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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분 동안 몸을 사릴 줄 모르는 <엔터 더 이글>은 분명 홍콩 액션물의 적자다. 동유럽까지 찾아가 평원에서 고산까지 가리지 않고 쿵후 액션을 심어놓은 <엔터 더 이글>은 홍콩영화계를 대표해서 실종된 액션 명가의 자존심을 되찾아오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다. 프로페셔널 대도와 킬러, 소매치기 커플, 보스.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캐릭터들이지만, 적과 동료가 바뀌면서 박물관에서 경찰서로 그리고 다시 비행선으로 럭비공마냥 옮겨지는 다이아몬드를 쫓는 이들의 사투 장면이 뿜어내는 스피드의 매력은 홍콩 액션을 한물간 장르라고 싸잡아 폄하하기엔 망설여질 만큼 눈길을 잡아챈다.
문제는 점차 상승하는 액션의 강도와 바뀌는 인물들의 동선을 뒷받침할 만한 동기가 효과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반부에 끼어 있는 멜로와 코믹적 요소가 후반부의 다이아몬드 대신 돌연 복수를 외치는 인물들의 감정까지 감당하진 못한다. 폭발 직전 비행선에서 피범벅된 얼굴을 한 채 태연히 담배를 무
동유럽까지 찾아가 쿵후 액션을 심어놓다, <엔터 더 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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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힉스의 야심은 장대했다. <샤인>으로 선댄스를 시끄럽게 했던 감독은 차기작 <삼나무에 내리는 눈>에다 여러 장르를 비벼넣는다. 살인사건을 던져놓고 그 비밀을 풀어가는 걸 보면 미스터리이고, 법정에 선 무고한 혐의자 가츠오가 가까스로 누명을 벗는 과정을 놓고보면 법정드라마다. 이쉬마엘과 하츠오의 가슴 저릿한 로맨스가 그려지는가 하면, 2차대전 당시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했을 때 미국에 사는 일본인들의 수난사가 또 그 사이를 비집는다. 이렇게 방대하고 산만한 이야기들을 스콧 힉스는 이미지로 엮어낸다. 이쉬마엘이 겪은 2차대전의 참상이나 일본인의 수난사가 몇개의 장면으로 요약 발췌된다. 말하자면 감독은 짧은 이미지로 긴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했다. 빛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한 촬영은 오랫동안 올리버 스톤과 작업했던 촬영감독 로버트 리처드슨의 솜씨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지가 영화의 거의 전부가 돼버렸다는 데 있다. 방만한 이야기는 하나로 묶이지 못한 채 제 갈
알맹이 없는 방만한 이야기, <삼나무에 내리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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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간 돼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꼬마돼지 베이브2>는 원제 그대로 도시 한복판에 떨어진 꼬마돼지 베이브의 좌충우돌 모험담이다. 돼지고기로 식탁에 오르는 숙명(?)을 벗어나 양치기 돼지로 색다른 존재가치를 발견해가는 전편을 전제로 하되, 재탕에 그치기 쉬운 속편의 우를 피해가려 고심한 산물이랄까. 농장에서 도시로 무대를 옮긴 속편은 순박한 시골뜨기의 수난기에 가깝다. 양치기는 물론 돼지도 드문 살풍경한 도시에 간 베이브, 도시 사람들은 물론 도시 동물들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수난기의 시작은 공항. 마약 단속견이 짖는 바람에 붙잡힌 베이브 일행은 비행기를 놓치고 만다. 졸지에 도시의 미아가 된 베이브와 하겟 부인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중심가, 동물 사절인 대부분의 숙소를 지나 겨우 허름한 호텔에 안착한다. 동물에 후한 여주인 덕에 쉴 곳은 찾았지만 앞일은 막막하다. 어릿광대 주인을 둔 오랑우탄과 침팬지, 떠돌이 개와 고양이 등 각박한 도시생활에 찌든 동
꼬마돼지 베이브의 좌충우돌 모험담, <꼬마돼지 베이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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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나의 마을>은 정말 상투적인 표현을 빌자면 한폭의 수채화 같은 영화다.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와 동심을 받쳐주는 신비로운 현상들이 어우러져 1940년대 말 일본 시골의 풍경 속으로 안내한다. 물론 이 시대는 동아시아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이 힘겹게 살던 시기였다. 영화 초반부는 짐마 할아버지가 ‘맥아더 장군’을 원망하는 대사나 쌍둥이의 급우인 하쯔미의 가난한 삶을 통해 그러한 역사의 단편을 들춰내기도 한다. 하지만 감독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아이들의 삶이다. 영화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짐마 할아버지의 죽음,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로 대변되는 가족의 삶, 쌍둥이가 겪어야 했던 질병과 온갖 말썽들 그리고 성에 대한 호기심까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길게 찍기의 미학을 통해 찬찬히 그리고 과장되지 않게 동심의 세계를 전해준다. 그 위에 덧붙여지는 것은 일본 특유의 설정들이다. 바람을 일으키는 신령 같은 세 할머니의 등장이나
한폭의 수채화 같은 영화, <그림 속 나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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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이 살고 젊은 나이에 죽어 아름다운 시체를 남긴다.”
보니와 클라이드, <트루 로맨스>의 클레런스 같은 부류의 막 가는 청춘을 위한 이 슬로건은 뤽 베송 감독이 잿더미 속에서 부활시킨 15세기 프랑스 성녀 잔 다르크에게도 꼭 들어맞는다. 뤽 베송이 연인 밀라 요보비치의 육체에 불어넣은 잔 다르크의 영혼은 흡사 고조기에 접어든 조울증 환자다. 구원받고 구원하려는 신열에 들떠 한시도 자신을 가만두지 못하는 그녀는 잠자지 않아도 피곤을 모르며 허벅지에 화살이 꽂혀도 아픈 줄 모른다.
1899년 이래 열여덟편에 이르는 ‘잔 다르크 영화’가 만들어진 사실이 웅변하듯 오를레앙의 처녀는 스크린이 누구보다 경애하는 성인(聖人)이다. 칼 드레이어(<잔 다르크의 수난>(1928))의 잔이 지복에 닿은 순교자였고, 빅터 플레밍(<잔 다르크>(1948))의 여성 전사가 페미니스트의 원조였으며, 오토 프레밍거(<성녀 잔>(1957))의 히로인이 감당
스타일의 소화불량, <잔 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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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의 재미, 5%의 교훈.” 나카노 히로유키 감독의 신조답게, <사무라이 픽션>은 순수한 오락 영화다. 캐릭터들은 만화 같고, 영화의 리듬은 MTV와 일치하며, 영화음악은 록에서 댄스 비트까지 오간다. 히로유키 감독은 평소 일본영화의 ‘천황’ 구로사와 아키라를 흠모한다고 전해진다. 감독은 <사무라이 픽션>에서 일본의 전통 시대극 분위기를 흑백 영상으로 살리되, 철저하게 찰나적 재미를 추구한다. 주인공 헤이지로는 친구의 복수를 다짐하지만, 칼을 다룰 줄도 모른다. 엉뚱하게 돌팔매 연습만 죽어라 한다. 그리고 징징대는 목소리로 “꼭 없애버릴 테다”라고 뇌까린다. 황당함의 견지에서 한편의 만화다.
<사무라이 픽션>은 스타일이 살아 있는 영화다. 이야기 구조엔 별로 신경쓸 필요가 없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도 웃고 즐길 수 있으니까. 여기서 일본 시대극의 규칙은 무시되거나 아예 비틀린다. 잠복중이던 닌자는 천장에서 몸을 날린 뒤 바닥에 철퍼덕
한편의 ‘사무라이 코미디’, <사무라이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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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가 실종됐다. 이건 큰일인가. 사건 축에도 못 끼는가. 의외의 소득인가. 즐거움인가. <플란다스의 개>에선 그 모든 것이다. 강아지를 생의 마지막 위안으로 여기던 노파에겐 죽음이고, 그보단 덜 쓰라리다 해도 강아지를 동생처럼 돌보던 아이에겐 사랑의 상실이다. 반면 신경 예민한 시간강사에겐 소음 제거라는 목표의 달성이고, 개의 육질에 매혹된 경비원과 부랑자에겐 영양 보충의 귀한 계기다. 엉뚱하게도 경비실 여직원에겐 자아실현의 기회도 된다. <플란다스의 개>는 강아지 실종이라는 작은 사건을 아파트라는 소시민의 생활공간에 던져놓고, 멀쩡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예기치 못할 소동에 빠져드는지를 관찰하는 짓궂은 농담이다.
영화아카데미 11기 출신인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이름난 단편 <지리멸렬>에서처럼, 생활공간에서 일어난 일상적 사건을 통해 사람들의 비루한 욕구를 유머러스하게 극화하고 있다. 제목 때문에 <플란다스의 개>에서 따뜻한 동화의 위안
소시민들의 비루한 욕구, <플란다스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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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널리 알려진 감독은 아니지만 앨런 루돌프는 미국 인디영화계에서 상당히 인정받는 인물이다. 70년대 <내쉬빌> 등 로버트 알트먼 영화 4편의 조감독으로 입문, <메이드 인 헤븐> <위험한 상상> <미세스 파커> 등을 만든 루돌프는 97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애프터글로>를 통해 건재함을 과시했다. <브루스 윌리스의 챔피언>은 그가 <위험한 상상>에서 같이 작업했던 브루스 윌리스를 파트너 삼아 만든 신작. 앨런 루돌프의 시나리오를 본 브루스 윌리스가 제작에도 직접 참여했고 닉 놀테, 바버라 허시, 알버트 피니 등 중량감 있는 연기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영화의 원작인 커트 보니깃 주니어의 소설은 60년대 미국 반문화운동이 70년대 풍요와 성공을 추구하는 소비주의 문화에 흡수되는 과정을 풍자한 작품. 주인공 드웨인 후버는 그 전형이 될 만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 자본주의의 첨병인 자동차 판매업
60년대와 70년대의 극단적 대립, <브루스 윌리스의 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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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덜룩한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끈적거리는 쾌감까지 포기할 순 없다. 스릴러를 즐기기 위한 기본자세는 스크린에 시선을 맡겨두고 꼬인 매듭을 풀기 위해 머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땀에 절어 있는 몸뚱이를 일으킬 때 느슨한 정신을 긴장케 하는 한기까지 파고든다면 아주 훌륭한 관람이 될 테지만, <이노센스>는 그 경지엔 이르지 못한 범상한 범죄스릴러다.
<이노센스>는 한 남자의 아내와 정부가 공범이 되어 남자를 죽인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실은 남자는 죽지 않고 살아나, 심장병을 앓던 아내가 쇼크사해버린다. 아내의 재산을 노린 릭과 정부 엘시의 음모였던 것이다. 전반부는 영화 <디아볼릭>의 설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내를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릭과 엘시는 서로 틀어지고 결국 감옥과 재판정에 서게 된다. 신문기자 엘든의 증언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르는데, 엘든의 증언까지 계산해놓은 음모의 전모는 마지막에 가서
범상한 범죄스릴러, <이노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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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하얀 눈이 수북이 뒤덮인 산모퉁이를 비집고 달려오던 기차가 요란한 기적소리를 내지른다. 한칸짜리 증기기관차가 힘에 부쳐보이듯, 검은 연기와 기적소리는 이내 흩날리는 눈 속에 스며들고 만다. 기차가 멈춰 선 곳은 홋카이도 지선의 종점인 폐광촌 호로마이역. 하얀 눈과 어울려 낡아 보이긴 하지만 철도원 제복의 맵시가 멋스러운 역장이 어김없이 기차를 맞는다. 호로마이역에 인생을 묻은 철도원 사토 오토마츠다.
오토마츠의 풍모는 촌스러운 시골 역장의 모습이 아니다. 일면 근엄해보이기도 하지만 지그시 보고 있으면 정도 많고 고운 인상이다. 모두들 대처로 떠났지만 호로마이역에 청춘을 묻고 정년퇴임을 맞이하면서도 철도원의 기풍을 지키고 있다는 것도 호감이 간다. 이처럼 자신을 곧추세워온 오토마츠의 인생을 보노라면 짐짓 가슴이 뭉클할 법도 하다.
하지만 이 멜로드라마의 배경에 깔리는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눈감아 주긴 어렵다. 오토마츠에게서는, 전후의 폐허를 딛고 ‘오늘의
동화적인 발상과 환상적인 표현, <철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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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다. 정말 대단한 장관이다.” 이라크 첫 공습을 수행한 미군의 소감이 그랬다. 과연 걸프전을 낭만적인 불꽃놀이나 무해한 전자오락에 비길 수 있을까. 잠시 잠깐 해외 뉴스를 오르내리던 걸프전의 이미지와 정보 뒷편에 뭔가 다른 사연이 숨어있을 법도 하잖은가. 미 국방성의 여과장치로 거르지 않은 걸프전 원액에 듣도보도 못한 화학 처리를 한 영화 <쓰리 킹즈>의 시작은 그런 의문에서 시작됐다. <쓰리 킹즈>는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전쟁 액션 영화로 지칭하긴 마뜩찮다. 아예 휴전 직후를 이야기의 기점으로 잡고 있고, 전쟁 영화 특유의 무게잡는 스타일이나 구태의연한 스토리텔링도 구사하지 않는다. 곳곳에 폭소를 터뜨리게 할 지뢰가 묻혀 있는데, 그렇다고 무작정 웃게나 만드는, 생각없는 코미디도 아니다. 날선 풍자와 비난이 따끔거리기 때문이다.
쿠웨이트 왕족의 금괴가 숨겨진 후세인의 비밀 벙커를 습격하자는 계획을 세우며 결성된 ‘쓰
흥미진진한 액션 모험 영화, <쓰리 킹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