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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절단과 봉합의 공간을 감각하기 - 영화 속의 병원

신체는 각각의 절단면을 갖고 있다. 손과 발, 몸통, 머리, 이를 조직하는 세포의 조합들. 신체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볼 수 있는 직관적 공간이 있는데, 그곳은 바로 병원이다. 절단과 조립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병원은 고통과 통제, 안도의 언어가 수시로 발현되는 공간이다. 한편으로 이는 마치 편집이란 의미를 지닌 몽타주의 개념처럼 봉합과 절단의 가능성을 동시에 지닌 영화 매체를 떠올리게 된다. 필름 영화가 완성되는 작업 방식은 이와 유사한 풍경을 공유한다. 기계 위에 필름을 올려놓고, 날로 각각의 컷을 자르고, 잘라낸 두 조각을 테이프나 접착제로 붙이는 반복 행위가 이루어졌던 편집실은 영화의 완성과 죽음을 조우했던 병원과 같은 공간이었다.

이러한 비유를 잘 드러내는 초기 영화 알리스 기블라셰의 <20세기의 수술>(1900)은 병원으로 보이는 공간에서 칼과 톱으로 팔과 다리를 절단하고 다시 조립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수술실 위 표지에는 이 영화의 유일한 자막인 “제발 소리 지르지 마세요”란 문구가 있다. 음성 없는 이 영화에서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조건에 처해 있는 관객은 영화관이라는 진료실에 앉아 이 실험에 참여한다. 시각적 기호체계인 영화는 촉각의 언어로 변화하여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얼굴을 찌푸리며 영화를 감각한다. 이때 추동된 감각적 특성을 온몸으로 받아낸 관객은 프레임이란 절단면 위에 기억을 즉각 소환한다. 편집된 몸을 자신과 연결하도록 하는 영화관은 어떤 의미에서 병원과 닮았다. 감각을 상연하는 스크린 앞에 앉아 있는 관객은 수술실에 누워 있는 환자들과 같이 고통의 크기를 예상하지 못한 채 이미지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보편적 감각을 공유하는 인간은 이 유사한 관계 속에서 함께 거주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목적에서든 병원은 신체 훼손과 치료, 변이가 발생하는 필연적 공간일 뿐만 아니라 긍정이든 부정이든 다채로운 인간성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죽음이라는 실존 앞에서 드라마가 양산되는 저장고이기도 하다.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체화된 응시(Embodied Gaze)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불가피하게 위치한 신체성을 정의했는데, 신체에는 필연적인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고통을 마주하는 공간이자 이를 대표하는 병원은 특정한 신체 혹은 정신을 조명함으로써 스펙터클을 과잉적으로 발산하는 무대로도 기호화되었다.

<티티컷 풍자극>

또한 20세기에서 21세기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병원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욕망의 오브제로 점화되었다. 내면의 욕망을 다룬 조르주 프랑주의 <얼굴 없는 눈>(1960), 미국 의료 시스템 문제를 은유적으로 묘사했던 새뮤얼 풀러의 <충격의 복도>(1963), 전쟁으로 인한 신체 훼손과 성폭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마스무라 야스조의 <붉은 천사>(1966)는 급격한 사회 변화, 권위에 대한 불신, 의학 발전에 대한 양가감정 등을 반영한 사례다. 더하여, 충격적 이미지를 도입한 극영화가 점차 “타인의 고통을 미학화”할 것을 우려한 수전 손택의 말을 유념하며 고려할 영화가 있다면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병원 3부작(<티티컷 풍자극>(1967), <병원>(1970), <임사>(1989))이다. 극영화를 활보하던 카메라가 사실주의 문법으로 이동한 사례인 이 영화들은 관객들에게 지속적인 사유를 요청했고, 이미지에 수동적으로 의존하는 기존의 관객성을 바꾸려 했다. 국가와 사회 의료 시스템의 부재와 삶과 죽음의 연장을 다루는 와이즈먼의 이 긴 프로젝트는 극적 편집을 최소화하여 관객들에게 현장을 고스란히 증언했다. 여기서 병원은 죽음의 난관 앞에 서 있는 인간을 관찰하는 실재적 공간이자 여러 형식이 발현되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는 20세기 세기말이 근접해오면서 혼란스러운 현실과 병원이란 공간을 과밀하고도 절제된 방식으로 드러내곤 했다. 먼저 라스 폰 트리에의 TV드라마 시리즈인 <킹덤1>(1994), <킹덤2>(1997)는 세기말에 대한 불안감과 복지국가의 위기를 병원이란 공간에 응축한 작품이었다. 핸드헬드 카메라, 빠른 장면전환, 세피아 톤 필터는 혼란스럽고 황폐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동시에 초자연적 호러와 다크 코미디 같은 다양한 장르를 포섭한 획기적인 시도로 각광받았다. 디스토피아 세계를 동화적 색채로 다룬 테리 길리엄의 <12 몽키즈>(1995)는 병원을 회복과 치유의 공간이 아닌 억압과 통제를 주도하는 공간으로 그린다. 의학과 과학의 발전은 세계의 구조를 재편하는 도구로 동원된다. 세기말을 해독하는 권력기관인 병원은 미래로부터 온 감염자의 경험을 망상으로 대체하고 주체를 통제한다. 한국에선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1998)가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 병원은 몇번 등장하지 않는다. 친밀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사진관에 비해 병원은 임상적 현실 속에서 건조하게 묘사된다. 카메라는 세기말을 현상하듯 병원이 아닌 사진관을 조명하는데, 마지막 장면에선 주인공 정원(한석규)의 초상이 영정 사진으로 변환된다. 이 순간에도 영화는 병원을 스크린에 드러내지 않는다. 이처럼 세기말 영화들 속에서 병원은 불안과 위기를 마주하는 방식의 표명이자 상상력이 문화적 형식으로 기능하기 위한 가능성으로 점철되었다. 그렇다면 기술의 진보와 종말의 공포가 혼재된 세기말 이후 21세기 영화가 선택한 병원의 모습은 무엇일까.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다큐멘터리스트 왕빙의 작업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스펙터클의 이미지가 가열되고 확산하는 시기에 왕빙은 <철서구>(2002)를 통해 기차라는 영화의 유산에 탑승하여 현장으로 진입했다. 현실과 과거를 봉합하기 위해 그는 스펙터클의 절단을 감행했다. 계속되는 자본주의의 논리 속에서 구현되는 스펙터클을 보여주지 않고 그 주변부에 붕괴한 공간을 다뤘다. 즉 왕빙은 황폐화할 미래를 예언하는 작가였다. 신체와 기계를 접목한 실험실 영화가 미래를 예언하는 공간으로 정의될 때 왕빙은 주변부로부터 은폐된 인간과 공간을 발굴하기 위해 시간의 감각으로 무장한 저사양 카메라를 들고 주변을 배회했다. 이 모습은 기계화되는 사회를 역행하여 고통의 문제를 전면에서 드러내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그를 상징하는 작품 중 하나인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2013)는 중국 윈난성 자오퉁시의 한 정신재활병원을 다룬다. 병원의 구조는 치료 시설이라기보다 수용소에 가까운데, 중앙 중정을 둘러싼 사각형 건물로 파놉티콘과 유사한 감시 구조를 지닌다. 게다가 이 병원의 환자는 정신질환자뿐만 아니라 살인이나 폭력 범죄자, 발달장애인, 청원자(정부에 민원을 제기한), 정치적 이유로 수감된 사람, 가족에게 버림받은 노인, 도시에서 정신적 붕괴를 겪은 이주노동자를 포함한다. 왕빙은 이름표나 진단명으로 환자를 표기하지 않는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티티컷 풍자극>이 미국 정신병원의 학대를 폭로하고 고발하는 데 집중했다면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는 환자들과 동행하고 일상을 증언하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 구석이나 바닥에서 소변을 보는 장면, 두세명의 남성이 한 침대에서 자는 장면, 다른 이의 발을 씻겨주는 장면 등은 감시로 자행되는 비인간적 파놉티콘에서도 나타나는 인간적 유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왕빙은 병원에 수감된 인간성을 해방하는 데 관심이 있다. 관객들에게 왕빙이 투여하는 치료제는 이러한 윤리적 접근에서 나온다. 왕빙은 자신의 카메라가 누군가를 곤경에 빠뜨리도록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카메라는 고통을 재현하지 않고, 시간으로 변환한다. 프레임이 아닌 지속 속에서 윤리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그의 다큐멘터리는 감각의 윤리를 제안한다. 감시가 아닌 관찰로 관객들에게 공유하는 그의 비전은 비인간적 공간에서 유대를 감지하는 가능성을 담는 것이다.

왕빙은 ‘없음’의 문법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사회제도를 분석하거나, 심리를 평가하거나, 설명하는 보이스오버도 없으며, 외부를 조명하는 숏도 거의 없다. 이전의 과잉된 스펙터클을 포기하고 카메라가 현실로 깊숙이 들어갈 때 확보하는 영화적 성취는 도리어 고통의 감각을 넘어 시간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데 그 기능을 발휘한다. 인물의 삶을 시간으로 감각하게 하면서 왕빙은 관객에게 영화 보는 방식을 자문하고 있다. 결국 기존의 병원을 다루는 방식에서 나열한 환자의 고통스러운 비명과 일그러진 표정, 덕지덕지 묻은 혈액과 훼손된 신체는 환자가 진술하는 이야기로 대체된다. 병원은 일시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공간이 아닌 실존에 대해 담화하는 공간으로 변화한다. 왕빙은 절단과 조립이 아니라 관찰하고 발굴하며 인간성을 감각하는 공간으로 병원을 체화하고 있다.

이와는 다른 표현 양식을 활용한 병원 다큐멘터리 작품은 베레나 파라벨과 루시엔 카스탱-테일러 감독의 <인체해부도>(2022)다. 5년에 걸쳐 8개의 병원에서 촬영한 이 작품은 인체 안을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특수 제작한 “립스틱 카메라”를 사용했다. 자동차와 산업 기계 모니터링을 위해 개발된 이 카메라는 인체 내부에 있는 개별적 특이성을 관찰할 수 있도록 고안된 장치다. 또한 병원 복도를 이동하는 여러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가슴 높이에 하네스를 착용하고 수술대 위에 천장 카메라를 설치하여 실시간으로 수술 현장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여러 각도로 설치된 카메라는 4~5시간의 전립선 수술, 18시간(포함되지 않은 어머니와 딸 사이의 간 이식) 등을 기록하는 데 동원됐다. 검사와 수술을 진행하면서 의사들은 파리 부동산 가격에 대해 논의하거나, 뇌 조직이 솜사탕 같다고 묘사하며 동료들에게 주말 계획에 대해 무심코 묻는다. 심지어 레게음악이 재생되는 영안실에 있는 한 시신에 거꾸로 속옷을 입히며 웃기도 한다. 왜 영화는 평범하지만 불편한 잡담 장면을 보존하면서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일까. 의사의 무감각함은 일상을 조명하는 동시에 비인간화된 인체를 전문적으로 다루기 위한 일종의 거리 두기라는 사실을 표명한다. 왜냐하면 대상이 인간으로 인식되는 순간 사람을 절단하고 조립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감독은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통해 인체 부위를 식별할 수 없도록 만든다. 관객은 이런 인체를 식도인지 음경인지, 뇌 조직인지 장 내벽인지를 구별할 수 없다. 협곡과 강의 삼각주를 연상시키는 혈관의 망은 추상적 지형으로 관객을 교란하며 비인간적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관객의 시선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이 반복된 숏은 곧 수술실과 병원 복도와 환자들의 모습으로 연결된다. 파라벨은 “병원은 신체처럼 작동한다”라고 말하면서 시각적 운율과 내부와 외부의 순환에 대해 언급했다. 영화의 본래 제목은 16세기 해부학 서적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에서 따온 것으로 ‘해부’라기보다 ‘구조’에 가깝다. 신체를 구성하는 구조와 병원의 구조를 동시에 고려해본다면 이 영화는 ‘해부’에서 동작을 멈추지 않는다. 구조 사이를 연결하는 여러 면(병원 복도와 지하터널, 환자의 장관, 동맥, 튜브 등)을 통해 구축된 시스템을 살핀다. 이처럼 인체와 병원 사이를 연결하는 카메라가 형식을 동기화하면서 영화는 내부와 외부의 위계를 붕괴하고 유기체 자체로 기능하는 담론에 진입한다.

이 담론을 결정짓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병원 내부에 있는 어두운 지하 바 주위를 시끄러운 클럽 음악과 함께 어지럽게 도는 장면이 등장한다. 벽은 문란한 프레스코로 덮여 있다. 발기된 음경을 가진 의사들의 캐리커처, 날개 달린 가고일 같은 생물, 술을 마시고 춤추는 해골, 난교에 참여하는 의료진, 불경한 최후의 만찬으로 렌더링되어 있다. 한 비평가는 이를 “죽음과 성이 충돌하는 난교의 프레스코”라 말했다. 환자를 치료하는 신성한 공간이라 믿었던 병원 내부와 인체 내부는 성, 죽음, 영성이 결합한 공간이 된다. 생명은 임상적 지식이나 의료 오류 가능성, 노쇠한 신체의 불투명과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쾌락을 통해 복원된다.

<인체해부도>

<인체해부도>의 감독들은 촬영을 진행하면서 “이렇게 아픈 적이 없었다”라고 고백했다. 내부를 들여다볼 때 외부의 감각은 필연적으로 따라오고, 관객 또한 영화를 통해 영향을 받는다. 특히 영화관은 시각적 감각을 뚜렷하게 감응하는 공간이자 시간에 의해 소멸하는 영화의 죽음을 인식하는, 병원과도 같은 실존하는 공간이다. 병원은 우리 안의 절단된 무언가를 조립하는 일로 가득하기 마련이다. 카메라가 소유한 통제적 역량과 무관하게 영화는 프레임 밖을 뛰쳐나와 기억을 숙주 삼아 감각을 갱신한다. 영화관을 병원으로 삼는 이들은 결국 자신의 상흔을 품은 채 다시 그 밖으로 나가 자신을 통과하기를 갈망한다. 왕빙의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후반부에 한 환자가 임시 외출 허가를 받고, 카메라가 그를 따라나서는 장면이 나온다. 폐허 같은 마을과 건설 현장, 고속도로를 목적 없이 배회하는 모습에서 관객은 크게 다르지 않은 병원 안과 병원 밖을 만난다. 내부와 외부, 그리고 영화와 영화 밖의 세계는 아픔을 공유한다. 다큐멘터리는 그 기록들과 현실의 감각을 모색하면서 끊임없이 시간을 계수해왔다. 죽음을 셈하는 병원과 영화관은 모두 죽음을 지연시킨다. 병원은 신체의 파국을 늦추고, 영화는 이미지의 소멸을 유예한다. 그러나 유예는 단순한 연장이 아니다. 유예의 시간 속에서 신체는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고, 이미지는 다른 방법으로 살아남는다. <인체해부도>가 담은 내부-외부의 순환처럼, 복도와 혈관, 터널과 장관은 서로를 비춘다.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기관계이며, 그 표면을 더듬는 촉수는 인간이다. 스크린의 어둠은 동굴의 어둠과 같다. 한점의 빛이 어둠에 들어올 때 비로소 형태가 생기듯 그 빛은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감각을 준비시키기 위해 들어온다. 절단과 봉합의 반복은 상처를 지우지 않고 상처의 문법을 바꾼다. 영화관을 나서는 일은 퇴원과 닮았다. 완치가 아니라 동거, 치료가 아니라 관리, 진실이 아니라 감각의 갱신. 속이는 감각과 속는 감각 사이에서, 우리는 다시 세계를, 세계의 표면을, 세계의 깊이를 더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