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씨네21>이란 제호는 독자가 보낸 1만2103통의 제호들 가운데 선택됐다(후보 중엔 <영상21> <필름> <시네컴> <시네마한겨레> 등이 있었다). <씨네21>은 “영화와 영화관을 뜻하는 ‘씨네’와 21세기를 뜻하는 ‘21’을 합성한 것”으로, “영화를 중심으로 텔레비전, CF, 만화 등영상문화 전체를 다루지만 영화가 주된 관심사”라는 매체의 방향성이 반영됐다. “우리는<씨네21>이라는 제호가 장차 영화로부터 뻗어나가고 또 영화로 수렴되는 모든 문화를 축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제호가, 누구든 영화에 관한 정보나 비평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기를 기대한다."
<씨네21>은 창간을 기념해 영상산업에 종사하는 100인을 상대로 ‘한국 영상문화를 움직이는 인물들에 대한 의견 조사’를 실시해 ‘전문가 100명이 선정한 영상인 베스트 50인’을 선정했다. 신철 신씨네 대표, 심재명 명기획 대표, 김종학 프로듀서 등 제작자 외에도 강우석·임권택·장선우 감독 등 연출자, 강수연·안성기·채시라 등의 배우, 김수현 작가(<미워도 다시 한번> <배반의 장미>), 송지나 작가(<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 다양한 인물들이 ‘베스트 50인’에 이름을 올렸다.
1995년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가 트란 안 훙의 <씨클로> 제작 현장 방문기를 보내왔다. ‘베트남의 3륜 자전거’ 혹은 ‘자전거 운전자’를 의미하는 <씨클로>는 1년간의 로케이션 조율 끝에 베트남 현지에서 촬영됐으며 주인공 소년을 범죄의 세계로 인도하는 시인 역은 양조위가 맡았다. 양조위는 이 작품을 위해 베트남어와 프랑스어를 배워야 했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문화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언어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회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사회적 교훈이 될 것”이라 말한 토니 레인즈의 말을 증명하듯 <씨클로>는 제5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한국의 페미니스트 22인에게 1994년 3월부터 1995년 3월까지 방영된 드라마 속 여성과 남성 중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싫어하는 캐릭터를 물었다. 90년대 들어 드라마 속 여성들이 다양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장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로는 일은 명확하게 해내면서도 “사랑 앞에서만큼은 숙맥이 되어버리는” <종합병원>의 이정화(신은경)가 꼽혔고, 가장 싫어하는 여성 캐릭터로는 사랑보다 복수에만 집착한 <아들의 여자>의 김채원(채시라), 가부장제 속 전형적인 주부 캐릭터인 <이 여자가 사는 법>의 유순애(이효춘)가 꼽혔다. 가장 좋아하는 남자 캐릭터는 사회정의를 실현했던 <모래시계>의 강우석(박상원), 가장 싫어하는 남자 캐릭터는 <이 여자가 사는 법>에서 외도를 합리화한 진이중(유인촌)이 선정됐다.
1996년
“영화판에 막 발을 들여놓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두 신예 감독의 단편영화가 국제영화제에 진출했다. 아우가 만든 <2001 이매진>은 클레르몽페랑국제단편영화제에, 형님이 만든 <지리멸렬>은 샌디에이고국제영화제에 출품됐다. 인터뷰 당시 형님은 박종원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며 시나리오를 쓰고, 아우는 영상원 기술조교로 일하며 내공을 쌓고 있었다. 여기서 형님은 봉준호, 아우는 장준환 감독이다. <플란다스의 개>와 <지구를 지켜라!>가 세상에 공개되기 전인 20세기 말, <씨네21>은 이들의 진가를 일찌감치 알아봤다.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개막했다. <씨네21>은 국내 최초 국제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와 시작을 함께했다. 개막 전 총 7주에 걸쳐 연속 기획 ‘Go! 부산국제영화제’ 섹션을 만들어 영화제의 준비 상황과 상영작 프리뷰 기사를 다루었고, 다수의 국제영화제에서 발간 중이던 일간지 문화를 표방해 ‘씨네21PIFF- CINE21 PIFF SPECIAL’이라는 이름의 데일리를 총 9호 발행했다. 96년 당시 잡지에서 발견한 속단 하나. “국내 최초의, ‘유일한 영화제가 될’ 부산영화제.”(<씨네21> 제63호) 아아, 96년 <씨네21> 편집실의 선배님들 들리십니까? 미래에서 전합니다. 이후에 전주와 부천에서도 국제영화제가 생긴답니다.
1997년
한국 멜로영화의 새 지평을 열어젖힌 작품. 당대 가장 ‘트렌디’한 사랑 이야기. ‘영화’ 배우 전도연의 시작이자 제작사 명필름의 첫 멜로영화. <접속> 촬영 현장을 <씨네21>이 찾았다. “PC통신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80년대에는 정치적 공간에서 집단의 소통이 중요했다면 90년대는 개인의 소통이 화두였다. 컴퓨터는 좋은 소통 매체라고 생각했다.” 이 기사를 스마트폰이나 e북 리더기로 열람하는 독자들에게 장윤현 감독의 말은 어떻게 읽힐까.
박광수 감독의 연출부를 거친 ‘신인감독’ 허진호의 장편 데뷔작이자, 당대 최고의 스타인 한석규, 심은하의 주연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 한국 멜로 역사에 전설로 기억되는 지금과 달리, 지면을 통해 드러나는 당시의 촬영 현장은 모든 면에서 풋풋하기만 하다. 군산 신창동 공터에 지은 초원사진관 세트가 너무 진짜 같아 동네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러 오기도 했다고.
1999년
서울 관객 100만명을 신의 경지라고 부르던 1999년, <쉬리>가 개봉 32일째에 서울 143만, 전국 320만 관객을 동원했다. 경이로운 기록에 <씨네21>은 <쉬리>를 하나의 사회현상이라 보고 신드롬 분석 특집기사를 썼다. 단체관람을 문의하는 ‘전화’가 빗발치고 영화에 등장한 핸드폰과 음료가 특수효과를 누린다는 취재 내용에서 당시의 들뜬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작품 내부로도 깊숙이 들어갔다. 한국에서 재현한 할리우드의 스펙터클을 강점으로 꼽으면서도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지적하는 평자들의 양쪽 의견을 다양하게 전하며 담론의 장을 형성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심은하, <접속>의 전도연, <비트>의 고소영. <씨네21>은 멜로영화의 흥행을 주도하던 세 여성배우에게 ‘20세기 충무로 여배우 트로이카’라 이름 붙이며 그들의 매력을 분석하는 특집을 진행했다. 심은하가 “희로애락의 정형화된 연기를 벗어나 나른함과 쓸쓸함이 스민 일상적 심리의 미세한 결을 포착”할 줄 안다면 전도연은 “시나리오를 본능적으로 해석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능력을 가진 의외성의 인재”, 고소영은 “커다랗게 치켜뜬 눈, 좋고 싫음이 그대로 묻어날 것 같은 목소리, 탁월한 패션감각을 갖춘 과감한 스타”였다.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정성스러운 배우론을 읽다가도 자꾸만 이들의 싱그러운 얼굴에 눈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