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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세계냐 여자냐, 이연숙(리타) 평론가의 <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

<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

물론 <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이하 <플루리부스>)는 흥미로운 철학적 질문으로 가득한 드라마다. 그렇지만 정체불명의 외계 신호가 인간의 기술을 매개로 바이러스 형태로 전파되어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의 고유한 의식을 하나의 단일한 네트워크로 통합하는 와중에 어째선지 세상 성격 더러운 우리의 주인공 캐롤만이 이런 시도에 면역이 있어 참으로 불행하게도 혼자서만 깨어 있게 되었다는 설정 자체에는 솔직히 말해 별로 특별하다 할 만한 구석이 없다. 아무리 캐롤이 헤테로 로맨스 판타지 소설로 돈을 버는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백인 중년 레즈비언이라 해도 말이다. 그렇기에 이런 짧은 설명에서조차 우리는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오는 하위 장르의 친척 참조를 쉽게 발견한다. 이를테면 <플루 리부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가장 많이 끼쳤다고 언급되는 고전 신체 강탈 영화 <우주의 침입자>나 인간 종의 ‘진화’를 다룬 정전 반열에 오른 SF소설 <유년기의 끝>이 대표적인 예시다. 인류 절멸의 위기에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주인공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게임 원작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나 영화 <나는 전설이다>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67년생 미국 작가 빈스 길리건이 참조했을 리는 만무하나 ‘인류보완계획’으로 널리 알려진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또한 팬덤에선 줄곧 회자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젠 ‘밈’으로 널리 알려진 “하나가 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란다”라는 애니메이션의 대사로부터 융합의 ‘행복’ (euphoria)을 말하는 드라마의 징그러운 ‘웃음 얼굴 :)’들을 겹쳐 보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캐롤, 우리와 함께 해요 :).” 알다시피 ‘웃음 얼굴’의 의미는 수동 공격이다.

프로이트가 대양 같은 감정(oceanic feeling)이라 부른 자아 상실의 희열은 본래 초월적 대상과 일체감을 느끼는 종교적 심리를 정의하고 이를 비판하기 위해 등장했다. ‘나’를 압도하는 신적 대상과 “하나가 되는” 일체감은 프로이트가 보기에는 문명 전체에 잠재적 위협을 가할 정도로 위험한 감정이나 정확히 같은 이유로 매혹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특히 매일 나빠지기만 하는 오늘날과 같은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우린 그냥 캐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라는 ‘하이브 마인드’(Hive mind)의 부드러운 애원이 결국 ‘나’라는 고유 인격의 말살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드라마의 선조 격인 <우주의 침입자>에 등장하는 대사처럼 모두가 하나기에 “혐오도 사랑도 없는” 그런 ‘중성적인’ 세계가 궁금하다 느끼는 관객이 나뿐만은 아닐 테다. 단지 인생에서 자유라는 이름으로 강제 급여되는 거지 같은 선택들을 억지 소화하는 일에 질렸다는 이유로 말이다. 여러 유사 작품 가운데서 <플루리부스>가 보여주는 개성의 일부는 이와 같이 기존 신체 강탈 장르가 오직 공포(terror)로만 다룬 자기의식의 박탈이란 ‘나쁜’ 상황을 느린 전개 속도를 통해 거의 협상 가능한 생활 조건처럼 태연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마치 동의를 구하는 콜센터 직원의 음성처럼 친절하게 주어지는 그런 조건의 장막을 걷어내고 나면 우리는 이 넓은 우주에서 의식이란 정말이지 우연처럼 생명체에 내린 기적 또는 “저주”나 다를 바가 없다는 뼈가 시리도록 싸한 진실 한줌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플루리부스>가 제기하는 시뮬레이션을 가동하기 위해 어디 멀리 나갈 필요는 없다. 당장 일론 머스크를 포함한 우리 시대 가장 유독한 인물들인 실리콘밸리의 억만장자 남성들이 기술 발전을 급진 가속시켜 현생 인류를 보다 나은 의식과 통합하여 종적 ‘전환’(conversion)의 임계점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실제 상황을 고려하면 무슨 외계 존재가 도넛을 유통 경로 삼아 자기 확장을 거듭해 나간다는 마치 거대 프랜차이즈 신화처럼 들리는 <플루리부스>의 초기 전개는 거의 순진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이브 마인드와 같은 통합 의식은 이미 AI 알고리즘을 통해 미래에서 현재로 도래하고 있다. 이제 장르로서 SF는 마크 피셔가 선언했듯 우리에게 가능한 리얼리즘의 유일한 양태다. 그렇기에 <플루리부스>가 많은 관객에게 거대 테크 기업이 인간 영혼을 채굴하고 변형하고 통제하는 이른바 “감시 자본주의” 시대에 관한 우화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

하지만 드라마는 결코 <블랙 미러> 같은 SF 시리즈가 그러듯이 심각한 얼굴의 예언자적 태도로 이에 관해 ‘경고’하지 않는다. 오히려 드라마는 존재의 무료 옵션에 불과한 ‘나’의 장식 같은 자기의식에서 비롯되는 문제- 그러니까 종적 절멸 이후에는 우주에서 더는 어떤 비존재도 궁금해하지 않을 극히 개인적인 문제에 주목한다. 그건 바로 연애 사건이다. 아니 강조컨대 나에게는 이런 명작 드라마를 통속 레즈비언 드라마로 ‘다운그레이드’ 시키려는 악한 의도가 없다. 단지 나는 캐롤이 그의 정확한 이상형 외모를 하고 있는 안내자 조시아, 아니 정확히는 조시아의 몸을 빌린 하이브 마인드와 맺고 있는 레즈비언 로맨틱 관계가 전개되는 과정이 드라마의 부수적인 재미가 아니라 필연적인 개성을 형성하는 핵심이라 주장하고 싶을 뿐이다. 왜냐하면 섹스-연애-동거의 루트를 따르는, 정말이지 지겹도록 전형적인 둘의 레즈비언 관계가 실은 결코 둘‘만’의 관계가 아니라는 따끔거리는 사실이 캐롤의 ‘세계관’- 또는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이 주인공 소년의 심리가 곧 세계의 존망과 연동되는 장르의 이름을 따라 말하자면 ‘세카이’(セカイ)에 치명적인 변수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말 그대로 개인적인 것이 곧 행성적인 것이다. 실제 캐롤의 분노는 마치 데이트 폭력을 인류 단위로 확장한 것처럼 조시아를 포함한 수백만에 달하는 하이브 마인드 개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력으로 작용한다. 해적 소설을 쓰는 성격 파탄 작가 캐롤에겐 능히 그럴 힘이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캐롤의 조시아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그래서, 도대체 이런 모든 것들이 의식도 자유도 잃은 채로 육체의 감옥 아래 고통받고 있을 인류 전체의 영혼과 대관절 무슨 상관인가? 물론 이건 마누소스의 이론이다. “캐롤 스투르카, 세상을 구하고 싶어 아니면 여자를 가지고 싶어?” 시즌 피날레에서 제기된 그의 질문은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동성애자 ‘전환’ 치료 캠프를 경험하고 레즈비언으로 살아남은 캐롤에게 공적 정의와 사적 욕망은 처음부터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양자는 양립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마누소스의 희망과는 달리 인간 종은 이미 끝장났는지도 모르지만 캐롤의 레즈비언 연애는 이제 시작이다. <플루리부스>가 제기하는 모든 쓸 만한 철학적 질문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