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빵을 만드는 것은 좋은 사랑을 하는 것과 같다.” 영화 첫머리에 소개되는 주인공의 신조는 <주노명 베이커리>의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빵 배달을 갔던 주노명이 몰래 집에 들어가 잠든 아내의 몸을 더듬는 장면에선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아내의 신음소리에 맞춰 수십겹의 페스츄리로 이뤄진 빵이 달콤하게 부풀어오른다. 점점 커지는 빵처럼 사랑은 만족감에 취한다. 그러나 행복이란 이런 것일까, 싶은 순간 주노명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결혼한 지 10년된 부부, 매일 빵집 카운터에 앉아 아파트로 둘러싸인 풍경만 바라보는 여자에게 늘 빵처럼 부풀어오르기를 요구할 순 없을 것이다.
<주노명 베이커리>는 주노명에게 닥친 위기에서 본격적인 드라마를 시작한다. 흔히 불륜이라고 또는 중년의 로맨스라고 말하는 그것을 주노명의 아내 역시 체험한다. 그 대상이 고릴라같은 남자 박무석이지만 이 남자는 보기보다 괜찮다. 아무도 몰라주는 주노명의 빵 만드는
불륜도 살짝 구으면 로맨스가 된다, <주노명 베이커리>
-
이 거리엔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정신나간 마약중독자들, 임신한 창녀들, 칼과 총으로 구멍난 시체들,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기며 죽어가는 부랑자들이 구급요원 프랭크를 기다리고 있다. <비상근무>에 담겨진 90년대 초 뉴욕 뒷골목의 밤풍경은 단연코 아비규환이다. 영광의 도시 뉴욕은 지옥의 그늘을 감추고 있다가 밤이 되면 끔직하고 흉칙한 맨살을 이렇게 드러낸다. 프랭크도 이 악몽의 공간을 벗어나고 싶다. 자신의 미숙으로 죽은 한 소녀의 혼령이 그에게 치유불능의 불면증을 심은 뒤로 그의 얼굴은 말기 암환자처럼 변했다. 죽어가는 인간들의 호출에 몽유하듯 끌려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독백대로 “죽음에서 구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목격하는 것”뿐이다. 그럴수록 프랭크의 안색은 더욱 검게 변해간다.
뉴욕시의 병원에서 10년간 구급요원으로 일한 조 코넬리의 원작소설이 폴 슈레이더의 각색과 마틴 스콜세지의 연출을 거쳐 다시 태어난 <비상근무>는 스콜세지적인
세속도시에서의 영적 구원, <비상근무>
-
<씨네21>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주부터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난에 격주로 글을 쓰게 될 신현준입니다. “와, 신현준이다. 영화배우가 글도 쓰는구나” 하고 좋아하실 분들에게는 찬물을 끼얹는 일이라 면구스럽습니다. 변변한 직업도, 흔한 박사학위도, 소속된 운동단체도 없는 은둔형 인간이 이 난을 맡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달력 한장 넘어가는 것이 새삼스러운 요즈음 뉴페이스도 아닌 사람이 등장하는 점도 좋은 그림은 아닌 듯합니다.
겸손 떨지 말라구요? 그런 건 아닙니다. 학문적 깊이 있는 연구 업적이 있는 아카데미션도, 비수처럼 꽂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저널리스트도, 그렇다고 아무 글이나 써도 되는 유명인사도 아닌 사람이 여기 글 쓰는 일을 생각하니 걱정이 앞을 가립니다. 오죽하면 10매짜리 원고 쓰는 데 사흘째 골머리를 앓고 있겠습니까. <씨네21> 기자들 중 알고 지내던 친구와 후배가 있다는 죄로 이 고생이라니(이때 속으로 드는 생각은 ‘위대한 대한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새해에 하지 말아야 할 것들
-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각색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송기원씨가 결국 완성했다. 그는 쫓기는 사람처럼 부지런히 대학노트에 시나리오를 썼다. 어느 날 예고없이 돌연 염곡동에 있던 내 집에 나타나 훌쩍 그 대학노트를 던져놓고는 사라졌다. 그리고 곧 그가 수사기관을 피해 도망다닌다는 소식이 간접적으로 들려왔다. 그는 각색에 자기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영화를 위해 유리하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송기원뿐만 아니라 그가 좋아해 같이 술자리를 자주 했던 시인 고은 선생도 수사기관에서 쫓는 모양이었다. 80년 봄이었다. 시국이 다시 어수선하고 정국이 뒤숭숭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시사 감각이 둔한 나는 그저 오랜만의 영화 연출 작업에 신이 들려 신경을 다른 곳에 쓸 여유가 없었다. 즉흥 연출만 일삼던 내가 처음으로 콘티를 만들고 연출 계획을 사전에 준비했다. 눈을 감고 시나리오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떠올리는 일을 자주 했다.
그러나 캐스팅에서 나는 또 서툴게 아마추어의
이장호 [38] - 순자는 부르지 못한다, <바람 불어 좋은 날>
-
-
아웃사이더의 표지를 타고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결코 세상에 섞여들 것 같지 않은, 희망 같은 것은 존재한 적도 없다는 듯한 눈빛을 한 채 세상에서 떨어져 있다. 안젤리나 졸리(24)도 그런 부류이다. 어깨와 팔에 새긴 문신도, 나이프를 수집하는 취미도 그녀를 크리스털 그릇처럼 마냥 예쁘기만 한 여배우들과 구분짓는다. 비슷하게 삐딱한 이미지를 가진 <트레인스포팅>의 ‘식보이’ 자니 리 밀러와의 결혼식에서도 졸리는 자신의 피로 밀러의 이름을 휘갈긴 흰 셔츠를 입고 서로의 피를 교환하는 파괴적인 의식을 치렀다. 그러나 그처럼 요란한 행동이 아니더라도 졸리는 질서에 젖은 사람들이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배우가 아니다. 쉴새없이 요동치는 감정과 수그러들지 않는 오만함으로 무장한 채 자신의 이미지 그대로 험한 역들을 거쳤다. <미드나잇 카우보이>에 출연한 배우 존 보이트의 딸로 평가받고 싶지 않아 성을 버리고 나타난 그녀는 영화 속에서도 마치 홀로 존재하는 듯한 느
세상에 섞여들지 않는 눈빛, 안젤리나 졸리
-
2000년의 첫 만남/ 뮤지컬 <황구도>. 연극은 예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세기말> 끝나고 바로 섭외가 들어왔어요. 개들의 사랑을 그린 잔잔하고 따뜻한 뮤지컬이예요. 얌전하고 착하고, 천상 여자인 암캐 캐시로 출연해요. 예전에 출연한 역할과는 아주 달라요. 1월3일부터 방영되는 TV드라마 <나는 그녀가 좋다>에서는 못돼서 새침하기보다는 못돼서 귀여운 악녀로 나와요. 이미지 변신을 즐겨요. 꾸준히 자기를 가꾸지 않으면 배우로서의 생명력은 없다고 봐야죠.
1999년 20자평/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을, 내 생애 최고의 순간들이 많았던 한해. 그러나 새 천년엔 또 무엇을?
21세기, 나의 길/ 연기도 계속하고 싶지만, 교단에서 후배들에게 내 지식을 나눠주고 싶어요. 그래요, 교수가 꿈이예요. 중학교 때부터 그랬어요. 연기를 하는 것도 일종의 현장경험이죠. 아직 뭘 가르칠지는 정하지 못했어요. 남들이 많이 가는 미국말고 일본으로 유학가서 새로운 걸 배
21세기 스크린, 네개의 사자후 [4] - 이재은
-
2000년의 첫 만남(첫 작품)/ 홍상수 감독님의 <오! 수정>이 될 거예요. 감독님이 참 특이하세요. 촬영 현장에서 음악을 틀어놔요.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지도 않아요. 배우를 편하게 해주세요. 감독님을 만난 건 행운이예요. <오! 수정>은 2000년 한국영화 하면 떠오르는, 그런 영화가 될 거예요. 흑백영화라는 것만으로도. 홍 감독님 영화라서 기대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저는 ‘내 영화’라서 잘했다는 박수를 받고 싶어요.
1999년 20평/ 홍상수 감독님 식으로, 은주가 영화에 빠진 해!
21세기, 나의 길/ 계속 배우로 살아야죠. 아직 난 배우라기보다는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죠. 아기배우예요.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내가 생각하는 배우는 특별한 사람이거든요. 오래 두고볼 수 있는 연기자, 세월이 흘러도 신비롭게 여겨지는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2000년 1월1일 0시/ 계획대로라면 <카이스트>에 함께 출연하는 정민 선배가
21세기 스크린, 네개의 사자후 [3] - 이은주
-
2000년의 첫 만남/ 얼마 전 성재 오빠(이성재)랑 <플란다스의 개> 촬영을 마쳤어요.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 현남이가 제 역할인데, 순수하고 정의로워서 동네 강아지 실종사건을 접하고 추적해요. 상황은 웃긴데, 사람이 진지해서 더 웃길 거예요. 감독님 말씀처럼 현남이랑 나랑 많이 닮아서, 연기하기 아주 편했어요. 현장 분위기도 화기애애했구요. 시나리오 읽고 무조건 하겠다고 달려들었는데, 시사회날은 꼭 울어버릴 것 같아요.
1999년 20자평/ 연기의 맛을 알아버린, 그래서 연기를 택하는 대신 다른 한편을 포기한 한해(배두나는 <플란더스의 개>를 만나면서, 드라마, 쇼프로 MC, 라디오 DJ를 모두 그만뒀다).
21세기, 나의 길/ 난 현재에 충실한 사람이거든요. 과거에 얽매이지도, 미래에 부담을 느끼지도 않아요. 재밌고 즐거우니까 하는 것뿐이예요. 한동안 몰두하다가 놓아버리는 버릇도 있구요. 뭔가 이뤘다 생각하면 놓는 거죠. 깨는 걸 좋아하나봐요. 그런
21세기 스크린, 네개의 사자후 [2] - 배두나
-
2000년의 첫 만남/ 1월중에 촬영 들어갈 호러영화 <가위>. 배우의 힘으로 끌고 가는 영화는 아직 내게 무리라 생각하는데, <가위>는 장르적으로 다 같이 가는 영화라 맘이 놓였어요. 그리고 호러영화는… 묘한 매력이 있잖아요. 튀지 않는 캐릭터인데, 어떻게 표현해낼지 요즘 구상중이예요.
1999년 20자평/ 그저 그렇게, 그러나 그렇게, 언제나 그렇듯이 앞으로도 그럴 거야. (‘다시’를 외치자) 이해가 안 가요. 너무 갑자기 떠서. 왜들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가. 요즘 출연섭외가 너무 많아져서 정신없어요.
21세기, 나의 길/ 배우는 배우일 뿐이예요. 왕도 제작자도 감독도 아니죠. 연기나 품행에 있어 지난해는 배우로서의 과도기였다고 생각해요. 21세기는 한발 더 나아갈 시점이죠. 할 수 있는 걸 할 거예요. 그간 맡은 역할들 때문인지, 사람들이 날 답답하거나 비관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눌하고, 권태롭고, 뭔가에 눌려 있는… 지금보다 연기를 더 잘
21세기 스크린, 네개의 사자후 [1] - 유지태
-
한국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컴퓨터그래픽(CG)를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간적인 분량의 차이는 있지만 이제 CG를 사용하지 않는 한국영화는 거의 없다. 오히려 빠지면 이상할 CG슈퍼바이저라는 타이틀 옆엔 종종 장성호(30)씨가 나란히 오른다. 슈퍼바이저란 현장과 작업실을 연계해서 유기적으로 작업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 <퇴마록>의 날아다니는 월향검부터 <해피엔드>의 둥둥 떠오르는 근조등까지 그가 디지타이저 위에서 타블레트 펜 하나만으로 만들었다기엔 너무나 감쪽같다. 보이는 것을 갑자기 사라지게 하거나 없는 것을 근사하게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는 ‘마술사’다.
장성호씨는 대학 시절중 3년간 세미콜론이라는 CF프로덕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가 영화하겠다고 나선 건 대학 4학년이던 95년. 영화판이 좋아서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천도>로 현장에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충무로가 경제적인 사정까지 책임져줄 만한 환경은 아니었다. 1년 가까운
사라진 까마귀를 살려내다, CG슈퍼바이저 장성호
-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 이상한 선물 하나가 우리에게 배달되었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라는 글씨가 총총 박힌 붉은 포장지 안에서 어떤 이는 ‘못생긴’ 공포영화 한편을 꺼내들고 투덜거렸지만, 어떤 이는 생경한 광채를 발하는 작은 보석을 발견하고 가슴을 두근거렸다. 이 묘한 선물을 보내 온 산타클로스는 영화아카데미 13기 동기생인 김태용(30) 감독과 민규동(29) 감독. <여고괴담…>은 16mm 단편영화 <열일곱>(1997), <창백한 푸른 점>(1998)에 이은 그들의 세 번째 공동 연출작이자 첫 번째 상업영화다.
“민선이(민아 역)가 잠깐 자리 비운 동안 심심해서 예진이(효신 역)랑 영진이(시은 역)랑 우리 둘이서 누가 많이 관객 끌어오나 경쟁했어요.” 개봉날 극장 앞에서 보낸 즐거운 하루를 천진한 말투로 들려주는 두 감독은, 맑되 가볍지 않았고 열정적이되 그 열정에 대해 담담했다. 마치 동급생 친구라도 되는 양 영화 속 소녀들에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공동감독 김태용ㆍ민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