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에 가깝게 더욱 가깝게
SF 영화의 잔치상은 한번도 빈곤한 적이 없었다. 우주여행, 시간여행, 외계인, 괴수, 신무기, 미친 과학자 등등…. 그 중에서도 로봇은 언제나 인기있는 주인공이었다. <터미네이터> 등 로봇 캐릭터가 영화판을 누비고 다닌 것이 불과 10년도 안 됐는데, 어느새 스크린에서 로봇들의 모습은 쑥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80년대 중반경 SF문학쪽에서부터 움트기 시작한 사이버펑크 바람이 삽시간에 SF영화의 콘텐츠를 물갈이해 버린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처음엔 CG의 발달에 힘입어 시각효과로 관객을 사로잡았고, 나중에는 가상현실이라는 내러티브 그 자체가 가진 무궁무진한 스토리의 가능성들로 사람들의 흥미를 계속 붙들었다. 결국 로봇이라는 고전적 SF 아이콘은 이 거대한 변화 속에서 확고부동의 자리를 보전하기가 버거웠던 것이다.
이제 SF 영화는 온통 현란한 가상현실과 우주모험 시나리오로 채워지고 있으며, 최근 그 틈을 비집고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사라지는 로봇 영화, 로봇 100년 [1]
-
<지우개 따먹기>는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처럼 교실 안 아이들의 싸움을 통해 권력의 해부도를 그린다. 자그맣고 겁많은 영훈은 강산과의 지우개 따먹기에서 매번 이기지만 뚱뚱하고 힘쎈 강산이 윽박지르는 바람에 자기 지우개까지 빼앗기고 만다. 그럼에도 힘이 부치는 영훈은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한다. 영화는 영훈의 이야기에다 경찰에 쫓기는 운동권 대학생 누나의 이야기로 정치적 함의를 부풀린다. 마르크시즘 서적을 쥐고 집을 빠져나가던 누나는 영훈에게 지우개 하나를 건네며 꼭 이기라고 웃어준다. 초등학생 만화가, 디자인 수업, 사운드그룹 활동을 하다 서울예대 영화과에 들어간 민동현은 스토리보드 작성과 리허설, 비디오 촬영 등 사전준비 작업을 철저히 마치고 촬영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영화를 찍으면서 적잖은 장애물을 헤쳐와야 했다. 전쟁과도 같았던 그의 제작 뒷얘기는 영화지망생들에게 영화만들기의 쓴맛과 단맛을 미리 맛보게 해준다.
이스트만 단편영화제작지원
이스트만 단편영화 만들기 [2]
-
촬영전투, 기쁨과 절망의 좌충우돌
엉뚱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단편영화는 미래의 영화”라는 앙드레 바쟁의 유명한 전언은 단편 영화의 서글픈 운명을 암시한다. 미래를 꿈꾸는 자가 현실의 궁핍함을 견뎌야하듯, 단편영화 작가는 현재의 한기(寒氣)를 참아내야 한다. 그래서 단편영화 작가들은 언제나 목이 마르다. 군소 단편영화제가 많아지고 대중의 인식이 확산되면서 단편영화의 존재감은 전보다 훨씬 두터워졌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기획에서 유통까지, 단편영화에 짐지워진 숙제는 속시원히 풀린 게 없다. 관객과의 만남이 빈번해지고 인디스토리나 미로비전 같은 배급사의 노력으로 해외영화제 나들이가 잦아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급시스템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영화만들기는 온전히 작가들의 몫이다. 아직까지는 단편영화 작가가 지원을 요청할 만한 곳이 별로 없다는 게, 아쉽지만 우리의 현실이다.그런 풍토에서 이스트만코닥 단편영화 지원제도는 거의 파격에 가깝다. 이스트만은 35mm필름 1만자를 제공하고
이스트만 단편영화 만들기 [1]
-
“동지들과의 30년 전 추억을 되새기며”
일본을 대표하는 네 감독이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구로사와 아키라, 기노시타 게이스케, 고바야시 마사키, 그리고 이치가와 곤(84). 이들을 한자리에 불러앉힌 건 ‘죽어가는 일본영화를 살리자’는 사명감. 1969년 스튜디오의 쇠락과 함께, 침체에 빠진 일본영화를 구하기 위해, 이들은 인디 영화사 ‘네 기사의 모임’을 만들었고, 함께 연출할 요량으로 <도라 헤이타>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나 구로사와 아키라가 <도데스카덴>의 참담한 흥행 실패로 크게 상심하자, 나머지 세 사람은 합의 하에 이 기획을 접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이제 세상을 떠난 동지들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이치가와 곤은 그 영화 <도라 헤이타>를 30년 만에 완성해냈다. 74번째 작품.
<도라 헤이타>는 마약과 매춘과 강도의 도시 호리소토에 급파된 치안감사 사무라이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고헤이타라는 이름을 두고 ‘도라 헤이타
베를린이 사랑한 감독들 [7] - 이치가와 곤
-
-
“애정이라는 마법이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우연일지 몰라도, 올 베를린에서 프랑스 감독들은 그다지 환대받지 못했다. 파스빈더의 희곡을 영화화한 <타는 바위에 떨어지는 물>의 프랑수아 오종이 “평가절하됐다”는 것은, 독일 언론의 자백이기도 하다. <작은 도둑> <귀여운 반항아>의 클로드 밀러(58) 역시 신작 <마법사의 방>(La Chambre Des Magiciennes)으로 “새로움이 없다”는 매질만 당하다가, 국제예술영화평론가협회(FIPRESCI)상을 수상하는 데 그쳤다. <마법사의 방>은 그러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메시지와 디지털 카메라 촬영 등의 신기술이 결합한, 주목할 만한 영화다. 그간 캐릭터 중심의 영화를 만들어온 클로드 밀러 감독은, 이번에도 소외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그 영혼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인류학자 클레어는 논문을 준비하다 까닭 모를 구토와 설사, 어지럼증에 시달리고
베를린이 사랑한 감독들 [6] - 클로드 밀러
-
“우리가 진정 원했던 것이 혁명이었을까”
영화는 15살 소년 미치오가 아버지를 여의고, 미션 스쿨 독립학원으로 전학오는 데서 시작한다. 아버지를 잃은 충격으로 말더듬 증세가 심해진 미치오는 따돌림을 당하지만, 중성적인 외모에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합창반 소프라노 야스오가 그의 곁에 선다. 친구가 된 두 소년은 합창반 지도 교사를 믿고 따르는데, 사토미라는 여인의 방문으로, 그가 과거 학생운동 전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폭탄 테러를 벌이고 도움을 청하러 온 사토미가 경찰에 쫓기다 그들 앞에서 자폭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방학 동안 목소리를 잃고 학교로 돌아온 야스오는 합창대회에 나가 혁명가를 부르자며 학생들을 선동하기 시작한다. 미치오는 그런 야스오의 목소리가 돼준다.
<놀라운 20세기>라는 TV 다큐시리즈를 만들던 93년부터 오가타 아키라 감독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생각 하나가 있었다. “이렇듯 잔인한 역사가 개인의 정신에 그리고 행동에 대체 얼마만한 영
베를린이 사랑한 감독들 [5] - 오가타 아키라
-
“선정적이라는 비판만은 못참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들에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 폴커 슐뢴도르프는 새 영화 <리타의 전설>(Die Stille Nach Dem Schuss)에서 ‘무너진 장벽, 그뒤’를 이야기하고 있다. 서독 적군파의 테러리스트 출신인 리타는, 동지들이 제3국으로 떠날 때 동독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테러금지협정이라는 걸림돌 때문에 리타를 공개적으로 보호할 수 없는 비밀경찰은 그녀에게 새 이름과 새 삶을 제공한다. 동독으로 건너간 리타는 서독을 동경하는 타티아나와 친구가 되지만, 새로운 신분도 그녀에게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리타의 전설>은 ‘테러리스트’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그 흔한 로맨스와 스릴도 없이, 줄곧 건조하고 냉정한 스토리텔링을 구사하고 있다. 독일 현지에서 호평과 혹평을 오가며, 가장 많은 화제를 불러모은 작품. 장벽이 무너진 이후의 독일사회를 리얼하게 그린 작품이 없었던 만
베를린이 사랑한 감독들 [4] - 폴커 슐뢴도르프
-
“목표는 센세이션이 아니라 캐릭터다”
‘미식축구’는 오래도록 정치와 전쟁을 이야기해 온 올리버 스톤에게 구미 당기는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필드에서 뛰고 뒹구는 선수들의 모습은, 사생결단으로 전투에 임하는 병사들의 모습이며, 구단주의 권력과 돈, 언론의 스피커가 뒤엉킨 거대 스포츠산업은 정치판에 흡사하니 말이다. 개인기 과시나 지나친 승부욕을 경계하고 팀 스피리트를 강조하는 코치, 가업으로 물려받은 구단을 어떻게 굴리면 돈이 될지가 유일한 관심사인 구단주의 만남은, 처음부터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다. 팀이 연패의 늪에 빠지고 선수들이 줄줄이 부상으로 실려가자, 구단주는 오만한 신참을 쿼터백 자리에 앉히고 완치되지 않은 선수들을 필드로 불러내는 등 독단으로 새 진용을 짠다. 코치와 구단주가 사사건건 부딪치고, 팀닥터까지 구단주편에 서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간다.
<애니 기븐 선데이>(Any Given Sunday)는 맹수가 우글거리는 거칠고 삭막한 ‘정글’의 이미
베를린이 사랑한 감독들 [3] - 올리버 스톤
-
“자유에 관한 영화가 자유를 줬다”
“폴란드 감독인 내가 지금 베를린에 심사위원으로 와 있고, 다음달엔 오스카상을 받으러 미국으로 간다. 이건 좋은 징조다.” 올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이자, 오스카 평생공로상 수상자인 안제이 바이다는, 그의 영화가 국경을 넘어 다른 민족까지 관객으로 포섭해 왔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었다. 평생을, 민족과 사회에 대한 걱정에 바친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 얘기에 믿음을 싣게 된다. 안제이 바이다는 자신의 레지스탕스 경험을 영화화한 <세대>로 데뷔해, 폴란드 민족진영의 주도로 일어난 바르샤바 봉기를 다룬 <지하수도>, 2차대전 직후 민족 내부의 이념 갈등을 그린 <재와 다이아몬드> 등을 내놓았다. 70,80년대 사회 상황을 현실적으로 담아낸 <대리석의 사나이> <철의 사나이>도 빠뜨릴 수 없는 대표작이다.
이번 베를린영화제에 ‘오마쥬’의미로 특별 상영된 99년작 <판타데우스>(Pa
베를린이 사랑한 감독들 [2] - 안제이 바이다
-
베를린, 거장에게 바친다
올 베를린영화제는 유난히 거장을 사랑했다. ‘오마쥬’라는 주석을 단 특별상영 프로그램 중에는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잔 모로의 작품도 있었지만, 동·서양을 대표하는 노장 두 사람의 신작이 나란히 올라 이채를 띠었다. 폴란드의 역사, 민주주의, 자유에 대해 예술적인 통찰을 보여준 안제이 바이다 감독, 그리고 휴머니즘의 영화들로 74편의 긴 필모그래피를 이룬 성실파 이치가와 곤 감독이 그들이다. 안제이 바이다의 <판타데우스>는 폴란드에서 <타이타닉>을 앞질러 6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경이적인 작품. <도라 헤이타>는 이치가와 곤 감독이 구로사와 아키라 등 30년 전 동지들과 함께 쓴 시나리오를 뒤늦게 영화화한 것이다. 이들은 칠순, 팔순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영화에 대한 열정과 의욕을 과시해, 베를린에 모여든 젊은 영화인과 기자단을 감동시켰다.
늘 논란을 몰고 다닌다는 점에서, 이들보다 한수 위인 올리버 스톤과 폴커
베를린이 사랑한 감독들 [1]
-
에잇! 인간아, 이 인간아
시트콤이란 무엇인가? 이는 일반적으로 30분가량으로, 일관된 등장인물과 배경에, 매회 다른 시추에이션(상황)으로 엮어가는 연속물 코미디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순풍 산부인과>는 시트콤인가? 고정적인 인물만 해도 14명, 10명 가까이되는 '객원' 캐릭터들. 어떤 시트콤보다 많은 출연자들이 등장함에도 누구도 서로 닮아 있진 않은 <순풍…>의 캐릭터들. 아무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영규의 휑한 가운데 가르마를 보기만 해도 웃음이 터지는 이유, 홈 시트콤의 평범함과 공식적인 성질을 희생하여 ‘인물 사실주의’ 감각에 호소하는 태도, 이것이 <순풍…>을 단순한 시트콤(Situation comedy)이라기보다 건국 이래 가장 훌륭한 캐릭터 코미디(Character comedy)로 부르고 싶은 이유다.
지명
순풍 산부인과 원장. 다혈질로 조그만 일에 잘 흥분하고 평소에는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용녀 사랑해’가 쓰인
500회 맞는 순풍 산부인과 [4] - 캐릭터 14인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