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멘탈 밸류>에서 아버지 구스타프(스텔란 스카르스가르드)가 십수년 만에 집을 방문한 이유는 딸 노라(레나테 레인스베), 아그네스(잉가 입스도테르 릴레오스)와 함께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다. 이혼 전부터 잦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찰은 어느 순간 간만에 재회한 노라와 아버지 사이로 옮겨간다. 구스타프가 15년의 공백을 깨고 준비 중인 자신의 신작에 노라가 출연해줄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시나리오를 펴보지도 않은 채 딸은 일찍이 자리를 뜬다.
단절이란 주제, 형식적 실험은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이 꾸준히 시도해온 것이다. 사랑의 이별부터 어쩌면 단절의 가장 극단적 형태일 죽음, 죽음을 앞뒀거나 자살 시도를 하는 인물들 또한 극에 자주 등장시킨다. 죽음을 서사의 마침표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역으로 되짚는 시작점이자 주변의 변화를 유도하는 촉매제로 활용한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센티멘탈 밸류>에서 그렇듯 타인의 죽음은 그의 공석과 관계의 빈틈을 인지할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다.
단절의 이미지
필모그래피 초기엔 관계의 단절과 죽음에 대한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의 접근법이 지금과 달랐다. 단편 <프록터>(2002)에서 평범했던 찰스 프록터(존 조이스)의 퇴근길은 화염에 휩싸인 주차장의 차 한대를 발견하는 것으로 완전히 뒤바뀐다. 찰스 뒤편엔 현장을 향해 배치된 캠코더가 있었고 한 남자가 분신자살을 시도하기까지의 하루가 기록돼 있었다. 찰스는 남자 외에 비디오에 등장하는 유일한 사람, 금발의 소녀를 찾아가 그의 정체에 관해 묻는다. 그러나 소녀 역시 스쳐 지나간 행인에 불과했으며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 채 찰스는 절망한다. 찰스는 끝내 비디오를 경찰에 제출하지 않는다. 단편 <피에타>(2000)는 친구 제이콥의 자살을 목격한 줄리안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제이콥의 어머니 레베카는 아들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대신 매일 가던 미술관에 들른다. 줄리안은 그녀를 보며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우연히 자살의 목격자가 된 찰스와 줄리안은 죽음의 주변을 배회할 뿐 원인을 찾는 데에도, 타인과 함께 제대로 애도의 단계를 밟는 데에도 실패한다. 금발의 소녀가 눈물을 흘리는 찰스의 손을 잡으며 위로를 건네는 신이 <프록터>에 등장하긴 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에서 둘은 처음의 구도 그대로 손이 맞닿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킬 뿐이다. <피에타>의 결말부에선 줄리안이 제이콥이 사망한 장소로 레베카를 데려가 사인을 설명하곤 같이 슬퍼한다. 그러나 이는 “제이콥과 마찬가지로 나는 레베카의 삶에서 사라졌다”는 줄리안의 내레이션 이후 따라붙는 장면이다. 찰스와 줄리안이 타인과 슬픔을 공유하는 장면은 둘의 바람에서 비롯된 상상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장편 작업에 들어서면서 요아킴 트리에르는 관계의 실패와 그로 인한 무력감을 전면에 드러낸다. 극의 시점이 사건의 관찰자가 아닌 주체로 옮겨가며 자연스레 자기 고백적인 성격 또한 강해진다. <오슬로, 8월 31일>에서 앤더스(아네르스 다니엘센 리)는 마약중독을 현실의 회피 수단으로 여긴다. 전 애인 이젤란과의 재회를 간절히 바랐고 호수에서 생을 끝내려 했지만 전부 수포로 돌아간다. 앤더스는 결국 죽을 용기조차 잃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무력감에 젖은 얼굴로 마약을 찾는다. <리프라이즈>의 젊은 소설가 지망생인 필립, 에릭은 앤더스처럼 연인과의 사랑에서도, 소설에서도 큰 성공을 이루지 못한다. 에릭 자신과 자살 시도로 정신병원을 오가던 필릭의 안녕은 다시 한번 이들의 공상 속에서만 실현 가능해진다.
보다 뚜렷한 변화가 감지되는 건 세 번째 장편 <라우더 댄 밤즈>에 이르러서다. 부자지간인 조나(제시 아이젠버그)와 콘래드(데빈 드루이드), 진(가브리엘 번)의 불화는 종군 사진기자였던 아내이자 엄마인 이자벨(이자벨 위페르)의 3주기 기념 회고전을 준비하며 터져나온다. <오슬로, 8월 31일><리프라이즈>와 <라우더 댄 밤즈>의 차이점은 이자벨과 그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쓴 리처드(데이비드 스트러세언)의 관점이 더해지면서 가족들이 이자벨에 관해 놓쳤거나 외면하려던 상황이 플래시백으로 틈입한다는 점이다. 주체와 주변인들의 파편적인 기억, 기록, 진실 사이에서 이자벨의 죽음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처음으로 엄마의 사망 원인에 알게 된 콘래드는 <프록터>의 찰스가 시도한 것과 유사하게 이자벨의 죽음을 탐구하고 동시에 자기 회고의 시간을 갖는다. 그 과정에서 이자벨과 그를 기리는 가족들의 관계가 재정립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선 오랜 연인이던 악셀(아네르스 다니엘센 리)에게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가 이별을 고한 이후의 서사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율리에는 암에 걸린 악셀을 찾아가 오랜 동료처럼 대화를 나누고 악셀은 끝이 예견된 자신의 삶을 회고한다. 죽어가는 악셀 곁에서 율리에는 그의 마지막을 사진으로 남겨둔다. 악셀이 사망한 뒤로 율리에는 영화 촬영장의 스틸 작가가 된다. 악셀의 마지막이 그랬듯 율리에가 현장에서 포착한 배우의 모습과 감정은 그 찰나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시한부의 운명을 지닌 존재들이 율리에의 카메라를 통해 보존된다. 이자벨의 사진처럼 율리에의 결과물들은 당사자를 소환할 매개체가 되어줄 것이다. 단편들부터 <리프라이즈>까지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은 죽음 자체를 적시하고 그것이 야기한 부차적 감정을 사회적 분리와 회피, 자기부정과 같은 방식으로 풀어내는 방식을 선호했다. 때로 인물들은 감정이 결여된 상태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라우더 댄 밤즈>이후부턴 사망자와 목격자, 주변인 등으로 죽음과 그에 결부된 관계를 설정하고 죽음 이전과 이후 등 시차에 변화를 주며 단절이란 주제를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가 극대화된 것이 <센티멘탈 밸류>다.
가상의 무대라는 가능성
<센티멘탈 밸류> 초반, 노라는 의인화된 집이 자신의 가족사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관한 에세이를 작성한다. 집은 인간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는 존재라는 생각에서다. 노라 가족에서 출발한 집의 이야기는 구스타프의 부모 세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3대의 서사, 이들이 공유하는 트라우마를 내비친다.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의 고향이자 연출작들의 배경이 된 도시 오슬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점령됐던 과거를 지닌다.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은 실제 참전했던 친할아버지의 증언을 수집한 뒤 구스타프의 어머니 카린을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생존한 저항군으로 설정했다.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구스타프의 어머니는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구스타프는 7살에 불과해 증언자로 불려가지 않았다. 자전적 이야기가 아니라고 못 박은 자신의 신작에 구스타프는 노라와 손자 에리크를 캐스팅하고 싶어 한다. 둘은 레이첼 모자를 연기하게 될 것이며 레이첼은 아들이 등교한 사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계획을 세운다.
노라와 아그네스의 아들 에리크가 작품에 참여하게 된 것은 단순히 구스타프의 설득에 의해서는 아니다. 면 대 면의 대화만이 아니라 그가 쓴 각본, 그리고 할머니 카린의 증언이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은 <센티멘탈 밸류>의 주요 로케이션 중 한곳으로 제 2차 세계대전 사료가 아카이브된 국립기록보관소를 꼽는다. 국립기록보관소에서 할머니 카린과 동료들의 고문 증언서를 읽은 아그네스는 그 이미지가 강렬하게 각인됐다고 말한다. 노라와 공명한 것은 구스타프가 주인공의 입을 빌려 전한 대사들, 용서를 구하고 외로움을 말하며 ‘집이 필요하다’고 말한 진심이다. 카린, 구스타프, 노라와 아그네스의 관계는 그 모든 역사가 기록된 자신들의 집을 세트장 삼아 새롭게 구현된다.
<센티멘탈 밸류>의 마지막 시퀀스는 구스타프의 영화 촬영 장면이다. 아들이 놓고 간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 찾아오자 레이첼은 목을 매려던 시도를 멈춘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면서도 아들은 무언가 달라진 엄마의 분위기를 눈치챈 듯 그를 오래 응시하다 나간다. 이 장면엔 어느덧 노인이 된 구스타프의 염원이 담겨 있을지 모른다. 컷 사인이 난 후 노라와 구스타프는 서로를 말없이 응시한다.
<피에타><오슬로, 8월 31일> <라우더 댄 밤즈>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등 요아킴 트리에르는 대부분 대화 없는 긴 침묵의 시퀀스로 영화를 끝맺는다. 숏-리버스숏으로 처리되거나 클로즈업된 배우들의 얼굴에는 대사 대신 다양한 감정들이 침투한다. 그런 의미에서 <센티멘탈 밸류>에서 구스타프의 촬영장은 감정이 스며들 가능성을 무한히 펼쳐둔 곳이다. 오직 이 무대만이 노라와 구스타프가 감독-배우이자 부녀지간으로서 서로에게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무대에서 감정을 표출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치유이자 연대로 나아가는 결말은 아니다. 오히려 가상의 세계를 기반으로 둘은 처음으로 서로가 느끼는 ‘감정적 가치’를 탐구해보기로 결정한 것에 가깝다.
다시 <프록터>로 돌아가보자. 감독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비디오에 기록된 남자와 찰스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교차하는 시퀀스가 존재한다. 그러나 저화질로 인해 픽셀화 처리된 둘의 표정은 명확히 인지하기 어렵고 인지하더라도 무표정에 가깝다. 한편 <오슬로, 8월 31일>의 앤더슨은 집에서 마약을 주사한 뒤 시체처럼 쓰러진다. 세상과 단절된 공간으로 묘사된 앤더슨의 집은 교감의 장으로 변모한 노라의 집과 상반된 의미를 지닌다. <프록터>의 카메라는 죽음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데에 그치지만 <센티멘탈 밸류>에선 가상의 무대에서 가족사를 재현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 카메라에 잡힌다. 이 비교가 요아킴 트리에르가 창작자로서 발전했거나 성장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초기작들에선 인물의 감정을 종종 생략과 편집의 대상으로 여겼던 그가 근작에 이를수록 감정과 정면대결하길 택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로케이션에 불과했던 집이라는 구조물을 시대의 목격자이자 내레이터로 내세우면서까지 말이다. 실제로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은 <센티멘탈 밸류>에 의도적으로 여러 인물을 등장시키되 일정한 감정적 흐름을 만들어내려 시도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다.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은 인간의 필멸성에 관해 계속해서 탐구해왔다. 초기에는 허무주의적 관점에서 삶을 묘사하거나 인물이 자기 존재를 피력할 또 하나의 통로처럼 죽음을 다뤄왔다 누군가의 사망 이후 남겨진 이들은 논외로 치부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죽음 자체가 아닌, 죽음이 초래한 것들에 관해 실험한다. 떠난 이의 공백을 인정하는 것, 사랑했고 평생을 함께했음에도 그의 전부를 알기란 불가능하다는 것, 과거는 완성됐지만 미래는 조율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 떠난 이의 자리를 무엇으로 채워나갈 수 있는가, 남은 이들의 관계는 공백을 포함해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는가에 관한 탐구를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의 영화에서 반복해 시도되고 있다. 반면 <프록터>에서 <센티멘탈 밸류>에 이르기까지 감독이 계속 견지하는 태도는 기록물로서의 예술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이 영상이든, 소설이든, 사진이든 신체만으론 포착할 수 없는 순간의 기록이 인간 존재와 관계를 뒷받침할 중요한 재료로서 활용된다. 찰스가 생면부지의 사망자의 정체를 알기 위해 나섰고, 자기혐오에 휩싸인 필립과 에릭이 글만큼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며 율리에와 구스타프가 카메라를 들게 된 본질적인 이유는 유사하다. 단절된 이미지와 기억, 기록이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의 다음 영화에선 어떻게 조합될지 궁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