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스럽다. 익숙했던 질서가 무너지고 20세기 후반 짧았던 평화의 끝이 보이는 것 같다. 도처에서 학살이 자행되고, 다시금 약육강식의 패권을 숭상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위선마저 걷어치우고 옳다고 믿었던 상식들이 배신당하는 순간, 이깟 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가 든다. 감사하게도 (동시에 원망스럽게도) 그때마다 나를 붙들어주는 영화들이 있다. 마침 4K 리마스터 버전으로 돌아온 에드워드 양 감독의 유작 <하나 그리고 둘>도 그중 하나다.
결혼식에서 시작해 장례식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3대에 걸친 가족구성원이 겪는 여러 사연을 담는다. 프리즘처럼 각각 흩어진 사연들을 응집시키는 건 8살 소년 양양이 손에 든 카메라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소년이 카메라를 든 이유가 참 멋스럽다고 생각했다. 양양은 어느 날 아빠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우연히 옆집 여성을 마주친다. 양양은 한눈에 그녀의 우울을 알아차리지만 아빠는 도통 모르는 눈치다. 소년은 묻는다. “아빠가 보는 걸 나는 못 보고 내가 보는 걸 아빠는 못 봐요. 둘 다 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아빠는 답한다. “그래서 카메라가 필요한 거야.”
2000년 개봉했던 <하나 그리고 둘>의 재개봉을 기념해 한국을 찾은 가와이 신야 프로듀서를 만났다. 그는 에드워드 양과 작업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20세기의 끝자락과 21세기의 시작점에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 되길 바랐다는 것이다. 그의 바람처럼 이 영화는 카메라에 담긴 정물, 정지된 시간을 통해 우리가 놓치거나 잊어버리는 것들을 일깨운다. 대단한 비밀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혼자서는 보지 못할 것들을 카메라에 담아 보여준다. 카메라는 외눈박이지만 두눈을 가진 우리가 놓친 것들을 보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하여 영화는 “3배의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하나 그리고 둘>의 원제 <一一>는 하나와 하나, 즉 개인을 강조한다. “이 영화는 탄생부터 죽음까지, 각각의 삶을 바라보려는 단순한 시도다. 삶이란 결국 개인의 시선, 개인의 순간을 통해서 드러난다.” 에드워드 양 감독이 남긴 말은 영화의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 포괄한다. 하나의 삶, 하나의 시선. 그렇기에 카메라는 내가 보지 못한 타인의 시선을 담아내는 힘이 있다. 덕분에 타인을 이해할 기회를 얻고, 그리하여 세계는 넓어진다. 하나에 하나가 더해져 다시, 하나가 되는 힘. 우리가 영화를 함께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 그리고 둘’이라는 제목도 근사하지만 아무래도 원제에 더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소년 양양은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이별의 편지를 낭송한다. “할머니, 미안해요. 제가 할머니한테 말씀을 안 드린 건, 할머니는 뭐든지 다 알고 계신다고 생각해서였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할머니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나이가 들면서 확실해지는 게 하나 있다. 점점 더 모르는 게 많아진다는 거다. 왜 이렇게 됐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 여전히 알 수 없다. 변하지 않는 것도 딱 하나다. 살아 있는 모든 건 변한다는 사실이다. 안성기 배우의 표지와 특집을 준비하면서 새삼 생각에 잠긴다. 어쩌면 영화란 변하지 않는 존재가 된 이들이 변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닐까. 스크린에서 영원이 된 이들을 기리며, 이번주도 다음주도, 또 그 다음주도 우리가 보지 못할 우리의 뒷모습을 대신 찍어준 영화들을 소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