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보>에 나오는 첫 가부키 <세키노토>(국경의 관문). <세키노토>는 눈 덮인 오사카 산의 관문과 기묘하게 만개한 한 그루 벚나무를 배경으로 한 도키와즈(常磐津) 무용극이다. 무대를 벗어난 두 배우가 복도에서 연기를 이어갈 때 절묘하게도 그 후경엔 눈이 내리고 있다. 마치 가상의 이야기 속 무대가 현실에 확장 구현된 듯한 이 눈은 분명 아름답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 키쿠오 역시 아버지의 죽음을 이 눈과 함께 뇌리에 새길 테지만, 그리고 훗날 만키쿠의 무대에서 흩날리는 종이 눈을 보고 ‘처음 보는 풍경’을 쫓기 시작할 테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서 눈은 그저 눈이다. 관객은 투명한 문 너머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세키노토>와 느슨하게 연결해 바라볼 뿐이다.
아직 아무런 의미도 덧붙여지지 않은 이 새하얀 눈이야말로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이라면 이상한 말일까? 우리는 이후 자연에서 내리는 이와 같은 순수한 눈을 보지 못하며,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가짜 눈은 이같은 감흥을 주지 못한다. 오프닝 이후 영화에 나오는 눈은 하나둘 종이 눈이나 인물의 내면이 만들어낸 상상의 이미지로 대체된다. 어쩌면 그것은 키쿠오에게 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이 점은 영화가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서사 전체에서 중요하게 기능한다.
시선과 행동
<국보>는 인물관계를 직접적인 대사나 설명보다 미세한 시선과 행동으로 그린다. 키쿠오와 하루에의 관계는 섹스 이후 결혼을 제안하는 키쿠오의 말에 하루에가 “후원자가 되겠다”고 얼버무리는 순간 이미 금이 간다. 집을 떠나는 키쿠오를 바라보지 않는 하루에의 태도는 이들이 이어질 수 없음을 조용히 암시한다. 훗날 하루에가 슌스케를 따라나서는 갑작스러운 결정도, 사실 이 시점에서 이미 필연적으로 예정된 선택이었기 때문에 그 동기는 질문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키쿠오가 아키코와 맺는 관계도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아키코는 옥상에서 “대체 어디를 보는 거냐”라는 의미가 불분명한 질문을 던지는데, 이는 키쿠오의 내면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그는 언제나 눈앞의 사람이 아니라 예술적 이상향 혹은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인물이다. 중요한 것은 아키코가 이 사실을 여행 도중 깨닫는 것이 아니라, 교토 집 앞에서 키쿠오와 슌스케가 다투던 때부터 이미 표정으로 예감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키코와 키쿠오가 겪는 여정은 이미 알고 있는 파국을 확인해가는 절차에 가깝다. 영화는 인물들이 돌발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결정을 내리는 이유보다, 그 결정이 이미 의미를 잃은 상황 자체를 관객에게 은근히 제시한다. 우리가 오프닝을 바라볼 때 문득 후경에 내리는 눈을 이미 가슴 시리게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이치로.
안타까운 것은 영화가 이러한 우아한 구조를 일관되게 유지하지 못하며 무너진다는 점이다. 이는 감독이 인터뷰에서도 언급한 온나가타(여성 역할을 연기하는 남자배우)의 ‘그로테스크함’을 영화에서 다루지 않으려 회피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온나가타의 그로테스크함과 아름다움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다. 작중에서도 “예술은 무기처럼 위험한 것”이라는 대사를 통해, 혹은 키쿠오와 슌스케가 만키쿠의 연기를 보며 말하는 “무섭다”, “괴물 같다”, “아름다운 괴물” 같은 표현을 통해 드러난다. 그런데도 영화는 좀체 가부키에 내재한 양가성이라는 테마를 밀어붙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유년기 만키쿠의 무대에서만 등장하는 과도한 줌 버스트와 셰이키 캠 효과는 다른 가부키 장면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처음에는 이 튀는 연출이 가부키의 무서움을 드러내려는 시도인지, 혹은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장치인지 모호하지만 결말에 이르면 영화 전체가 후자에 수렴되며 작품의 긴장감을 약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 연장선상에서 발생하는 치명적인 장면이 엔딩 직전 등장하는 키쿠오와 사생아 딸이 나누는 대화 신이다. 사생아 딸은 별안간 사진가로 등장해 평생 원망한 아버지의 무대에 감화됐다고 고백하지만, 이 캐릭터와 대사가 서사적으로 수행하는 기능은 끝내 명확하지 않다. 키쿠오의 고독(영화 속 대사를 빌리자면 ‘인간 국보로서의 서글픔’)을 강조하려는 장치로 보기엔 근거가 부족하고, 그가 국보로 완성되는 길목에서 억지 감동을 덧씌우기 위한 멜로드라마틱한 장면에 가깝다. 심지어 이 모든 과정이 지나치게 질질 끄는 대사를 통해 수행되는데, 이는 영화가 스스로 쌓아올린 양가적 테마와 맞물리지 않는 부분으로, 오히려 복잡한 감정의 결을 단순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차라리 사생아 딸과 나눈 대화가 꿈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주인공의 슬픔과 고독함은 더욱 부각됐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장면을 꿈으로 바라볼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 당황스러운 조우에 이어 펼쳐지는 엔딩 신. 새로운 인간 국보를 선보이는 무대에 내리는 종이 눈은 아름답지만, 오프닝의 눈처럼 아름답지는 않다. 마지막 눈은 영화가 끝내 탐구하지 못한 테마를 덮기 위한 시각적 장식에 불과하다. 늘 쫓던 풍경이 종이 눈으로 무대 위에 구현되자 키쿠오는 고개를 들어 조명이 비치는 위를 바라본다. 그때 그는 하루에나 아키코가 미래를 예감했을 때 짓던 것과 비슷한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과연 자신이 쫓던 풍경을 보았을까, 보지 못했을까? 궁극적으로 그 풍경은 그토록 가치 있는 것이 맞았을까?
영화가 질문하지 않을 때
함정은 영화 스스로가 이 질문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관객은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그의 얼굴을 보며 손쉽게 작품에 감동하고 만다. 키쿠오의 얼굴을 비추는 마지막 숏에서 영화는 가부키의 양가성- 아름다움과 공포, 숭고함과 그로테스크함- 을 충분히 사유하기보다, ‘수난극’을 견뎌낸 이 얼굴을 숭배의 대상으로 제시하며 복잡한 질문을 봉인해버린다. 나는 가부키를 단지 아름답게만 그리는, 사생아 딸과 가부키의 세습 전통에 냉소적이던 타케노 같은 인물마저 조용히 전향시켜 “저런 삶이 있다니” 같은 말을 읊조리게 만드는, 가부키 무대를 신비화하고 박제해 박물관에 처박아버리는, 예술을 대중과 동떨어진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런 엔딩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다.
<국보>는 인물의 선택과 운명, 예술의 양가성에 관한 복합적 질문을 던지려는 의지를 갖고 시작했으면서도 그 질문에 끝까지 책임지는 대신 아름다운 이미지의 스펙터클에 투항한다. 오프닝의 눈이 품고 있던 섬세한 미학적 약속을 스스로 완성하지 못한 채 멈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품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아름다움의 의미에는 도달하지 못한 실패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