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승패가 아니야. 실력과 태도지.” 서바이벌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시즌 1에 출연했던 50년 경력의 대가 여경래 셰프가 전한 후일담은 동서고금 분야를 막론하고 통용되는 진리다. 물론 영화사 별자리에 수놓인 스타들처럼 잊을 수 없는 한 작품, 한 장면, 한순간을 통해 영원으로 기억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반짝이는 재능을 넘어 자신이 해야 하는 일, 직업으로서의 소명에 충실한 이들이 걸어온 길은 그 자체로 무엇으로도 대체하거나 모방할 수 없는 존재 증명이 된다. 요 며칠 존경받는 영화계의 별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69년 연기 경력의 국민 배우 안성기와 헝가리의 시네아스트 벨러 터르의 타계 소식을 들으며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을 마주한다. 한 시절, 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안성기는 영화배우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다. 담백한 두 문장 외에 그가 걸어온 세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윽고 두 문장이 자연스럽게 한 사람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존경과 헌사의 꽃이 피어난다. 1957년 데뷔 이래 한국인의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역할을 연기한 그의 경력은 그 자체로 한국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영화배우로서 안성기만큼 곧은 심지를 가지고 흔들림 없이 자신의 ‘직’과 ‘업’을 수행해온 이가 또 있을까. 작품이 많은 만큼 완성도의 편차가 있을지언정 한편 한편에 담긴 태도와 진정성은 일관된 방향으로 세월을 관통한다. 국민 배우의 삶과 영화 인생이 끊임없이 회자되고 재발견되어야 마땅한 이유다.
한편 위대한 시네아스트 벨러 터르는 말했다. “영화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수단이다.” 벨러 터르를 진정 위대하다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이 말을 지키고 증명했기 때문이다. 위대함에 다다르는 경로는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그 길을 걸어가는 동력은 단 하나다. 스스로 믿는 바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 그리하여 하루하루의 태도가 쌓여 뒤돌아보면 지나온 궤적이 어느새 유일해진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제작을 배우지 말고 삶과 인간관계를 먼저 이해하고 공부해야 한다”던 벨러 터르의 결기, 타협하지 않았던 행보가 문득 국민 배우의 단단했던 심지와 겹쳐 보인다.
바야흐로 이별의 계절이 왔다. 한 시대를 온전히 담았던 하나의 삶이 우리 곁을 떠나는 중이다. 어디선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돌이켜보니 안성기 배우의 겸손과 헌신에 관한 미담은 넘쳐나서 어느새 흔하고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언제나 그렇듯, 사라진 뒤에야 부재를 통해 그 크기와 위대함을 실감한다. 1996년 <잠자는 남자>의 주연으로 안성기 배우를 캐스팅해 호흡을 맞췄던 일본 감독 오구리 고헤이는 그의 조문을 위해 한달음에 한국까지 날아와 이렇게 회상했다. “안성기. 있어야 할 모습으로, 늘 거기에 있던 사람.”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영화 인생을 살았던 배우와 감독에게 영화 <바빌론>속 칼럼니스트 엘리노어의 대사를 빌려 작별의 인사를 전한다. “당신이 죽어도 당신이 나오는 영화를 재생시키는 순간, 당신은 그 안에서 몇번이고 살아날 거야. (중략) 당신의 시대는 갔지만 당신은 천사와 유령들과 함께 영생을 사는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