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동과 김태용(왼쪽부터). 기념비적인 투숏이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내놓은 한국영화아카데미 13기 동기생이자 스물아홉, 서른 언저리의 두 감독이 자신들의 영화를 정리한 언어는 눈밭만큼 새하얀 미소로 웃는 얼굴들처럼 지금까지도 명료하다. “여성영화, 그리고 퀴어영화로 봐줬으면!”
2000년 1월. 조선희 편집장은 에디토리얼 ‘즐거운 밀레니엄 소동’ 글에서 최초의 국소적 ‘디지털화’를 준비 중인 매체의 운명을 앞두고 이렇게 썼다. “기자가 된 뒤엔 한때 ‘전자신문이 등장하면 장차 종이신문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므로 실직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90년대 들어 PC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고 모든 직장이 곧 재택근무 체제로 이행할 것처럼 이야기할 때, 출퇴근을 즐기는 편인 나는 벌써부터 서운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이미 나올 만큼 나온 이야기. 그런데 25년 뒤인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비슷한 고민을 하고, 대체로 ‘현상 유지’ 중이다.
한국 최초, 유일한 대안영화제의 기치를 내건 전주국제영화제에 2000년 영화계의 온 관심이 쏠렸다. 개막식은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 팀이 이끌었으며, ‘영화의 거리’가 출범한 완산구 고사동은 과감한 배색을 내세운 영화제 깃발들로 나부꼈다.
이른바 릴레이무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두 번째 에피소드인 <악몽> 촬영이 옛 서대문구치소 인근에서 이뤄졌다. “저예산 제작 방식에 입각한 싸구려 장르영화”를 내세웠던 류승완 감독의 선포는 그 자체로 2000년 한국영화의 혈기와 야심을 닮아 있다. 제작비 6천만원의 극장영화를 제작하려다보니 모니터링에 열중인 감독 너머로 소품팀은 <여고괴담> 때 쓰고 남은 인조 피를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꺼내오고 있더라는 후문.
2002년
“우리는 그들이 잘해낼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또 다른 7년 뒤엔 절대 이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백은하 기자(현 배우연구소 소장)의 편집자주는 예언이 됐다. ‘라이징 스타’는 <씨네21>이 연례행사로 기획하는 정통의 신인배우 발굴 프로젝트다. <씨네21> 기자들의 감식안이 유독 빛을 발한 두해가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창간 7주년 특대호인 350호의 표지를 장식한 일곱 배우다. 조승우, 신민아, 권상우, 임은경, 류승범, 공효진, 박해일. 영화 시상식 라인업을 방붙게 하는 배우들이 “병아리처럼 보이려고 옷도 다 노랑으로 맞추고”(신민아) <씨네21> 스튜디오를 찾았다.
2002년을 뜨겁게 달군 영화. 작가감독인 장선우가 제작비 100억여원을 들여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만들었지만 영화는 평단과 대중 모두의 외면을 받으며 흥행에서 참패를 맛보았다. 제작 단계부터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받았고, 전국 관객 15만명(서울 관객 7만700명)을 불러모으는 데 그치며 충무로 투자 자본의 썰물 현상까지 이끌어낸 ‘큰 실패작’이었던 것. <씨네21>은 영상 전문지로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모든 순간에 동행했다. 시작은 관객에게 쉽게 영화를 소개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영화의 ‘CF 현장’ 취재였다. 개봉 이후 찬반 비평, 네티즌 찬반 토론회 취재, 흥행 실패 진단 등 다양한 기사를 지면에 실었다.
“요즘 세대는 쉽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진다. 그들에게 예전에는 이렇게 순수한 사랑도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목포 북교동에서 이루어진 <클래식> 촬영 현장. 곽재용 감독이 <씨네21>에 전한 연출론이다.
2003년
“밥은 먹고 다니냐.” <씨네21>도 그곳에 있었다. 한겨울 경남 사천의 어느 철길 앞, 인공강우에 흠뻑 젖은 배우 송강호, 박해일, 김상경 사이를 가로지른 봉준호 감독은 미끄러운 바닥에 곧잘 휘청거리면서도 직접 연기 시범을 보일 정도로 열정적으로 디렉팅했다. 적수는 영하 10도의 추위와 오후 5시면 컴컴해지는 짧은 일조 시간. 배우들의 안전을 위해 자꾸만 얼어붙는 바닥을 일일이 토치로 녹이는 스태프들의 발걸음은 더욱 분주해져만 갔다. 한국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클라이맥스 신 중 하나가 완성된 순간이다.
“넥타이를 매지 않았고, 자신의 차를 직접 운전했으며, 장관에게 90도로 절하는 관료문화를 ‘조폭문화’와 유사하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소설가에서 영화감독, 감독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이 된 지 약 3주차에 장관실에서 이창동 감독을 만났다. 1990년대 이후 지속된 한국영화의 발전사가 다시 물음표에 직면한 시점. 청년문화가 영화보다 뜨거운 현실 정치에 다시 눈 돌릴 때 이창동 장관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현실이 아무리 누추해도 결국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한국영화계에 장준환이라는 이름의 돈키호테가 나타났다!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영상원 조교를 거쳐 류승완 감독의 단편 <변질헤드>를 촬영하고, 봉준호 감독과 함께 <모텔 선인장> 연출부로 활동하기까지…. 영화감독 데뷔를 향한 장준환 감독의 초기 모험을 개괄한 기사는 한국영화 르네상스 바람의 한복판에 엉뚱한 돌을 던진 괴작 <지구를 지켜라!>의 출현에 분명 적잖이 흥분한 모양새다.
“갑갑한 것일까. 한석규는 물을 마셔댔고, 박중훈은 얼굴을 연신 쓸어내렸다.” 극장에서 1년에 146일은 한국영화를 틀어야 한다. 즉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제) 이야기다.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40%를 넘어선 이때,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추진하려는 정부는 스크린쿼터를 결정적인 걸림돌로 바라봤다. 이에 2003년 6월12일, 한국영화 스크린쿼터 수호를 위한 영화인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임권택·임순례 감독, 배우 안성기·송강호·이병헌·한석규·장나라·박중훈·방은진·장동건, 제작자 차승재·심재명·고 이춘연 등이 모여 결사반대의 뜻을 전했다. 관객의 기호의 자유, 영화인 생존권의 문제, 국가 차원의 산업 보전 및 장려 정책에 대한 뜨거운 토론이 이뤄졌다.
전남 보성의 <장화, 홍련> 세트장에서 수미와 수연 자매가 나란히 섰다. 뒤편엔 실내 장면이 영화의 90%인 하우스 호러영화답게 제작진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목조건물 세트가 아름다운 실내외를 자랑하고 있다.
“선배님은 정말 가슴이 넓은 남자예요.” <올드보이> 하면 온통 복수와 대결의 핏빛 구도로 점철된 투숏이 연상되지만 그 시절, 잠시 이런 분위기도 있었다. 당대에 <거울속으로> <내츄럴시티> 등 스타덤에 분주히 호응하던 스케줄과 <올드보이> 촬영을 병행한 유지태에겐 영화 홍보에 으레 나눌 법한 상찬 이상으로 최민식의 존재가 “믿을 구석”이었다. 후배의 애정 공세를 받아낸 최민식이 복수의 우아한 엘레지를 완성한 결정적 캐릭터를 추켜세운다. “<올드보이>는 사실 이우진, 유지태의 영화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