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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다른 나라에서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암살>의 밀정 염석진(이정재)은 왜 동지를 팔았는지 다그치는 안옥윤(전지현)에게 호소한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을 덧붙인 팩션(fact+fiction)이지만 이 장면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염석진의 억울함에는 바로 엊그제 뉴스에서 들었던 것 같은 기이한 실감이 묻어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마도 염석진의 발언이 현재진행형의 변명이기 때문인 것 같다.

2025년 대한민국에서도 무수히 많은 염석진들을 마주한다. 이들은 대단히 사악하거나 비겁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이성적, 합리적인 범주에 속하며 주위의 인정을 받는 유능한 인재에 가깝다. 일제강점기 ‘염석진’과 2025년의 ‘염석진’을 잇는 공통점이 있다면 단연 적응력이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상황에 빠르게 순응하며 변화하는 생존의 기술이라고 해도 좋겠다.

한때는 그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좀 달라졌다. 부끄러움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공간, 같은 시대를 산다고 믿지만 실은 각자의 우주와 세계 속에서 따로 산다. 따로 살면서 무리를 짓기 위해선 규칙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가 채택한 민주주의가 세운 규칙은 단순하다. 나와 다른 가치관을 지닌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적대하는 상대를 물리력으로 강제하는 대신 약속된 수단으로 설득하고 토론하고 쟁의하는 제도. 그리하여 최선보다 차악을 고르는 안전장치가 민주주의다.

2024년 12월3일, 민주주의가 파괴될 위기를 겪은 지 1년이 지났다. 벌써 1년, 아직 1년. 사람마다 시간의 속도가 다를 것이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민주주의 붕괴의 위협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우리가 각자의 욕망에 헌신하는 사이 2025년의 ‘염석진’들은 강렬한 자기암시와 함께 변화된 상황에 빠르게 적응을 마쳤다. 해나 아렌트는 사유하지 않고 침묵하는 다수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악의 평범성을 언급했지만 이제 문제가 좀 달라진 것 같다.

2025년의 염석진들은 자신이 염석진이란 사실 자체를 망각했다. 현실을 논하며 수많은 합리적인 이유를 내세우지만 정작 이들의 중심은 텅 비어 있다. 일제강점기의 염석진들이 생존을 명분으로 부끄러움을 감췄다면 2025년의 염석진들은 부끄러움의 기준을 아예 수정해버렸다. 친일의 밀정부터 내란의 부역자들까지 여전히 정리되지 못한 현재진행형인 상황에서, 좌우 정치적 변화에 따라 표류하는 서울영화센터의 갈짓자 행보를 보며 문득 한편의 영화를 더 떠올린다. 영화 <동주>에서 정지용 시인은 윤동주에게 말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것이지.” 서울영화센터를 둘러싼 논란을 총정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종사자보다 부역자들이 더 혐오스럽다. 기억이 희미해질 때 명료한 기록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