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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의 해상도를 높이면] 운전대를 잡은 토끼, <주토피아2>

장장 20년 만의 귀환. <토이 스토리 4>와 함께 돌아온 보핍의 첫인상은 우디의 아름다운 연인이자 앙증맞은 하늘색 원피스가 잘 어울리던 양치기 소녀와는 사뭇 달랐다. 흘러간 시간만큼 많은 게 변했다. 날렵한 망토와 점프슈트는 신체적 가동성을 우선시했고, 부러진 팔 정도는 반창고로 무심하게 이어 붙인다. 중고숍에 팔린 보핍은 어린이들이 와주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에서 벗어나고자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장난감의 운명이란 얼마나 제한적인가. 인간이 나타나는 순간, 일동 정지. 어린이들을 만나기도 전에 모든 동작을 멈춰야만 한다. 외로운 인형은 오랜 고민 끝에 자유로운 길거리 생활을 선택했으나 여전히 모든 게 부자유스럽다. 그리고 여기 스컹크 미니카가 있다. 버려진 미니카를 개조하고 그 위에 스컹크 인형을 덧씌워 마치 진짜 스컹크가 걸어다니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영리한 보핍은 미국인들이 기피하는 그것을 손수 만들어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이동할 수 있도록, 그래서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어린이들을 마음껏 만날 수 있도록 삶을 주체적으로 디자인했다. 이제 보핍의 선택은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든 운전대 앞에서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가면 그만이다.

9년 만에 다시 돌아온 <주토피아 2>는 이번에도 동물들의 대도시 ‘주토피아’를 중심으로 도시 행정과 정치적 음모, 정책의 사익화를 고발한다. 어느 날 사고 현장에서 우연히 뱀의 비늘을 발견한 주디는 주토피아에서 살 수 없는 유일한 종족, 파충류가 도심에 잠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종의 경찰관 중 가장 먼저 상황을 판단한 그는 뱀이 찾는 서적이 전시된 연회장에 남몰래 잠입하기로 결정한다. 작은 밴을 타고 닉과 파티 장소로 이동하는 중, 닉이 말한다. “꼭 운전은 네가 하더라.” <주토피아> 세계관에서 작디작은 토끼 경찰 주디는 오랫동안 과소평가의 늪에 빠져 있었다. 경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도 주어진 업무란 고작 불법주차를 점검하는 것이었고, 주디가 딱 한번 눈물 지었을 때 닉이 한 말은 “너희 토끼들은 정말 감성적이야”였다. 중요한 사건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도 동료들이 믿어주지 않아 그것을 증명하는 단계부터 거쳐야만 할 때도 있었다. 토끼의 삶은 정말이지 너무나 수고스럽다. 그렇기에 운전대를 잡는 행위는 주디에게 특별할 수밖에 없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느 정도의 속도로 갈 것인가, 어떤 경로를 고를 것인가. 타인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던 그에게 모든 과정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은 운송수단 안에 있었다.

<주토피아 2>는 툰드라 지역 확장으로 탄압받은 파충류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는 제일 먼저 소수자의 입장을 찾아 떠난다. 닉과 주디는 빼앗긴 시간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비버 니블스의 차를 얻어 탄다. 그리고 도착한 습지 시장에서 이번에는 기울어진 난파선에 입장하기 위해 바다코끼리의 수상택시를 얻어 탄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 지워진 이야기를 듣기 위해 두 콤비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운전을 할 줄 아는 (심지어 잘하는) 주디는 기묘하게도 운전대 앞에 서지 못한다. 두 경찰관에게 로드무비처럼 펼쳐지는 수사 과정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동성이지만 영화 초반부터 앞세웠던 이동 주도권은 주디에게 없고, 그보다 운 나쁜 저주에 걸려버린 듯 반복되는 갈등만 맞닥뜨릴 뿐이다. 주디는 파트너와 심각한 말다툼을 했고, 마취총에 맞아 남의 오토바이 위에서 기절해버렸고, 기후 장벽에 대한 진실을 목도했지만 어떠한 힘도 쓸 수가 없다. 운전대와 멀어지자 모든 일은 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한편 진실과 은닉 사이에서 지난한 혈투를 벌이다 마침내 주디가 다시 운전대를 잡은 순간은 모든 불화와 충돌이 말끔히 용해된 뒤였다. 도심을 뒤덮은 비리와 음모에 대한 진실을 깨닫고, 게리 더 스네이크와 죽음의 문턱을 나눠 가졌던 절체절명의 순간. 서로의 몸을 배배 꼬아 끌어안은 뒤 파충류와 포유류가 서로의 유일한 온혈 친구가 되어준 애틋한 순간. 그제야 비로소 주디는 운전대를 손에 쥘 기회를 잡는다(심지어 등 뒤로 비버, 뱀, 여우까지 태우고서). 더구나 탄압과 핍박을 견뎌온 소수자 게리 더 스네이크의 목소리 연기를 배우 키 호이 콴이 맡으면서 절망 섞인 장면의 애수는 더 높아진다. 마치 게리의 고독을 이민자 출신의 키 호이 콴이 증명하듯,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웨이먼드가 이들의 슬픔을 해체하듯 게리와 주디의 화학작용은 더욱 증폭된다. 이제 막 대도시로 상경해 냉동 당근을 전자레인지에 조리하던 어린 토끼의 유약한 마음은 다음 토끼를 위해 버티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지지되어 결국 오늘에 이르렀다. 이 말은 시종일관 여유로운 닉과 달리 융통성이 없어 보일지언정 정의를 부르짖어야만 하는 정치적 이유가 주디에게만큼은 명확하게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주디의 굳건한 의지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향할 수 있는 자율성, 즉 운전대로 은유된다.

영화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때 마지막 자동차를 운전한 것은 다름 아닌 닉이다. 왜 주디가 아니고? 게다가 닉의 운전 솜씨는 영 마뜩지 않아서 주디가 “진짜 운전 못한다”는 농담까지 던진다. 갑작스러운 운전자 교체는 아마도 닉과 함께 서로의 결함(불안, 회피, 열등감, 기피, 두려움 등)을 쏟아내듯 고백한 뒤, 주디는 이동 주도권이 이제 혼자가 아닌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고 깨달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닉과 모든 것을 나눠 갖는다거나 자신의 독립성을 약화시킨다거나 개인을 지운다는 의미는 아니다. 잊혀진 아틀란티스처럼 폐허가 돼버린 파충류의 도시를 발견한 여우와 토끼는 역설적으로 서로에게 동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로지 자신으로 혼자 서 있어도 괜찮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서로 다른 두 친구에게 언젠가 반드시 갈등이 또 찾아오겠지만 그럴 때면 다시 이렇게 말하면 된다. “서로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은데?”(Agree to disag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