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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메이커'가 모델로 삼은 실존 인물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선거 귀재 엄창록 이야기
김수민 2022-01-28

그(들)의 꿈이 이루어졌다면

영화 <킹메이커>의 김운범, 서창대에 비친 김대중과 엄창록은 각각 ‘도덕적인 원칙론자’, ‘수단을 가리지 않는 지략가’이다. 하지만 영화 속 서창대는 ‘김대중과 달랐던 엄창록’이 아니라 김대중의 지략을 응집한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 이 말에 김대중보다 더 어울리는 한국 정치가는 없다.

김대중의 첫 선거는 1954년 전남 목포 국회의원 선거다.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는 무소속 후보로 나서 10명 중 5위로 낙선했고 그 뒤 한국노동문제연구소를 열었다. 그즈음의 김대중은 전형적인 ‘진보 정치인’이었다. 소련식 사회주의를 단호히 배척하면서도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노동자 복리를 지향하는 ‘반공 좌파’였다. 한동안 죽산 조봉암과 어울리기도 했고, 제3당 노선의 공화당에서 대변인도 지냈다. 하지만 그는 독재 정권과 그에 맞서는 야권 결집이 양당제를 강제하던 현실을 꿰뚫어보았다. 그는 제2당인 민주당에 가입하고, 당내에서 상대적으로나마 개혁 성향인 ‘신파’의 일원이 된다.

영화 속 서창대는 낙선을 거듭한 김운범을 갑갑하게 여기지만, 현실의 김대중에게 낙선은 자양분이었다. 강원도 인제에 출마한 김대중은 1958년 총선 후보 등록 취소, 1959년 보궐선거 및 1960년 총선 낙선으로 연거푸 고배를 마시는데, 감동한 당 지도부는 30대 중반의 원외 인사 김대중을 집권 민주당의 대변인으로 임명한다. 연이어 낙선하며 되레 대선 주자로 성장했던 노무현이 그 후배다.

김대중과 엄창록의 이력과 만남

김운범과 서창대의 만남처럼 김대중과 엄창록도 1961년 인제 보궐선거에서 만났다. 함경북도 주을 출신인 엄창록은 고졸이라는 설도 있고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북한에서 좌익 조직에 몸담았지만 일찌감치 이탈했다. 중앙정보부 대공 부서 출신인 이용택 전 국회의원은 엄창록을 ‘철저한 전향자’라고 평가했다. 엄창록이 선거 귀재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영화에서처럼 1967년 총선에서다. 김대중은 1963년 총선에서 목포로 돌아가 재선에 성공했고,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 최전방 정권 공격수로 뛰었다. 1967년 총선에서 박정희 정권은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열어가며 대대적인 공장 건설, 영산강 개발, 부두 정비, 대학 유치 등 온갖 개발 공약을 투하해 지역 민심을 자극했다. 김대중은 이런 노골적인 ‘김대중 낙선’ 전략을 ‘토벌작전’이라고 불렀다.

곧이어 막대한 관권·금권 선거가 펼쳐지자 김대중측은 엄창록의 지휘 아래 이에 대항하는 작전을 펼친다. <킹메이커>가 재현한 것들은 모두 실화로 알려졌던 것들이다. 유달산과 삼학도와 영산강을 부르짖는 명연설도 실제 김대중의 연설이다. ‘누가 봐도 김대중이 이기는 선거’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선거 막판 예정되었던 유권자명부 조작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건의로 취소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총공세는 묘한 뒷맛을 남긴다. 목포는 어차피 집권 민주공화당이 이기기 어려운 선거였다. 박정희의 호남 지역 득표를 보자. 1963년 대선에서 1위를 했지만 1967년 대선에서는 2위였다. 산업화가 경부축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호남의 소외 의식이 고조되었다. 한때 ‘10대 도시’로 꼽히다가 밀려나던 목포의 민심 이반은 가장 심각했다. 더구나 김대중의 상대로 나온 공화당 김병삼은 실은 약체 후보였다. 그는 절도범에게 총상을 입은 적이 있는데, 김대중과의 대결을 회피하려 스스로 쐈다는 설이 파다했다. 선거 막판에는 백범 김구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드러나 약점을 잡혔다.

박정희 정권이 반드시 김대중을 꺾어놓아야 했는지도 의문스럽다. 1967년은 박정희 정권이 안정기에 접어들던 시기다. 1963년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를 1.55%포인트 차이로 힘겹게 따돌린 박정희는 1967년 대선에서 윤 후보를 10.51%포인트 차로 제압한다. 전체 정치판을 휘어잡은 박정희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 하나를 낙선시켜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뒤집어보면 박정희가 김대중의 역량을 높이 평가해 일부러 키워주려고 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방해 공작을 이겨낸 김대중은 뒤로 정부의 후원을 받는다고 비난받던 ‘사쿠라’ , 신민당 당수 유진산에게 돌격했다. 유진산은 1917년생 박정희보다 12년 연상으로 ‘구태 정치인’ 이미지를 지녔다. 자신을 신진개혁세력으로 여기던 박정희에게 좋은 상대였다. 그러나 박정희에게 탄압받은 이미지의 세 40대 정치인이 유진산의 대선 출마를 가로막는다. 1969년 괴한이 자가용에 질산을 투척하는 이른바 ‘초산 테러’를 경험한 김영삼, 1964년 의문의 방화 사건을 겪은 이철승, 목포 선거를 이겨낸 김대중이 ‘40대 기수론’을 편 것이다. 결국 유진산은 대선 도전을 포기하고, 1971년 대선의 신민당 후보를 뽑는 경선은 세 40대 기수의 대결이 된다.

영화는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장(서울시민회관)에서의 긴박한 상황을 연출한다. 1천명 미만의 대의원이 한날 한자리에 모여 대선 후보를 선출하던 시대였다. 제한된 시공간에서의 경쟁은 한 건물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긴장을 최고조로 이끈다. 다만 영화에서처럼 엄창록이 경선 막바지에 후보자간 거래까지 주도했다는 증언은 없다. 사실 엄창록의 진가는 따로 있었고 그 진가는 투표 이전에 발휘되었다. 그의 주특기는 ‘조직’이었다.

그는 조직책에 10명의 명단을 내려보낼 때 한두명의 유령 유권자를 끼워보내고는 했다. 유령 유권자를 발견하는 성실한 운동원인지 시험해보는 것이다. 1971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도 엄창록의 목표는 오직 조직이었다. 1968년 의원 지지가 부족해 신민당 원내총무 임명을 받지 못한 김대중측은 당 변방의 대의원들의 표심을 얻는 데 주력했다. 세계전쟁사의 승리 대부분이 정공법이 아닌 우회전략에서 이뤄진 것에 착안한 것이다.

1차 투표에서 김영삼의 과반 득표를 저지한 김대중은, 1차 투표에서 무효표를 던진 이철승 지지 대의원들의 표를 마저 모아 2차 투표에서 대역전극을 이룬다(이철승은 유진산 총재의 추천을 받지 못하자 투표 전에 경선에서 하차했다). 영화에서처럼 김대중은 이철승에게 ‘이번에 대선 후보로 김대중을 밀어주면, 차기 당 총재로 이철승을 민다’는 내용의 각서를 내민다. 명함 뒷면을 이용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양측 인사들이 합의 각서 교환을 확인했다는 증빙서도 있다. 영화와 다른 점도 있다. 김대중이 쓴 각서는 이철승계의 조연하를 통해 그 시각 대회장 밖에서 테니스를 치던 이철승에게 전달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김대중 후보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을 등에 업은 민주공화당의 공세를 뚫고 목포에서 당선된다.

1971년의 현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함께한 선거

1971년 제7대 대선은 김대중과 엄창록이 마지막으로 함께한 선거다. 4월27일 대선을 세달 앞둔 1월27일, 김대중이 미국 출장길에 오른 사이 자택에서 폭발 사고가 터진다. 당장 “유력 대선 후보를 노린 테러”, “주목을 받으려는 자작극”이라는 주장이 충돌했다. 김대중의 조카인 중학생 김홍준이 체포되었다. 구정물 통에 머리를 집어넣는 고문을 못 이겨 김홍준은 “화약 장난을 했다”고 허위자백을 했고, 검찰과 경찰은 2월11일 구속영장까지 청구하지만 구속적부심을 통해 김홍준은 석방된다.

영화에서는 그다지 묘사되지 않지만 당국은 나름대로 면밀하게 조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폭발물은 철조망이 있는 후문에서 투척되었다. 도화선은 28cm로 타는 데 3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집 안에 있던 사람이 나가서 폭발물을 투척한 다음 다시 집으로 들어올 수 없는 시간이다. 사건 3일 전에는 외등으로 이어지는 전선 두 가닥 중 하나가 잘려 있어 한국전력 수리반이 출동하기도 했다. 특기할 것은 승용차에 타고 있던 한 청년이 “전기 고장은 없다”고 밝혀 수리반원들이 되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중앙정보부의 소행이라는 추정과 함께 김대중측 내부 인사들에게도 의심이 가해졌고 엄창록도 그 대상이었다.

그사이 이 문제로 국회는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한다. 2월3일 회의장에는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주제를 벗어나 여당 의원들까지 엄창록에게 선거의 비결을 자문했다. “밤을 새워서라도 당신과 조직 문제를 두고 허심탄회하게 토론하고 싶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정작 김대중의 선거는 흔들리고 있었다. 특조위 회의 이후 엄창록의 자택 상공에 헬기가 출현해 위협적인 비행을 했다. 2월5일 신민당 선거대책본부장 정일형의 봉원동 집에서는 화재가 발생해 선거 관련 서류가 모두 불탔다. 김대중 자택 폭발 사건에 대해서도 더 구체적인 의심이 생겨났다. ‘폭발 사건을 조사하는 척하며 김대중 선거전략을 파악하려는 것은 아닌가.’

이때 김대중과 엄창록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알 수 없다. <킹메이커>가 묘사한 것은 가상을 동원한 것이다. ‘선거의 명수’ 엄창록이 선거일을 11일 앞둔 4월16일 돌연 잠적한 것은 진실이다.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는 엄창록의 집을 찾아가 혼자 울고 있던 엄창록의 부인에게 “남편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대답을 들었다. 김대중 비서 김옥두가 부인에게 들은 바로는 네 사람이 엄창록을 데려갔다. 김대중측은 중정의 공작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선거 막판, 이상기류가 나타났다. 4월24일 부산과 대구 시내에 ‘호남향우회’ 명의로 “호남인이여, 단결하라”와 같은 전단이 뿌려졌다. 그리고 마치 짜고 친 듯 ‘경상도 사람은 경상도 사람(박정희)을 찍어야 한다’는 선동이 출현했다. ‘엄창록이 배신해서 중정에 붙어 만든 전략’이라는 추정이 따라붙었다. 엄창록이 다시 발견된 것은 1971년 6월경이다. 엄창록은 그 후 김대중과 다시는 만나지 않았지만 김대중측 인사와 마주칠 때면 “속리산에 납치되어 있었다. 중정에 회유되어 도와준 일은 없다”고 밝혔다.

엄창록이 그간 무슨 일을 했든 속리산에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증언도 있다. 중정에서 근무했고 후일 김대중 정부 초대 국가정보원장이 되는 이종찬의 일기 내용이다. “김대중의 조직 참모 엄창록을 회유해 우선 200만원으로 병 치료와 요양을 구실로 속리산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엄창록의 명단에 따라 사조직을 완전히 밝혀냈다. 엄창록은 그 대가로 2천만원을 받았고 선거 후 생계도 책임지도록 했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든 간에 1971년 대선은 지역주의가 분출된 기점으로 봐야 할까. ‘영남 여당 우위/호남 야당 우위’는 1967년 대선부터 드러났다. 1971년 김대중 후보는 부산에서 43.6%의 득표율을 올렸다. 공화당측에서 영남 패권주의 선동에 앞장선 이효상 국회의장은 대선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패배했다. 이효상의 지역구는 대구 남구였고 당선자는 신민당 후보였다. 1971년을 지역감정이나 지역차별의 기원으로 단정하는 시각에 대해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엄창록의 사망, 그리고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중정의 후신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관계자들이 선거 전략 자문을 위해 엄창록을 찾았다. 그는 “어차피 김대중, 김영삼이 따로 출마하기 때문에 당신들이 이겼다”고 잘라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대선이 끝난 지 얼마 안된 1988년 초 세상을 떠났고, 사망 직전에도 병석에서 김대중의 소식을 물었다고 한다.

엄창록이 계속해서 김대중의 곁에 남았다면 어땠을까? 1971년 대선부터 돌아보자. 전국 선거에서 정권의 공세를 이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엄창록의 꾀가 먹혀들기에는 너무 큰 선거였다. 독재 시대에 정권 교체가 가능하리라는 기대가 부질없기도 하다. 김대중은 ‘향토 예비군 폐지’ 등 급진적인 느낌의 공약을 과감히 밀고 나갔다. ‘어차피 지는 선거라면 선명하게 정권과의 차이를 보여주며 미래정치를 예견하겠다’, ‘보수 야당에 들어가 후보가 되었지만 진보 정치를 펼치겠다’는 포부가 엿보인다.

1971년 결별부터 1988년 엄창록 사망까지는 김대중의 시련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1971년 5월 의문의 교통사고, 1973년 납치사건과 그 이후의 가택 연금, 1976년 민주구국선언 참여로 구속, 1980년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사형 선고, 1982년 미국 망명, 1985년 가택 연금. 함께 있었다면 엄창록도 모진 탄압을 받았을 것이다. 공직에 오르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1961년부터 비서 생활을 한 엄창록은 1920년대 후반생으로 추정된다. 1963년부터 비서였던 1930년생 권노갑은 1988년 총선에서 비로소 초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1987년 대선에 대해 엄창록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이쯤에서 ‘1987년 김대중, 김영삼의 단일화 실패가 민주화를 늦추었다’는 통념을 찬찬히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단일화를 해서 이긴다는 보장부터가 없었다. 미국 CIA가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정권은 투표 조작에서부터 패배시 선거 무효선언 등 광범위한 부정선거 계획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대로 되지 않은 건 노태우 후보의 승산이 커서일 것이다.

정권이 교체됐다 해도 권력기관, 관변단체, 보수언론 등은 새 정부의 민주화와 탈냉전 대응을 훼방했을 것이다. 김대중계와 김영삼계의 투쟁이 1960년 민주당 정권 내 ‘신파 대 구파’ 이상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정의당으로 정권이 도로 넘어갔을 공산이 크다. 이후의 전개까지 따져보면 김대중과 김영삼이 갈라진 결과가 그리 나쁘지는 않다. 한국은 점진적 민주화와 공명선거 정착에 성공했다. 각각 ‘온건 진보’ , ‘온건 보수’ 노선으로 나뉜 것이 정치 다양성에 기여하기도 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차례로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의 재임기 1998~2003년은 그의 뜻을 펼치기 좋은 시기였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동지 김종필과 손잡고 간신히 당선되었으나, ‘IMF 환란’을 극복해야 한다는 대중심리가 집권 기반을 다져주었다. 그가 야당 정치인 시절부터 다져놨던 미국, 일본, 중국과의 관계를 선용할 수 있는 국제정세가 펼쳐졌고, 세계 자유진영 지도자 가운데 최초로 북한과 정상회담을 갖고 공동선언을 내놓았다.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2002년은 한일월드컵과 함께했다. 국난의 시기에서 출발해 국가적 경사와 함께 임기를 마친 셈이다.

“2009년 1월7일: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김대중이 85회 생일 이튿날 쓴 일기다. 정치가 김대중은 이 한줄을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도 대통령이 되는 길에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했으며 같이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 중에도 그를 비판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명분과 이상을 좇는 지도자’ 이미지를 간직하며 장구한 드라마를 완성해냈다. 그가 받은 탄압과 그가 쌓은 업적은 선명한 대비 효과를 일으켜 대중의 미안함과 고마움을 북돋는다. 김대중은 현대 한국 정치사의 ‘영구결번’이다. 이것이 <킹메이커>가 대선을 앞두고 개봉해도 논란이 될 수 없는 이유, 도리어 작금의 ‘비호감 대선’을 질타하듯 등장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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