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내 성폭력’ 여덟 번째 대담은 여성 영화평론가들의 이야기다. 2016년 주목받은 여성영화들의 흐름과 페미니즘 비평에 관한 논의는 물론, 지난해 <씨네21> 출신 평론가의 불미스런 사건이 영화계 내 성폭력 공론화의 시작이었던 만큼 평론가들의 자성의 목소리를 담아낼 필요도 있다는 판단하에 자리를 마련했다. 2016년은 여성주의를 기반한 영화들이 주목을 받고 여성감독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한해였다. 반면 한쪽에선 여전히 남성 중심의 영화들이 득세하고 있는 대중영화의 벽을 실감한 1년이기도 했다. 대담에 참석한 김경욱, 김소희, 송효정, 정지연 평론가는 한결같이 한국영화의 퇴보와 고착화된 남성 중심의 재현 방식을 지적했다. 의미 있는 결과물들이 다소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모자라고 아쉽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었다. 더불어 한때 활발한 논의가 있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한국영화 비평 내의 페미니즘 담론에 대해서도 짚어봤다. 영화계 내 성폭력 사례에 대한 고발, 그다음을 위한 논의는 계속 이어진다.
김소희
페미니즘과 디지털 매체의 관계를 연구한 논문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전문사를 졸업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세계를 영화 속 신체기계의 맥락으로 풀어낸 글로 2015년 20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김경욱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YU HYUNMOK>(2008),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가 있다.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의 ‘김경욱의 데자뷔’난에 영화평을 연재 중이다.
정지연
2000년 5회 <씨네21> 영화평론상으로 등단 한 뒤 영화전문지 <키노> 등에서 기자 및 평론 활동을 하였다. 디지털 영화 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저서로는 <Korean Film Director: Bong Joon Ho>(2009), <영화와 사회>(공저, 2012) 등이 있다. 현재 명지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며 연세대학교 등에서 영화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송효정
2007년 12회 <씨네21> 영화평론상으로 데뷔 후 여러 지면에서 평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대구대학교 기초교육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며 인디포럼작가회의 상임작가,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영화제 프로그래머 등을 병행하고 있다.
-영화계 내 성폭력 여덟 번째 대담이다. 앞선 대담들은 어떻게 보았나.
=송효정_ 연속된 기획들을 꾸준히 진행한다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언급되는 이야기들도 진취적이고 그간 알지 못했던 부분을 알게 된 면도 있었다. 다만 횟수가 거듭될수록 같은 논의들이 반복된다는 인상도 받았다. 여성 영화인 지망생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말들이 앞으로 좀더 나오면 좋겠다.
=김경욱_ 동의한다. 무척 의미 있는 기획이지만 이번 대담을 위해 한번에 쭉 다시 읽어보니 확실히 동어반복이 짙었다. 그 밖에도 할 말이 많이 있는 것 같은데. (웃음) 가령 영화계에 새로 발 들이고 싶은 여성이 있다면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어떻게 대처하면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노하우나 방법들을 궁금해할 것 같다. 그리고 올해 개봉한 <미씽: 사라진 여자>나 <비밀은 없다> 같은 영화를 보면 어떤 과정을 거쳐 제작이 되었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으며 투자는 어떻게 받았는지가 궁금해진다. 남성 중심의 영화들 사이에서 이런 영화들이 생존한 방식을 제작 준비 단계부터 알고 싶다.
성폭력, 영화평론계 내의 문제라 볼 수 있는가
=정지연_ 이제까지의 대담은 비유하자면 대나무숲 고발 같은 느낌이다. 직능별로 우리쪽은 이런 분위기, 이런 일이 있었다고 서로 알려주고 공유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 같다. 사실 이런 사례들은 대부분 비슷할 수밖에 없다. 제작현장 내의 권력 위계나 성폭력의 메커니즘을 답습하기 마련이다. 필연적으로 동어반복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계속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런 대담이 계속 이어진다면 이제 그다음을 생각할 단계인것 같다. 이젠 현장에서 성평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무엇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송효정_ 바로 지난 1085호 송년호 대담에서 남자감독들이 나온 것이 좋았다. 너무 여성들의 이야기만 듣는 것도 여성, 남성을 갈라서 타자화한다는 인상을 준다. 균형이 필요하다.
=김소희_ 지난 대담 중 크게 공감한 부분은 일련의 사례들이 결국 젠더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라는 점이었다. 영화계뿐 아니라 문단, 미술, 학계 등 여타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짚고 넘어갈 것은 ‘영화평론계’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영화평론가가 된 뒤 더욱 고립된 느낌이 든다. 성폭력 대담 연속 기획의 계기가 된 김수 평론가의 불미스런 사건의 경우도 위계라기보다는 여전히 영화평론가라는 이미지, 글쓰는 혹은 예술가라는 이미지가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평론가라는 직함을 통해 학계라든지 다른 영화계로 진출하는 사례를 볼 때 범영화계로 보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김경욱_ 매우 특이한 경우라 영화평론계로 확대해서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본다. 협업을 기본으로 하는 제작쪽에서 그런 일들에 대해 종종 이야기를 듣긴 했어도 영화평론쪽으로 양자간의 위계가 성립하긴 어렵지 않을까. 솔직히 영화평론계라는 실체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활동이 대부분 점조직처럼 독립적이고 서로 교류도 거의 없다. 이 자리에 모인 세분은 <씨네21> 출신 평론가인데 서로 알고 자주 만나는 편인가.
정지연_ 오늘 처음 뵙는 분도 있다. (웃음) 사실 선후배라고 해도 교류가 거의 없고 함께 활동을 하는 게 아니니 어떤 장이 형성되긴 어렵다. 이번 일은 문단에서의 성폭력 문제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영화계에서 평론의 위상이 문학계에서의 평론의 위상이나 권력과는 좀 다른 것 같다. 게다가 이번 문제를 영화평론가라는 직군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사례로 적용하긴 힘들다고 본다. 나는 기자 출신이라 제작 분야에서 보고 들은 것들이 꽤 있지만 평론쪽에서 이런 일을 들은 건 예전 <네오이마주>라는 웹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영화평론계 내부의 위계나 권력보다는 글쓰기를 권력화한 개인의 문제에 더 가까운 사례들 같다.
김소희_ 이번 성폭력 사건은 그 평론가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이중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SNS가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과 발언들을 독려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만큼 페미니스트로 가장하기 쉬워진 시대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송효정_ 평론가들의 자리가 좁아지고 활동의 장이 사라지고 있는 것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나 역시 실질적으로 영화평론계라는 게 존재하는지 반문하고 싶다. 기본적으로 고립된 작업이다. 개인적으로 작업하다보니 영화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소속감도 크지 않다. 나도 10년쯤 하다보니 오며 가며 알게 된 사람이 있지만 그런 식의 인맥은 학교쪽이 더 많다. 어쩌면 본인의 인정욕구를 공식적인 장에서 풀기 어려우니 적극적으로 SNS를 활용한 것일 수도 있다. 영화평론의 장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만큼 이후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장담을 못하겠다.
김소희_ 앞선 대담 중 다른 쪽 일을 하다가 온 분이 영화쪽은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 드러난 것만 가지고 말하긴 어렵다. 드러나지 않은 쪽이 더 심각할 수도 있다.
‘여성영화’라는 잣대 무조건 들이대지 말아야
-말씀처럼 이제 선언적인 것 말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담에서는 2016년 한국영화 내 여성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까 한다. 올해 한국영화는 여러 지점에서 여성에 대한 담론을 형성했다.
김경욱_ 몇몇 사례들을 언급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큰 틀에서 여성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우선 <씨네21>의 올해 베스트 리스트에서부터 이야기를 꺼내보자. 이 순위 자체가 한국 사회의 불균형과 극단을 보여주는 거라 생각한다. <아수라>와 <우리들>이 나란히 있는 리스트라니.
정지연_ 희한한 리스트다. 한마디로 중구난방이랄까. 좋게 말하면 다양한 시선이 반영된 리스트인데 한편으론 평론계의 담론을 읽을 수 없다. 페미니즘? 작가주의? 정치적 관점? 어떤 측면에서 봐도 애매모호하다. 1위로 꼽힌 <아가씨>가 일종의 키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를 여성주의적 시선 또는 페미니즘 비평으로 읽을 수 있을까.
김경욱_ <아가씨>는 여성을 아주 잘 소비한 영화이지 페미니즘 영화는 아니다. 금기를 영리하게 넘나들며 관객이 불편하지 않게 받아들이도록 꾸미는 솜씨야말로 박찬욱 감독의 특기다. 아가씨가 일본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미묘한 감정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다. 일종의 외설적인 느낌이랄까. 그런 아이디어들이 박찬욱 감독의 감각을 드러낸다.
김소희_ 비슷한 생각이다. <아가씨>에 관한 짧은 비평을 쓴 적이 있는데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드물고 이렇게 좋은 성적을 거둔 경우는 더 드물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를 환영하며 페미니즘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수 있다. 페미니즘 영화라고 할 만한게 너무 없다보니 사소한 것에서도 의미를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흐름이 존재한다. <아가씨>는 이성애자, 남성, 여성, 누가 봐도 부담없이 소비되는 재미있는 그림을 제공한다. 그게 동성애에 대한 열린 시각으로 나아간다고 해석되는 것 같은데 한편으론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캐릭터는 분명 인상적이었지만 이중적인 고민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정지연_ <아가씨>는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캐릭터에 접근했다기보다는 장르적으로 여성들이 특정한 역할을 맡은 영화다. 일제강점기를 끊임없이 소환해온 한국영화가 30년대를 현재화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양한데 박찬욱 감독의 연출은 탐미주의에 기반을 둔 엑조티즘(이국의 정취에 탐닉하는 경향)으로 보인다. 화려하면서도 과잉적으로 장식된 저택과 시각적 스타일, 캐릭터조차도 생동하는 사람의 에너지라기보다는 장신구에 가깝게 배치된다. 제스처, 복장, 소품, 구도 등에서 30년대의 상상적 조선과 일본이 만나면서 독특한 엑조티즘을 만들어낸다. 이 엑조티즘에는 여성들의 섹스 신도 포함된다. 아름다운 몸을 가진 여성들의 행위와 이미지들이 여성주의적 재현이라기보다는 다소 전시주의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 여성주의적 사랑이라면 오히려 <연애담>에서 묘사되는 시선과 섹스 신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송효정_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일종의 엑조티즘에 가깝다. 이 영화의 극장성은 공연을 관람하는 시점에 맺혀 있다. 음란서적을 낭독하는 아가씨를 관람하는 남성들, 전시된 무언가를 보는 시점, 관객 역시 관능적이고 예쁜 그림을 관람석에 앉아 즐긴다. 30년대의 재현 문제로 들어가면 실제로 그런 형태의 저택이 있을 수 있지만 무척 과잉되어 있다. 피상적인 화려함인데 그만큼 식민지 시대와 시간적, 공간적으로 유리되어 있는 이야기다. 화려함이 주는 쾌감도 있지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 <박쥐>나 <스토커>가 훨씬 더 진지하게 나갔다고 생각한다.
김경욱_ 여성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캐릭터와 아이디어에 대한 공학적인 디자인으로 출발한 영화다. 극단적으로 말해 ‘김민희가 일본어로 음란서적을 읽는다’, 이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해 거꾸로 구성된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상업적으로는 재미있는 트릭이고 테크닉은 탁월하다. 하지만 작가적인 관점에서는 아쉽다. 개인적으로 박찬욱 영화중에서도 상위에 놓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가 올해의 영화 1위에 거론되고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읽는 관객이 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아가씨>를 둘러싼 반응이 2016년 한국영화가 여성주의를 이해하고 적용하고 있는 양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한다.
송효정_ 올해 한국영화에서 여성주의적인 경향이 부각되었나. 여성감독들이 영화를 만들고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등 회고적으로 그랬다고 해석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의도나 실제로 나온 영화들의 형식을 보건대 여성주의적 시선이 특별히 도드라졌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특히 아쉬운 점은 새로운 여성감독이나 여성적인 시선이 있었나 하는 부분이다. 이경미, 이윤정, 윤가은 등 올해 영화를 선보인 여성감독들도 대부분 오랜 시간 준비했고 미장센단편영화제 등에서 이미 색깔을 드러낸 기성감독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선보인 영화가 처음 보였던 개성과 불균질한 힘을 품고 있었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비밀은 없다>를 제외하곤 잘 모르겠다.
김소희_ 영화들이 품었던 의도보다도 관객과 평단에서 여성주의적 시선을 읽어내고 싶어하는 욕망이 더 컸다고 생각한다. 여성 감독들이 결국은 ‘감독’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처럼 비평 역시 이들의 작품에 대해 무조건 ‘여성영화’라는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그와 동시에 ‘여성주의’에 대해서도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 혹은 여성감독의 영화 등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견고한 기존 가치, 이를테면 남성 중심의 한국 영화산업에 균열을 내는 모든 작업을 여성주의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 그게 여성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계속 필요한 이유다.
정지연_ ‘여성주의냐 아니냐’가 아니라 영화에서 여성들이 재현되는 방식 정도로 이야기하면 좋겠다. 큰 흐름에서 보면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 사회의 흐름에 따라 한국영화의 흐름도 역동적으로 변화했다. 다양한 장르영화들이 등장했고, 그런 와중에 여성 감독들은 물론이고 여성의 다양한 욕망과 모습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중심으로 한 평론가들의 논쟁 속에서 페미니즘 비평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2003년 이후 대기업의 기획영화들이 산업의 주축으로 자리하면서부터 어느 순간 진취적인 여성상은 사라지고 남성화된 장르의 일부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여성에겐 희생자, 정신병자, 창녀 등 소모적인 캐릭터만이 주어졌다. 이 시기 이후 한국 호러영화의 대부분에서 여성 그 자체는 괴물로 존재한다. 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다. 올해 충무로 상업영화나 독립영화 진영에서 퀴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등 성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늘고 있지만 여전히 주류라고 말하긴 어렵다. 게다가 주류영화에서 이러한 소재들을 끌어들여 소비하는 방식은 꼼꼼히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윤여정이란 배우와 <다가오는 것들> 같은 영화를 만들 수는 없을까
-이윤정 감독의 <나를 잊지 말아요>,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 이현주 감독의 <연애담>, 홍지영 감독의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이언희 감독의 <미씽: 사라진 여자>까지 올해 여성감독들의 작품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비밀은 없다>와 <우리들>은 올해 <씨네21> 베스트에서 각각 3위와 5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한편으론 그럼에도 이들 영화의 성적이 대체로 저조했던 것도 사실이다.
정지연_ 관객수로 추이를 분석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천만’은 상징적인 숫자였다. 그 정도 기록을 달성하려면 세대를 아우르는 관객 관람을 비롯해 사회적 현상이라 읽힐 만한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 천만이란 숫자는 관객의 선택이 아니라 자본의 판단에 가깝다. 여성주의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영화를 포함해 개성 있는 영화들이 아예 극장을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별 영화들의 흥행으로 작품의 의식과 성패를 가늠하는 건 무리가 있다.
송효정_ <비밀은 없다>의 흥행 실패는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의 거부감이라기보다는 장르영화에 대한 배신감처럼 보인다. 특정한 장르 컨벤션을 기대하고 들어갔던 관객이 예상과 전혀 다른 질감의 영화를 확인하고 거부감을 드러낸 것 같다. 마케팅의 실패라고 볼 수도 있는데, 마케팅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까를 생각해보면 다른 것들이 보인다. <비밀은 없다>는 전형적인 정치 미스터리 스릴러물로 홍보되었는데 일차적으로는 그런 영화들이 잘 팔리기 때문일 거고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이경미 감독에 대한 불안감도 작동하지 않았을까 한다. <미쓰 홍당무>(2008)처럼 특정 관객이 불편해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든 여성감독이란 전례가 어떤 낙인이 되지 않았을까. 의도했든 아니든 감독을 뒤로 감추고 영화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마케팅을 하는 건 ‘개성 있는 여성감독’에 대한 업계의 불신을 반영한다. 이런 환경에서 감독이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며 작업한다는 건 인내와 희생을 동반하는 가혹한 시간일 것이다. 이렇듯 기존에 어느 정도 네트워킹을 유지한 감독들도 이럴진대 신인 여성감독이 본인을 온전히 드러내는 데뷔작을 연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건 <밀정> <아수라> <마스터> 등 남초영화들에 대해서다. 우선 ‘알탕영화’라는 단어 자체가 폭력적인 발언이라 사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2000년 중반 남자배우 원톱의 영화를 지나 지금은 남자들로 드글드글한 멀티캐스팅이 대세인데 이건 산업적인 선택이자 장르 변화의 말단이라고 생각한다. 2000년 초반부터 주류였던 조폭영화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변형되어 다시금 소비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김경욱_ 지난해와 올해 주류영화들이 조폭영화의 변형이란 점에 동의하는데 그럼에도 나는 한국 사회가 이런 상황이면 조폭영화가 앞으로도 유효할 거라고 생각한다. 현재 정치 행태가 조폭이나 진배 없는 상황에서 그게 흥행 코드를 담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계속 기획될 것이고 그럼 또 다른 형태의 조폭영화는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영화산업이 블록버스터를 지향할 때 필연적으로 빚어지는 결과다. 다만 우려스러운 건 그 속에서 여성이 소비되는 방식이 매우 폭력적이란 점이고, 더 큰 문제는 여타 장르에도 영향을 끼치는 건 물론이고 이런 인식이 관객에게도 학습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여기까지 학대해도 괜찮다, 혹은 더 큰 자극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뉴아메리칸 시네마 이후 할리우드가 관객 길들이기를 했던 것처럼 한국영화의 취향도 단순화되고 있다.
정지연_ 여성 캐릭터의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고 폭력적으로 소비되는 영화들이 쏟아져나올 때 당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겪었던 일화가 생각난다. 상당히 수위도 높고 불편할 수 있는 장면에서도 한국 관객 사이에서는 계속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걸 본 해외 게스트가 굉장히 의아해하면서 내게 이 장면에서 왜들 이렇게 웃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주류 상업 장르영화에서 여성에 대한 재현들이 폭력이나 유머의 대상으로 한정되고 소비되고 있으니 관객도 이미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전시에 그만큼 둔감해진 것일 수도 있다. 충무로의 주류를 차지한 몇몇 남성영화들은 여성에 대한 혐오를 반복하고 폭력을 일종의 유희도구로 활용한다. 우리가 이를 문제시하지 않고 소비할 때 성폭력은 영화 제작 현장에서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적 재현을 통한 학습의 문제로 번진다. 올해 나온 영화 중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몇몇 영화에서도 이같은 인식을 읽을 수 있다.
김경욱_ 소재주의에 빠진 영화들이 있다. <최악의 하루> <죽여주는 여자> 등은 계량적으로 보면 남초영화들에 대한 반작용처럼 보이는데, 실상 이들 영화가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뜯어봐야 한다. 여성감독이 만들었다고 무조건 지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남성감독이 연출한 여성주인공 영화라고 해서 여성 캐릭터에 대한 왜곡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 두 영화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가령 <죽여주는 여자>는 전형적인 소재주의라고 생각한다. 심하게 말하면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윤여정이란 배우와 함께 <다가오는 것들>(감독 미아 한센 러브)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없는 걸까. 노년을 바라보는 여성이 한국에서는 매춘을 하고 이자벨 위페르는 철학과 교수로 그리는 차이가 뭘까.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거다. 이렇게 자극적이고 장르적으로 찍어도 흥행이 안 되는 판에 가만히 바라보는 이야기를 하긴 어려울 거다. 기본적으로 <다가오는 것들>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면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시장이 없다. 일단 주류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에 신인, 여성, 중견감독 가릴 것 없이, 유행이라고 믿어지는 소재와 장르로 휩쓸려 들어간다. 모양만 바꾼다고 대중영화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만의 감수성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데도 현실이란 이름으로 타협한다. 올해 나온 영화들 중 그나마 캐릭터를 착취하지 않은 건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 정도인 것 같다. 잘 성장하면 <다가오는 것들> 같은 영화를 찍을 수 있지 않을지 기대가 된다.
정지연_ <죽여주는 여자>는 윤여정 배우의 연기 중 제일 재미없었다. 대사와 표정이 깡마른,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였다. 적극적으로 의도를 해석하자면 한국 현대사와 여성의 수난사를 결부시키고자 하는 것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영화적 가학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김소희_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들>과 <비밀은 없다>를 다시 주목하고 싶다. <비밀은 없다>에서 부모가 아이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방식, <우리들>에서 아이들이 부모를 품어줄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는 방식이 가부장적 가치, 남성적인 시선에 대한 거부로 읽혔다. 윗세대와 절연하고 오래된 규율에 균열을 낸 후 다음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 이런 것들을 광범위하게 여성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안으로 파고들어가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여성주의가 아니라 틀과 이해를 넓히려는 운동으로서의 여성주의 말이다.
정지연_ 변형된 조폭영화가 다시금 등장한 건 사회비판적 텍스트처럼 위장하여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판타지와 마초이즘이 결합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내부자들>에서 여성 캐릭터를 처리하는 방식을 보고 있으면 불편해서 견디기 힘들다.
김경욱_ 변형된 조폭영화가 다시금 등장한 건 사회비판적 텍스트처럼 위장하여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판타지와 마초이즘이 결합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내부자들>에서 여성 캐릭터를 처리하는 방식을 보고 있으면 불편해서 견디기 힘들다.
송효정_ <비밀은 없다>의 연홍(손예진)은 어떤 성격을 규정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한편으론 논리적 해명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이 캐릭터가 의도한 효과가 아닌가 한다. 고립되고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여성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본다. <비밀은 없다>와 <미씽: 사라진 여자>의 여성들을 연결시키면 그 고립된 상황은 좀더 분명해진다.
정지연_ <비밀은 없다>는 지금의 충무로 내에서 나왔다는 게 신기한 영화다. 감독의 의도와 실험정신은 매력적이다. 동시에 그같은 의도가 잘 구현되었는지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덧붙여질 필요가 있다. 정치판에 있는 남편의 기만, 엄마가 딸의 죽음을 파헤쳐가는 저돌적인 에너지, 전형적이지 않은 모성에 대한 이해 등은 동의하는데, 캐릭터의 구축은 실패한 것 같다. 히스테리 환자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관객과의 접점을 만들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김소희 평론가의 말처럼 균열을 내는 작업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측면은 있지만 한계에 대한 지적도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문법을 깨는 것도 여성주의적인 접근
-90년대 말부터 2000년 초반까지 자주 볼 수 있었던 페미니즘 비평이 최근엔 거의 사라졌다. 최근 일련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페미니즘 비평이 등장할 수 있을까.
송효정_ 일단 비평의 유행이나 흐름을 반드시 필요하다는 당위의 문제로 끌고 와야 하느냐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단순히 그때는 페미니즘 비평을 읽고 소비할 만한 장이 있었던 거고 지금은 그렇지 못한 상황일 뿐이다. 비평적 관심은 시기의 담론과 함께 가기 마련이다. 다시금 그런 요구가 있다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꼭 있어야 한다고 말하진 않았으면 한다. 한편으론 1세대 평론가들이 이제 학교나 영화제 등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서며 그 논의를 이어받을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영화평론의 고독한 작업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정지연_ 90년대 중반은 영화뿐만 아니라 군사독재 시기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다양한 문화적 현상과 담론이 폭발하던 시기였다. 새로운 영화나 영화평론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변했다. 두 차례의 경제위기와 함께 문화담론의 역동성이나 대중문화의 다양성도 같이 사라진 것 같다. 페미니즘 비평만 사라진 게 아니라 영화비평 자체가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경욱_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단관 개봉으로 10만 관객을 모으던 시기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 (웃음) 갈수록 한국영화가 나빠지고 있음을 느낀다. 얼마나 흥행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들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고 관객에게 사기를 친다. 주류 상업영화들은 끔찍한 수준이고 홍상수, 김기덕 등 기성감독들도 마찬가지다. 페미니즘 등 특정한 담론 형성에 앞서 스튜디오 시스템의 문제를 먼저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송효정_ 솔직히 페미니즘은 잘 알지 못한다. 여성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글을 쓰지도 않았다. 다만 성정치적인 입장에서 논의 안으로 들어가 어떤 방식으로든 기존의 장벽을 내파하는 영화를 지지한다. 2000년 중반 이후 페미니즘 비평을 찾아보기 힘든 건 논쟁을 일으킬 만큼 불편하고 뜨거운 영화들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16년의 시도들은 나름 되짚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김소희_ 여성주의적인 영화가 무엇인가는 쉽사리 정의내릴 수 없다. 하지만 여성주의적인 재현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찾아가려는 태도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분류를 하는 건 테두리를 넓히기 위함이지 구분짓기 위함이 아니다. 심리적인 거부감과 별개로 페미니즘적인 시각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범주라고 생각한다. 그것 자체가 단단하고 진입장벽이 높은 개념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확장적인 시도다. 그동안 여성주의적인 영화가 너무 없었기 때문에 올해 여성감독이 연출한 영화,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를 놓고 여성주의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갈증이 있다. 큰 틀에서는 그동안의 문법을 깨는 것도 여성주의적인 접근이라고 본다.
정지연_ 다양한 관점의 비평들이 일련의 단순화, 문화적 빈곤의 시기를 거치며 논의의 장을 상실했다. <디 워>(2007) 때부터 평론가들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반지성주의가 만연했다. 영화에 대한 정보는 영화전문지나 평론이 아니라 유명 블로거들의 간단한 코멘트로 대체됐다. 그러므로 최근 주요한 키워드라 할 수 있는 여혐이나 폭력의 문제는 한국 사회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혐오와 적대에 기반한 일베들의 논리가 한국 정치사회의 전략과 맞닿아 있지 않은가. 그런 와중에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성들의 불안과 분노의 임계점을 넘어서게 만들었던 것 같고, 이제 더이상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SNS나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실천들이 생겼다. 그런데 이러한 분출 역시 다양한 듯 보인다. 남성주의가 드러낸 혐오를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미러링에서부터 집단적 토론과 연대체, 혹은 이론 세미나들도 활발해지고 있다. 말하고 싶은 것들은 많고, 말할 수 있는 통로도 다양하니 극단적 혐오부터 대안주의적 절충안까지 한꺼번에 쏟아진다. 지금이 소위 말하는 페미니즘 리부트의 시기라면 공론화된 이슈를 가지고 앞으로의 방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씨네21>이 공식적인 지면에서 이런 대담을 이어가는 것도 프레임을 형성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책임과 역할을 지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