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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렉트라는 본드걸이 아니다.” 소피 마르소는 잘라 말한다. 한가닥 하는 여배우들은 007 시리즈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소피의 단언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녀를 본드걸로 생각한다. 그녀가 제임스 본드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상복을 입은 단정한 모습으로 처음 스크린에 등장했다 해도 상관없다. 곧 그녀는 프랑스의 사진작가들이 “가장 섹시한 여배우”로 극찬하는 자신의 육체를 전시하듯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시리즈에 그녀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 이상이 되리라고 생각했다면, 소피 마르소는 007 시리즈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다. 여배우들을 삼키는 007 시리즈의 괴력을.
그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1962년, <닥터 노>. 흰 비키니를 입은 우르술라 안드레스가 해변에 나타났을 때, 그 조각 같은 금발의 비너스에게서 남성들은 스파이영화의 또다른, 어쩌면 최고의 묘미를 발견했다. 007 영화의 진정한 절정은 본드가 악의 세력을 파괴하는 순간이 아
007 옆 금발의 비너스들, 본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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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한해를 '한국영화 폭발'이라는 말로 정리하면서, 영화산업이 쏘아올린 요란한 축포 뒤에 묻힌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한다. 올해는 인문학의 위기, 문학의 위기 등 유난히 많은 위기설이 회자됐는데, 영화가, 그리고 약간은 <씨네21>도 그 책임을 나누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서다. 대학에서 학생들이 ‘돈되는’ 학과나 ‘재미있는’ 학과로 몰리면서 그런 현실에 맞게 학제를 새로 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는 형편에서 염무웅 선생이 어느 일간지에 쓴 글 한 대목은 가슴을 찌르는 바 있었다. “동네마다 노래방과 비디오가게가 들어찬 오늘날 대학마저 수요자 중심으로 변해야 한다는 주장은 대학의 자기부정이다. 대학은 좀더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에 봉사하는 것이고 인문학이 바로 그런 노력이다.” 70∼80년대에 김용옥 선생이 노자를 공부한다 할 때 ‘파시즘을 돕는 현실도피의 학문’이라고 질시 당했다지만, 요즘 같은 물신주의와 실용주의의 시대에는 철학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 인문학에 관심을
[편집장이 독자에게] 지식인으로서의 영화감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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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지난 한해도 몇몇 사람들을 새로 만났지만 놈을 만난 건 그 가운데서도 가장 희한한 경우임에 틀림없다. 워낙 유명한 놈인지라 만나기 전부터 놈에 대해 웬만큼은 알고 있었다. <딴지일보>라는 희한한 물건 덕에 갑자기 유명해진 놈은 온갖 매체에 인터뷰가 실리고 있었고(온갖 매체의 인터뷰 요청에 응하고 있었고) 나는 늘 인터뷰 사진 속 놈의 얼굴이 마땅치 않았다. 그것은 내가 사람의 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서가 아니라 <딴지일보>라는 희한한 물건에 대한 지식인들(정확히 말하면 우등생 출신 성인들)의 열광 때문이었다.
<딴지일보>는 지식인들의 피자에 곁들여진 콜라였다. 지식인들은 패러디니 풍자니 <딴지일보>에 대한 여러 비평문을 제출해놓고 있었지만 그들이 <딴지일보>에 열광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 쌍스러움에, 그 톡 쏘는 맛에 있었다. 고매한 외양 속에 머리통 속에서만 쌍스러운 일탈을 거듭하는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관심사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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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벅스 라이프> 넌 커서 뭐가 될래?
[정훈이 만화] <벅스 라이프> 넌 커서 뭐가 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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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오! 또 졸고 있으면 어떡해잉?” 희경이 짹짹거리는 소리로 승우의 단잠을 깨웠다. “왜 또 난리야, 이 마누라야! 중국집에서 빵집으로 업종 전환을 했으면, 그만큼 좀 교양 있어져야 할 거 아냐?” 승우는 진저리를 치며 ‘빠리빠리 베이커리’라고 적힌 빵 봉지를 희경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아 이거 치워. 교양? 장사되는 꼬라지를 보고 교양 타령을 해라! 이거야, 빵에 들러붙은 게 건포돈지 파린지 알 수가 없잖아.” “낸들 알아? 처음엔 좀 되더니, 이젠 안 팔린 빵 먹느라고 뱃대지에 밀가루살만 붙어버렸잖아.” “그러니까, 연구를 해야 된다고. 왜 우리가 이렇게 파리를 날리는 줄 알아?” 그러면서 희경은 가게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가게 안으로 몰아닥치자, 승우는 몸서리를 치며 소리질렀다. “아 뭐야, 추워 죽겠는데.” “저쪽 건너편에 보여? ‘아메리칸 파이’라는 가게.” “파인지 파린지 그게 우리랑 뭔 상관야?” “무식하긴. 유사 업종이잖아. 저 집 말야. 미
[이명석의 씨네콜라주] 아메리칸 파이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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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아줌마 애기 낳던 시절. 시댁 어른들은 직장 다니는 남편이 밤에 잠을 푹 자야 한다며 딴방을 쓰게 했다. 그뒤 1년 반 동안, 아줌마는 ‘애기’라는 이름의 불면과, 남편은 자유와 함께 살았다. 그때 밤에 잠 안 자고 칭얼대는 아기를 단 한번도 대신 봐주지 않았던 남편에게 아줌마는 왜 칼침을 놔주지 못했던가. 애기를 팽개치고 지 한몸 편하자고 드르렁 쿨쿨 잘살았던 남편에게 왜 살의를 느끼지 않았던가. 아이를 팽개치고 자기 삶을 챙기는 배우자에겐 살의를 느껴 마땅하고, 좋아하던 연애소설말고 새삼스럽게 추리소설을 열심히 읽어서 그 살의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영화 <해피엔드>의 주장에 전폭적으로 공감하는 아줌마는, 과거의 자신이 미치도록 후회스러울 뿐이다.
아줌마가 보건대, 이 영화의 주제는 최보라의 ‘외도’가 아니다. 육아문제다. 아이를 팽개치고 술 마시거나 아이를 팽개치고 친구 만나거나 아이를 팽개치고 회사 일에 매달리거나 간에, ‘아이를 팽개치는’ 건 도덕
[아줌마, 극장가다] 모든 게 나라 책임이야, <해피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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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40%를 웃돌고 있다. 터졌다 하면 60, 70만명이 기본이고 ‘영상 펀드’라는 말이 귀에 익을 정도로 영화판이 후끈거린다. 지난 겨울 줄초상난 것 같던 충무로가 1년도 지나지 않아 흥청거리고 있으니 불안감마저 든다. 그래서 세기말인가. <세기말>을 선보일 송능한 감독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친다. “관객에게 외면당한다면 감독으로서 진퇴를 심각하게 고민할 것이다.” 치받을 듯 당당한 폼이며 뱃심이 <넘버.3>의 박상면을 닮았다. 이번엔 재떨이를 던지는 게 아니라 우두둑 깨물어 파편을 날린다. 천박한 세태를 향한 송능한의 분노와 증오가 무섭다.
닳고 닳은 이야기, 영화는 현실을 못 따른다
정자들이 꼼실거리는 오프닝이 예사롭지 않다. 4개의 에피소드는 <숏컷>이나 <펄프픽션>처럼 분절되면서 물밑으로 연결되는데, 한 단락의 주인공이 다음 단락에 단역으로 잠깐식 나온다. 그들은 서로 아는 듯 모르는 듯 스쳐가고 마주친다
용맹스런 감독, 자세를 낮춰라, <세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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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을 잘라냈다 붙였다 하는 곳이라 필경 지저분할 것으로 지레 짐작하는 것은 오산이다. 남나영(29)씨와 이수연(28)씨가 의기투합해서 차린 LN편집실은 항상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오리지널 필름을 다루는 네거편집의 공정을 고려한다면 이는 기본규칙인 셈이다. 매끄러운 프린트를 위해서 먼지나 스크래치는 절대사양. 네거편집이란 최종편집본이 나오면 이를 기준으로 오리지널 네거필름을 잘라 붙이는 과정. 이 작업이 끝나면 곧장 현상에 들어간다. 그림만 놓고 보면 마지막을 장식하는 셈이다. 별도의 전문기사가 담당하는 할리우드 시스템과 달리 국내에서 네거편집만을 전문적으로 맡고 있는 곳은 올해 7월 문을 연 LN편집실이 처음이다.
남나영씨는 박곡지 기사 밑에서, 이수연씨는 박순덕 기사 밑에서 일을 배웠다. 기술시사 때 조금이라도 프린트에 이상이 있으면 자신들을 먼저 쳐다보는 시선에 막내 땐 적잖이 마음상했던 적도 있다. 조금만 기다리면 편집기사로 데뷔할 기회가 주어질 차례였지만, 자신들의
네거편집 남나영·이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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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김치’라는 노란색 포스터가 내걸린 동숭씨네마텍. 추운 날씨 때문인지 오가는 발걸음이 뜸했다. 12월18일부터 23일까지 엿새 동안 외국에서 활동중인 젊은 한국감독들의 작품을 모아 소개하는 이 자리에 관객은 별다른 관심을 내비치지 않았다. 날도 추운데,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을씨년스런 고민에 덩달아 심각해지기 싫은 탓일까. 사실 재외한인 감독들의 작품이라고 해서, 한국인입네 정색하는 작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면, 써니 리(이선영) 감독의 작품을 만나야 했다. 그가 미국서 들고온 단편 <카우걸> <중국음식과 도넛>은 만듦새도 깔끔하지만, 재기발랄하고 유쾌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극장 밖으로 나올 즈음, 관객의 머릿속에 불쑥불쑥 묵직한 생각거리들이 튀어오르게 하는 재주가 범상치 않다.
써니 리 감독은 4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 버지니아로 건너갔다. “특별히 잘하는 건 없지만, 얘기 만드는 걸 좋아해서” 영화에 관심을 기울였고, 시
재외한인영화제에 <카우 걸> 출품, 방한한 재미한인 감독 써니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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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의 여신 마돈나가 “평생의 유일한 사랑”이 있다고 고백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뾰족한 원뿔을 가슴에 달고 남성 댄서들을 희롱하는 마돈나, 거리낌없이 오럴 섹스를 재현하는 이 위협적인 섹스심벌도 한 남자에게 마음을 준다는 사실에 남자들은 질투섞인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그가 ‘할리우드의 악동’으로 소문난 숀 펜이라면 더욱 안심이다. 파파라치가 탄 헬기를 향해 권총을 쏘아대고 기자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숀 펜은 사람들이 보기에 그저 난폭한 젊은이였을 뿐이며, 그에게 얻어맞고 이혼한 마돈나는 별 수 없는 ‘여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선 ‘마돈나의 남편’을 둘러싼 수다와 다소의 진실을 걷어내자, 그래야 동세대의 가장 재능있는 배우로 평가받는 숀 펜 자신이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방으로 터져나오는 분노와 수상한 열정을 감추지 않는 배우. 단 한번도 순종적이지 않았던 숀 펜은 할리우드의 통념과 소비적인 이미지에 반역을 기도한다. 그의 반항은 10대 혹은 2
할리우드를 향해 총구를 겨누다, 의 숀 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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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편의 영화로 천국과 지옥을 다 맛봤다면, 그건 배우에게 행운일까 불행일까? 김태연(23)은 데뷔작 <거짓말>로 국제 무대에 서는 행복과 분신 같은 영화가 처참하게 짓이겨지는 불행을 동시에 겪었다. 서럽게 울면서 흠씬 맞아가면서 영화를 찍기는 괴로웠지만 그러면서 자기 안에 숨겨진 보석 같은 재능을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김태연은 미지의 배우다. 유일한 영화 출연작인 <거짓말>은 등급보류로 관객과의 만남을 봉쇄당했고, 유일한 TV드라마 출연작인 <러브 스토리>는 아직 촬영도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사진이 세계 유명 여배우들과 나란히 이탈리아판 <엘르>에 실렸고, 일본 화장품CF의 오디션 제의를 받았으며, 새로운 세기를 이끌어갈 한국영화 유망주로 거론되고 있다.
배우에게 데뷔작이 은막으로 가는 통과의례라고 한다면, 김태연은 꽤나 수고로운 제의를 치른 셈이 된다. <거짓말>에서 그가 그려낸 Y는 결단코 예사로운 인물
망가진 역할이 아름답다, <거짓말>의 김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