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같은 패턴으로 한해를 마감한다. 머릿속으로는 차분히 1년을 되돌아보는 고요하고 우아한 시간을 꿈꾸지만, 현실은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정리 안된 트리 장식마냥 슬그머니 늘어가는 업무에 쫓겨 우당탕탕이다. 연말이나 새해처럼 점을 찍을 수 있는 전환의 날이 되면 막연한 기대가 샘솟는다. 이날만 지나면 마법처럼 새로운 생활이 펼쳐질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감에 취한다.
물론 현실에 마법은 없다. 변하고 싶다면 하루하루 꾸준히 쌓아가는 게 전부다. 다만 마법 같은 마술은 가능하다. 마술의 이름은 ‘되돌아보기’다. 하루아침에 새로운 내가 되긴 어려워도, 긴 호흡으로 거리를 두고 보면 오늘의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짬이 없어도 일부러, 우아하진 않아도 틈틈이 2025년을 곱씹는다.
되돌아보니 올해 사적으로 가장 큰 일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다. 경황없이 지나고 보니 어느새 장례가 끝나버렸는데, 다들 시간이 지나면 슬픔이 몰려올 거라 했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사람 좋아하고, 가족에겐 박한 전형적인 경상도 사내였던 아버지와는 별다른 추억이 없었고 사이도 냉랭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지난주 무비랜드에서 팀 버튼 감독의 <빅 피쉬>(2003)를 다시 보며 이야기 나눌 시간이 생겼고 행사 후 돌아오는 내내 기억 속 아버지를 곱씹어보았다.
아버지가 떠나셨으니 이젠 그를 온전히 이해할 기회는 사라졌다. 그저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우린 이해하지 못해도 공감할 수 있다. 이해와 공감은 인과관계로 연결된 선후의 스토리가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의지다. GV에서 무비랜드 모춘님이 던진 질문은 2026년의 숙제가 될 것 같다. “영화를 더 재밌게 즐기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영화 주간지를 만드는 유일한 목적이 아마도 저 질문에 있지 않을까. <빅 피쉬>를 다시 본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란 겪어보지 못한 기억을 추억하는 시간이다. 나는 아버지를 한번도 이해한 적 없지만 (영화를 경유하여) 이젠 그가 남긴 어떤 표정들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가 상대를 나의 세계로 끌고 들어오는 과정이라면, 공감은 내가 상대의 세계로 뛰어드는 (애정을 바탕에 둔) 용기다. 머리로 납득 불가능해도, 설사 그 삶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어도, 함께 눈물 짓고 연민하며 웃음 지을 순 있다. 공감은 마치 근육 같다. 시도할 때마다 감정(의 에너지)은 소모될지 몰라도 그만큼 무언가 차오르는 걸 느낀다. 그렇게 늘어난 마음들을 믿고 기꺼이 당신의 세계로 뛰어들 때, 세상은 한뼘 달라진다. 새로워질 기회를 얻는다. 그 과정이야말로 (되돌아보는) 연말이 (변화를 희망하는) 새해에 건네는 선물이라고 해도 좋겠다.
2025년 끝자락에 서서 작은 소망을 밝힌다. 나는 영화가, 영화감상이, 공감의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2025년의 한국영화를 돌아보니 침체된 시장과 줄어든 관객을 두고 흉흉한 이야기만 나오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정확히는 다른 관점, 다른 현실도 존재한다. 2025년만큼 여러 방식으로 애쓰고 다방면으로 고군분투했던 시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좋은 작품들도 많았다. 다만 이 작은 빛들은 아직 애정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정성껏 말을 걸어야 응답을 해준다. 연말마다 1년을 다시 되돌아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디 2026년에는 영화의 희미한 빛도 놓치지 않을 만한 너른 시야를 갖출 수 있길. 낯선 영화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 수 있도록 공감의 근육도 부지런히 키워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