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에 인색한 편이다. 스스로는 잘 웃는 편이라 생각하는데 주변에서 볼 때마다 ‘요즘 힘드냐’는 걱정을 하니 변명할 도리가 없다. 아내는 말한다. 당신은 가만히 있으면 뭔가 화난 사람처럼 보이는 얼굴이니 가급적 표정을 밝게 하고 있으라고. 고마운 조언이지만 한편으론 그냥 힘을 풀고 편하게 있는 것뿐인데 왜 이리 피곤하게 표정까지 지어야 하는 걸까 싶은 반항심이 슬며시 고개를 치켜든다.
돌이켜보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너는 늘 한결같다’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다. 별명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었던 적도 있다. 좋든 싫든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지 않고 무덤덤하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누군가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표정이 항상 똑같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을 때조차 같은 표정인 사람. 그 모든 면이, 평가들의 합이 곧 ‘나’다.
당연한 말이지만 누구에게나 희로애락이 있다. 평온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나 역시 속은 거친 격랑에 나풀거리는 한 조각 배처럼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중이다.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마냥 영원히 채울 수 없을 텅 빈 불안감이 엄습할 때, 나는 마실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갈증으로 바짝 말라간다. 예전에는 그걸 굳이 드러내지 않는 게 예의고 배려라고 생각했다. 나의 불안을 굳이 타인에게 호소하는 건 서로에게 에너지 낭비라고 여겼다.
요즘엔 생각이 바뀌었다. 드러내어 알려주는 친절도 있다. 아침에 눈떠 아이를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매일 궁금하다. 저녁에 퇴근해 아내를 볼 때마다 오늘은 뭔가 참고 있는 게 없는지 걱정이 된다. 잠자리에 들기 전 다가와 몸을 부비는 고양이를 볼 때마다 이제 활동을 시작하는 이 녀석이 지금 어떤 기분일지가 궁금하다. 그럴 때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해준다면, 신호를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움이 그득 차오른다. 궁금해하지 않을 타인에게 내 상태를 고백할 필요는 없지만, 궁금해할 누군가를 위해서는 표정과 감정을 드러내는 게 필요하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말하지 않는 배려가 있는 것처럼 떠들고 알려주는 배려도 있다.
감정도 근육이다. 계속 써서 키우고 늘려야 한다. 감정을 잘 쓰는 법을 익히려면 우선 드러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영화, 시리즈, 예능, 숏폼까지 쏟아지는 도파민 폭탄과 웃음 유도제들을 보며 새삼 생각에 잠긴다. 나는 제대로, 잘, 웃고 있는가. 함께하는 상대를 위해, 내 얼굴과 표정을 지켜보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미소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웃음에 인색하면 감정도 점점 가난해진다. 늘 그럴 순 없겠지만 주변을 위해, 눈앞의 상대를 배려해 웃다 보면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 되기도 한다. 순간의 감정 역시 거짓이 아니다.
좋은 영화는 때때로 우리를 상처낸다. 상처라는 표현이 불편하면 흔적, 얼룩.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우리에겐 날카롭게 다가와 우리를 찌르는, 불편한 영화가 좀더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내 불편하고 괴롭다면 버틸 수 없으니, 일종의 우회로와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영화 속 웃음, 코미디가 그렇다. 힘든 시절일수록 코미디가 많아지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작용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웃음은 현실 회피가 아니라 오늘을 외면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편이 되기도 한다. 이번주에는 넘쳐나는 코미디의 현재를 짚어보았다. 여기 순간의 진심을 담아 (함정에 빠지지 않을) 웃음의 경로와 가능성을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