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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 인터뷰] “내가 이 나이에 느끼는 보편적 정서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 <나홀로 휴가> 감독 조재현
이화정 사진 최성열 2016-09-22

‘감독’ 조재현을 만났다. 앞서 단편다큐멘터리 <김성수 할아버지의 어느 특별한 날>(2013)을 연출하며 감독으로서의 꿈을 밝혔던 그의 첫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나홀로 휴가>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오늘-파노라마 부문에, 올해 이탈리아 우디네극동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어 공개되었다. 영화는 중년 남성 강재(박혁권)가 십년 전 불륜 상대였던 시연(윤주)을 잊지 못하고 지켜보다가 결국 스토커가 돼버린 씁쓸한 이야기다. 조재현 감독은 강재가 ‘사랑’이라 믿고 있는 그 십년간의 시간을 교차편집과 엿보기식 촬영을 활용해 구성해낸다. 김기덕, 전수일, 전규환 감독같이 자기만의 스타일과 영화적 태도로 일관된 작업을 해오는 감독들의 페르소나였던 배우 조재현. 연출가로서 그는, 자신이 배우로 표현 해냈던 영화 속 주제, 태도, 형식을 어떤 식으로 체화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가 직접 운영하는 대학로의 수현재씨어터를 찾았다.

-‘감독 조재현’이라는 말이 의외로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영화를 연출할 생각은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나.

=연기자들은 거의 연출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난 좋은 감독이 될 거야’ 이런 마음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풀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더 컸다. 거칠고 부족하더라도 직접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해보니 잘한 것 같다. 연기할 때는 느껴보지 못한 희열을 맛봤다. 특히 배우가 연기를 잘하는 걸 지켜보는 것이 감독으로 쾌감이 크더라. 내가 연기를 잘했을 때 감독에게 이런 걸 제공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스토킹’이라는 센세이셔널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극작가 피터 셰퍼가 <에쿠우스>를 쓴 계기가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말의 눈을 찔러서 감방에 가게 된 소년의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뒷이야기는 못 듣고 상상을 해서 썼다는데 그게 오히려 작품을 발전시키는 데 다행이었다고 하더라. 나도 SBS 드라마 <피아노>(2001~2)를 같이한 오종록 PD가 자신이 읽은 소설 이야기를 해줬는데, 40대의 고독한 남자가 행복을 찾던 중 오피스텔을 얻어서 퇴근 후면 거길 가서 발을 씻고 두 시간씩 누워 있다가 집에 간다는 내용이었다. 그에게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했을까 공감이 되더라. <나홀로 휴가>의 강재가 가진 집착을 그런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봤다. 그에게는 매주 수요일 사랑하는 여자의 집에 가는 게 행복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 봤다.

-직접 시나리오도 썼다. 언제부터 이야기를 개발했나.

=사실 이야기는 4년 전에 준비돼 있었다. 그때 나는 전규환 감독의 <무게>(2012)로, 김기덕 감독은 <피에타>(2012)로 같은 해에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는데, 영화진흥위원회가 주최하는 ‘한국영화의 밤’ 파티에 갔다. 거기서 8년 만에 김기덕 감독을 만났다. 어느 순간부터 김기덕 감독 작품에 출연을 하지 않으면서 일부러는 아닌데 감독도 바쁘고 나도 나대로 바빠지면서 안 만나게 되더라. 그러다가 오해도 생겼다. 김기덕 감독의 <아리랑>(2011)을 보는데 ‘악역 전문 배우가 악역만 맡는 건 그가 악하기 때문’이라는 식의 대사를 하고, 그때 사람들이 모두 나를 겨냥해 한 말이라고 하지 않았나. 나도 기분이 좀 나쁘더라. 그러다가 거기서 딱 마주친 거다. 10여 미터 떨어져서부터 저기 보이는데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웃음) 첫마디로 내가 “<아리랑>의 그 배우가 나라면서요?” 하니까 “아니야, 통칭해서 한 거야” 그러더라. 그날 술을 마시면서 오해도 풀고 그랬다. 전규환 감독은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할 때 내 매니저였고, 우리가 그렇게 한자리에서 다시 만나니 기분이 참 묘하고 좋더라. 그때 쓰려던 영화 이야기를 했다.

-함께 작업해온 감독들과의 자리였는데, 어떤 조언이 있었나.

=‘사실은 시나리오 구상한 게 있다. 남자가 여자와 헤어진 뒤 그 여자한테 집착하는데 그 집착이 일상이 된 거다. 멀리서 집만 보고 가도 마음이 편해져서, 그게 일상이 되는 거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그 집 안에 갇혀 있다 나오는 거다’라고 했다. 이야기를 듣더니 김기덕 감독이 “그건 20분이면 끝나” 하더라. 그러면서 “거기까지는 아무나 할 수 있다. 뒤가 중요하다” 하는데 기분이 확 나쁘더라. (웃음) 전규환 감독은 정반대였다. “너무 좋다. 연출하면 제작, 스탭 지원도 해줄 테니 빨리 써라” 하더라. 그다음에 쓰는 데 첫날 6시간 동안 독수리타법으로 15신을 썼다. 둘쨋날 쓰려니 더이상 쓸 게 없더라. 남자가 장롱 안에 갇히니 끝이더라. 정말 김기덕 감독 말이 딱 맞았다. (웃음)

-장롱에 갇힌 강재 외에 강재의 친구들인 중년 남자들의 이야기는 그 보완책이 된 거였겠다.

=시나리오 쓰면서 이틀째 들어 멘붕이 오고, 그래서 고민한 게 주인공 강재의 친구를 등장시키는 거였다. 주변에 이혼한 선후배의 사연을 많이 넣었다. 영화에는 세세한 설정이 나오지 않았지만 배우들한테 너는 평택에서 골프숍 운영, 너는 별리에서 슈퍼마켓 운영, 너는 은행원 등 이런 식으로 또래 남자들의 스토리를 모두 만들어줬다. 차 타고 가다가 강재의 외도를 눈치 챈 아내가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할 거야?” 하고 묻는 장면도 아는 선배의 이야기를 살린 거다.

-강재의 친구 영찬(이준혁)은 그럼에도 공분을 살 수 있는 지점이 많다. 단란주점에서 여성을 대하는 장면이나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전처를 두고 “조강지처가 최고야”라는 발언 등은 여성 비하적인 시선으로 읽힐 수도 있다.

=모니터를 하니 확실히 그 부분에 대한 거부감이 있더라. 그런데 나는 영찬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 중 하나라고 봤다. 강재가 기억 속의 연인을 지키지 못한 채 계속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면, 영찬은 반대로 끊임없이 시도하고 실패하고 상처받는 사람이다. 현실에서도 영찬처럼 사는 남자들이 꽤 많다. 돈 좀 있어서 골프나 치러 다니고 연애도 거리낌 없이 하는 남자들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도 어떻게 해서든 살아보고 한 여자에게 정착하려는 마음이 있는데 잘 안 되는 사람으로 그리고 싶었다. 그런 남자들이 바라보는 시각을 그리고 싶었고, 그가 가진 외로움을 공감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거라고 봤다.

-중년인 강재의 쓸쓸한 시선을 떠올려봤을 때 배우로는 조재현이 적역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연출가 조재현은 박혁권이라는 배우를 캐스팅했다.

=처음엔 내가 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SBS 드라마 <펀치>(2014~15)를 하면서 박혁권을 만났는데, 이 친구 연기가 정말 좋더라. 나보다 이 친구가 하면 더 보편적인 정서를 표현할 수 있겠다 싶었다. <펀치> 촬영현장에서 준비하는 시간에, 이런 작품이 있는데 스케줄이 어떠냐고 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하더라. 내가 못 쓸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대답한 거 같더라. 자꾸 스케줄을 체크하고 시나리오도 주니 많이 당황하더라. 강재라는 극중 이름도 <펀치>에서 박혁권의 이름 조강재에서 가져온 거다. 결혼도 아직 안 한 친구이고, 결혼한 중년 남성들의 디테일한 정서 중에 이해하기 힘든 장면도 있다고 했지만, 연기할 때 보니 정말 훌륭하더라.

-배우로 현장 경험은 풍부하지만 연출가로 맞닥뜨린 현장은 또 달랐을 것 같다.

=감독으로 이야기를 담는 데에는 한참 미숙하지만 어쨌든 현장 진행에 관해서는 초보 감독보다는 나을 거다. 드라마를 200여편 찍었고, 저예산영화도 30여편 찍었으니 아무래도 현장에 대한 노하우는 있다. 확실히 연출가가 되어 보니 책임감이 더 큰 것 같다. 출연할 때는 콜타임이 7시인데 조금 빨리 와달라고 하면 왜 이렇게 배우를 일찍 부르나 싶었는데, 직접 하다 보니 새벽 3시에 눈이 떠지더라. 현장에 일찍 가서 “배우는 왜 안 오냐”고 체크하고 그랬다. 물론 이후에 배우로 출연할 때는, 다시 배우의 입장이 되긴 하더라. 그러니 사람이 참 간사한 거다. (웃음)

-사실 알게 모르게 함께 작업한 감독의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데, 소재에 비해 전개 방식은 순하다. 평범한 드라마적 요소에 코믹한 장면이나 대사도 간간이 사용된다. 결론에 이르러서도 더 세게 나아가지 않으려는 게 보인다.

=아티스트로서의 욕심보다는 내가 이 나이에 느끼는 보편적 정서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또 내가 워낙 유머가 있다 보니 찍다가 코믹한 대사가 더 들어가기도 했다. (웃음) 어떻게 보면 김기덕 감독의 작품 같은 충격을 기대했다면 내 영화가 너무 착해 보일 것 같다. 그럼에도 현장을 비롯해 작품을 만들면서 함께 작업한 감독들한테 받은 영향은 크다. 특히 김기덕 감독의 즉흥적인 판단력이 나한테는 도움이 많이 됐다. 현장에서 보면 정말 판단이 빠르고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하는 사람이다. 프레임 안에서의 정서는 전수일 감독의 스타일을 워낙 좋아한다. 좀 올드해 보여도 그런 지점들을 나 역시 담고 싶었다. 교차편집과 관련해서는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전규환 감독의 <불륜의 시대>(2011)에서 봤던 것들을 염두에 두고 썼다.

-함께 작업한 감독들의 <나홀로 휴가>에 대한 품평이 궁금하다.

=가장 먼저 김기덕, 전규환, 전수일 감독에게 영화를 보여줬다. 김기덕 감독은 중국 가는 비행기 안에서 연락이 와서 “좀 줄여” 하더라. 그 말 듣고 4분 줄였다. 전수일 감독은 좀 싫어했다. 그의 영화 스타일은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하고 영화가 어떤 답을 주는걸 싫어한다. 싫다고 하고도 본인의 작품을 해외에 출품할 때 내 작품도 함께 출품해줬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을 때도 누구보다 기뻐해줬다. 본인은 늘 힘들게 영화 찍는데, 어쩌다 한번 영화 찍은 내가 첫 작품으로 부산을 갔으니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지 않나. 진짜 친구는 친구가 잘됐을 때 기뻐해준다고 하더니 그런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전규환 감독은 배우가 과하게 연기를 보여주는 것을 싫어한다. 처음에는 배우가 영화를 찍으면 이렇게도 찍을 수 있구나 하고 좋게 보다가, 인물들의 연기가 보인다 싶었는지 싫다고 하더라. 그리고 정지영 감독님이 부산에서 보시고 ‘깜놀! 첫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는…’이라고 문자를 주셨다. 이 평가가 너무 좋아서 지금도 가끔 한번씩 찾아본다. (웃음) 관객이 많이 안 들어도 이 문자 하나로 보상받았다고 생각한다.

-영화 개봉일과 집행위원장으로 있는 DMZ국제다큐영화제(9월22~29일) 개막일이 겹쳤다. 10월엔 연극 <블랙버드>에 출연하기도 한다.

=사이사이 연극 연습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기본적으로 내가 에너지가 많다. 물론 그 많은 일 중에 집중하고 싶은 건 연기다. 그런데 작품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남는 시간들이 생긴다. 그러면 술 마시고 하는데, 그런 시간을 헛되이 쓰고 싶지 않더라. 그 에너지를 연기에 쏟아야 하는데, 내가 너무 나태하구나, 나 스스로를 학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연기 외에 남는 시간에 다른 일들을 찾게 된 거다. 새로운 도전은 싫어해서 연극은 하지만 뮤지컬은 안 한다. 강의 (조재현은 경성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 연기를 봐줄 뿐 내가 무슨 대단한 이론을 정립 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제 일도 다큐멘터리를 평소 워낙 좋아해서 여기까지 온 거다.

-DMZ국제다큐영화제는 벌써 8회가 됐다.

=건강한 영화제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정치적인 색깔이 있을까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도 많았고 환영받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나는 한곳으로 치우치지 않지만 다큐멘터리가 가진 진보적 색깔을 우리 영화제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규모가 크지 않지만 그래도 잘 지켜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 대한 계획도 궁금하다. <역린>(2014)에 이어 최근에는 <봉이 김선달>(2016) 같은 규모가 큰 상업영화 출연으로 또 다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봉이 김선달>은 절대 권력가인 ‘성대련’ 역할로 악의 축을 담당하다보니 다른 캐릭터들은 코믹 베이스의 연기를 하는데, 나 혼자 너무 정극 연기라 따로 놀까봐 걱정이 많이 됐다. 그런데 영역을 넘나들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조재현은 상업영화는 안 하는 배우’로 소문이 난 것 같더라. (웃음) 배우가 너무 그렇게 한쪽으로 치우쳐 소문이 나는 건 안 좋은데. 상업영화 시나리오가 들어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서로 상황이 안 돼 하지 못한 것도 있다.

-연출 데뷔를 했는데, 차기작 계획은 있나. 지금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는지.

=일단 후회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연극이면 연극, 그림이면 그림, 영화면 영화 계속 하고 싶다. 다음 작품 시나리오도 썼다. 내 나이에 맞는,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생각하다보니 또 40~50대 평범한 남자 이야기가 됐다. 명문대 법대를 나와 고시에 떨어지고 실업자인 남자가 이혼한 꽃집 여자를 만나 벌어지는 일이다. 예정대로라면 올 10월에 들어갈 텐데 연극 출연이 겹치면서 내년 5월쯤 들어갈 예정이다. 봄이나 가을 햇살이 필요해서 내년으로 미뤄뒀다. 일반적인 중년 남자와 꽃집 여자의 로맨스가 아니라 거기 또 다른 비밀이 있다. <나홀로 휴가>보다 강도 면에서 좀더 세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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