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모델 벨라 킴에게 어느 날 인스타그램 DM이 왔다. <속초에서의 겨울>이라는 한불 합작 영화를 제작 중이고, 프랑스어를 잘하는 한국 배우가 필요한데 오디션을 볼 수 있겠느냐고. “실제로 속초에서 몇년 산 적 있어서 그런가. 처음엔 ‘내 뒷조사를 한 사기꾼인가?’ 싶었다. (웃음) 또 다른 속초 출신 친구가 출판사에서 일하는데 이 소식을 전하니 원작이 베스트셀러라고 하더라. 소설을 읽자마자 주인공에게 공명했다. 인간 벨라 킴이 걸어온 길이 주인공에게 그대로 보여 바로 시나리오를 요청해 오디션을 준비했다.” 벨라 킴은 20페이지에 달하는 작품 분석 PPT를 만들어 오디션장으로 향했고, 미팅 내내 제작진에게 수하와 모든 캐릭터의 관계를 하나씩 묻는 열정을 보였다. 3개월 후, 연기 경험이 전무했던 벨라 킴은 <속초에서의 겨울>의 주인공 수하로 캐스팅됐다.
수하의 몸과 마음은 냉랭하게 얼어 있다. 남자 친구 준호(공도유)와는 묘하게 말이 통하지 않고, 어머니(박미현)는 존재조차 모르는 프랑스인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대화 주제를 돌려 수하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해 겨울, 수하는 속초에 온 프랑스의 유명 작가 얀 케랑(로슈디 젬)과 자꾸만 얽히며 자신의 빙하에 조금씩 균열을 낸다. 수하가 케랑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조금씩 걸어나갔다면, 벨라 킴은 처음 경험하는 연기를 통해 영화의 세계에 깊이 매료됐다. 모델로서 카메라가 익숙했던 그에게 ‘초당 24프레임의 세계’는 “처음으로 3차원을 살고 있다는 감흥”을 선사했다. “촬영감독님이 카메라 테스트 도중 컵을 든 나에게 ‘수하처럼 마셔달라’는 디렉팅을 주셨다. 배역처럼 마시는 건 무얼까 고민해봤다. 모델로 살 때는 원두 브랜드가 보이게, 혹은 커피를 마시는 모델의 모습이 부각되는 게 중요했으니까. 수하의 자세를 고민하는 순간 나를 둘러싼 세계가 비로소 입체적으로 변했다. 카메라 안팎이 두개의 우주로 나뉜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벨라 킴은 카메라 앞에서 자유로워졌다. 순대를 꾸역꾸역 삼키다 구토하는 장면을 연기할 때도 “모델일 때는 경험한 적 없는, 원초적인 추(醜)를 표현할 수 있어” 행복했고, 연기를 통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다시 한번 긍정할 수 있었다. “중학생 때 이미 키가 175cm가 넘었고, 발 사이즈가 255mm였다. 목소리가 낮다든가 피부가 까맣다든가 아무튼 ‘한국 여자치고’ 모든 것이 평균 바깥에 있어 힘든 날이 많았다. 프랑스에 가면서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직업 특성상 거울 앞에 서면 내 몸의 구석구석을 품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하는 보디 셰이밍(신체적 특징을 비하하거나 모욕하는 행위)에 굴하지 않고 끝없이 자신의 몸을 탐구한다. 수하에게 많이 배웠다. 내가 수하에게 말을 걸기 전에 수하가 먼저 내게 손을 내민 듯한 느낌이었다.” 한편 두개의 우주는 수하 안에도 존재한다. 귀가 예민한 관객이라면 수하가 한국어 화자일 때와 프랑스어 화자일 때 성격이 달라진다는 걸 눈치챌 것이다. 바이링구얼이기도 한 벨라 킴은 두 언어로 적힌 대사에 스민 미묘한 차이를 바로 알아채고 연기에 반영했다. 가령 수하는 프랑스어를 발화할 때 훨씬 자신만만하다. “낯선 언어로 오직 둘만 소통할 수 있다는 연대의식”이 수하에게 “해방구인 동시에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통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두 언어의 뉘앙스 차이는 벨라 킴이 수하를 이해하는 중요한 도구이기도 했다. “한국어는 가족이 존재 유무의 개념이다. ‘가족이 있다’ ‘가족이 없다’로 말하니까. 처음엔 아버지가 없는 수하를 연민했다. 그런데 수하는 자기 연민이 없어 신기했다. 생각해보니 프랑스어와 영어에선 가족은 소유의 개념이라 프랑스어에서는 ‘Avoir’, 영어로는 ‘Have’ 같은 동사를 사용한다. 그렇게 본다면 수하는 아버지를 ‘가져본’ 적 없는 것 아닌가.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존재에 대해 수하가 결핍이나 상실을 느끼진 않을 것 같았다.”
벨라 킴은 데뷔작 <속초에서의 겨울>로 한국인 최초로 내년에 열릴 세자르상 신인여우상의 1차 후보에 들었다. “최종 후보 발표보다 세자르상이 신인상 후보에게 제공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이 기대가 된다”는 벨라 킴은 이자벨 위페르, 상드린 키베를랭 등과의 교류를 신청한 후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벨라 킴에게 영화는 알수록 궁금한 존재다. 인터뷰 당일에도 <씨네 21>스튜디오에 질 들뢰즈의 <시네마>해설서를 가져와 읽던 그는 발터 베냐민, 세르주 다네 등을 언급하며 영화이론 공부의 즐거움을 말했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만날 수 있는 누벨바그 영화의 찬란함을 강조했다. 그래도 지금 벨라 킴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영화 연기’다. “프랑스에 돌아가면 세자르상 남녀 신인 후보 32인과 단편영화를 찍는다. 또 내년 1월엔 물리학과 사랑을 엮은 멜로영화의 주연배우로 촬영에 들어간다. <속초에서의 겨울>처럼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 무조건 하겠다고 밝힌 작품이다!”
filmography
영화
2024 <속초에서의 겨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