데 왜 조연을 선택했냐고 그러더라. 내 생각은 달랐다. <미남이시네요>의 고미남이 센 캐릭터니까 다음 작품에서는 내가 주연을 뒷받침해줘서 뒤에서 빛을 볼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게 <시라노; 연애조작단>이었다.
-예전 <씨네21>과 인터뷰에서 “어떤 배우가 돼야 할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지도 제가 애써 찾아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좋은 영화와 책을 많이 보는 것도 배우로서 중요하지만 내 몸으로 직접 부딪히지 않는 이상 어떤 느낌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가령, 수영을 잘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하자. 헤엄칠 때 발은 어떻게 차야 하고, 물속에서 몸은 어떻게 돌려야 하는지 등은 직접 하지 않는 이상 알기 어려운 동작들이다. 연기라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아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거잖나. 하는 사람이 어색하면 보는 사람도 어색하다.
-이런 태도는 어릴 때 소속사였던 드림팩토리의 방침이기도 했다고. =당시 ‘공장장’님(소속사 사장이었던 가수 이승환)께서 촬영 없는 날에는 혼자 다녀라, 연습실과 학교 갈 때는 지하철을 타라, 시험기간에는 밤을 새우든 학교에서 자라, 혼자 보고 혼자 느껴라, 라고 말씀하셔서 그렇게 생활했다. 남들은 연예인인데 그게 가능하냐고 묻는데 내겐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나도 사람이니까. 덕분에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방 안에 갇혀 있는 건 싫다. 스포츠도, 야구도, 뭘 배우는 것도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고.
-야구는 언제부터 좋아했나. =초등학생 때 부모님과 광주 무등경기장을 다녔다. 어릴 때라 큰 감흥은 없었는데 대학생이 되면서 야구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궁금하다. =이종범 선수.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뛰던 이종범 선수의 국내 복귀 첫 게임을 직접 가서 봤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시간 날 때마다 경기장을 찾았는데 이종범 선수가 늘 한건씩 해주었다. 역시 ‘종범신’이다.
-곧 촬영에 들어갈 박희곤 감독의 <퍼펙트 게임>은 야구 선수 최동원과 선동열의 전설적인 대결을 다룬 이야기다. =<해운대>에서 이대호 선수가 깜짝 출연한 것처럼 <퍼펙트 게임>에서 선동열 선수를 열렬히 응원하는 여성 야구팬으로 카메오 출연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웃음)
-요즘에는 뭘 배우고 있나. =라이딩. 올림픽대교에서 동작대교까지 빠르게 달리면 혼자만의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사람들이 안 알아보냐고? 빨리 달리니까 사람들이 몰라본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TV드라마 출연작이 많다. 스크린 속의 박신혜를 더 보고 싶다. =나 역시 영화 연기를 많이 하고 싶다. 그러나 내게 맞는 시기가 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찾아올 거라고 생각한다. 정말 하고 싶은 작품이 있었는데 그건 어떤 방법을 써도 내 작품이 안되더라. 그때 내게 맞는 작품과 때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스물한살인데 그런 것들을 의식하면 나를 괴롭히는 일밖에 안된다.
-현재 표민수 PD의 신작 드라마 <넌 내게 반했어>(6월29일 MBC 방영)를 촬영하느라 바쁘다고. =표민수 감독님과는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표민수 감독님의 전작과 비슷한 면도 있는데 좀더 만화 같은 느낌이랄까. 시나리오 초본을 받았을 때 카페에서 1시간 반 동안 한번에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려질 만큼 재미있었고 내 나이에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어떤 역할인가. =극중 맡은 역할은 ‘규원’이라는 아이인데 3대 명창의 손녀다. 어릴 때부터 서양음악은 용납할 수 없는 집안의 분위기에서 할아버지 밑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엉뚱한 친구다. 굉장히 발랄하고 단순하고. 다른 사람들이 찌르면 찌르는 대로 하루에 기분이 100가지씩 바뀌고.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고. 엉뚱하고 호기심 많은 면은 나와 닮은 것 같다.
-<소중한 날의 꿈>을 야구에 비유하면 배우 박신혜에게 어떤 작품인가.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3회가 적당하겠다. 3회 초 안타를 치고 1루에 진루해 2루로 도루할까 말까 고민하는 기아의 테이블 세터 같은 작품?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