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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디테일에 있다

<캐롤>의 미감(美感)은 이야기와 어떻게 어울리는가에 대해 미술감독과 의상감독이 말하다 - <파도인> 전수아 미술감독, <협녀, 칼의 기억> 한아름 미술감독,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함현주 의상감독

사진제공 더쿱.

<캐롤> 미술, 의상 정보

미술 / 주디 베커 의상 / 샌디 포웰 주요 촬영지 /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다운타운, 하이드 파크, 오버 더 라인, 와이오밍, 시카고 드레이크 호텔, 켄터키주 알렉산드리아

전수아, 함아름 미술감독, 함현주 의상감독(왼쪽부터).

전수아 미술감독

<오로라공주>(2005), <세븐 데이즈>(2007), <초능력자>(2010), <베를린>(2012), <숨바꼭질>(2013) 등의 작품에 미술감독으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지난해 11월 촬영을 마무리한 허정 감독의 <장산범>(2016)과 왕가위 감독의 신작 <파도인>(2016)이 있다.

한아름 미술감독

<하녀>(2010)에 미술실장, <관상>(2013)에 세트실장으로 참여했고 <협녀, 칼의 기억>(2013)과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4)의 미술감독을 맡았다. 개봉을 앞둔 작품으로는 <해어화>(2016)가 있으며 최근 이병헌, 공효진이 주연을 맡은 <싱글라이더>(2016)의 프리 프로덕션을 준비하고 있다.

함현주 의상감독

<킬러들의 수다>(2001)로 의상감독을 시작했다. 최근작으로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탐정: 더 비기닝> (2015)이 있다. 2016년 개봉예정작 중에서는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섹션에 초청된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2016)의 의상을 맡았다.

사진제공 더쿱.

토드 헤인즈의 <캐롤>은 다양한 관점에서 곱씹을 거리를 제공하는 영화다. 이 작품이 멜로드라마라는 장르 안에서 거둔 성취,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과 어떤 관계성을 맺고 어떤 차이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1041호 기획 기사에서 얼마간 전했다. 이 지면에서는 <캐롤>의 미술과 의상에 대한 논의를 확장해보려 한다. ‘아름다움’이라는 수식어로 설명하기에 벅찬 수많은 함의와 상징이 영화의 곳곳에 숨어 있다. 이 비밀스럽고 황홀한 미로의 출구를 찾기 위해 지금 현재 충무로, 혹은 해외 영화계의 현장에서 활발하게 작업 중인 미술과 의상감독들을 소환했다. 왕가위 감독의 신작 <파도인>을 작업한 전수아 미술감독과 <협녀, 칼의 기억>(2013)의 한아름 미술감독,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의 함현주 의상감독이 그들이다. 캐롤의 투피스와 테레즈의 체크무늬 베레모에 얽힌 사연이 궁금하다면, 이들의 대화에 주목하시길. 영화의 이모저모를 다시 보기 위해 극장을 찾고 싶을 만큼 흥미로운 해석이 한가득이다.

<씨네21>_영화를 본 소감으로부터 시작해보자.

한아름_부드럽고 섬세한 퀴어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물속에서 잉크가 서서히 퍼져나가는 느낌이랄까.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여성이 서로 알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영화가 표현하는 방식이 좋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함현주_사실 이 대담을 제안받기 전에 <캐롤>을 보려고 미리 예매해둔 상태였다. <브로크백 마운틴>(2005)이나 <로렌스 애니웨이>(2012)처럼 남자와 남자, 혹은 이성간의 사랑으로 시작했으나 한 사람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를 다룬 영화들은 더러 있어왔지만, 여성들의 사랑을 본격적으로 다룬 멜로가 드물었기 때문에 <캐롤>이 영화적으로 어떻게 그녀들의 사랑을 표현하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다 보고 나서는 굉장히 아름다운 멜로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수아_앞에서 얘기를 다 해서 짧게 덧붙이려 한다. (웃음) <캐롤>은 두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50년대 미국 사회의 풍경과 집단주의, 가족간의 관계나 서민들의 생활까지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여운이 깊이 남았다.

두 사람의 관계에 따라 옷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씨네21>_<캐롤>은 1952년 뉴욕의 연말 시즌을 배경으로 출발하는 영화다. 미국의 연말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분위기가 이 영화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기엔 다소 침체되고 차분한 느낌이랄까. 이러한 시공간적 배경으로부터 어떤 생각을 했나.

한아름_먼저 195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 주목하게 되더라. <캐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회복기의 도시를 조명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한 연출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영화가 크리스마스 시즌을 보내는 캐롤(케이트 블란쳇)과 테레즈(루니 마라)의 모습을 조명하는 방식은 마치 인형의 집에 갇혀 있는 인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캐롤은 가정사에서 소외되어 있고 가족들에게는 문제가 있는 여성처럼 여겨진다. 테레즈는 아직 자의식을 형성하지 못한 여자다. 사회에서 가장 약자처럼 보이는 두 여성을 사랑에 빠지게 함으로써 당시의 미국 사회가 금기시하고 억압하던 것들을 보여주려 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이 크리스마스 시기의 프랑켄베르그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서 만난다는 건 상징적이다. 마치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전수아_나는 이 영화가 연말 시즌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데 주목하기보다 처음부터 캐롤과 테레즈의 공간에 대한 명확한 컨셉을 두고 출발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예를 들어 테레즈가 머무는 공간을 보면 늘 사람이 북적거리지만 굉장히 차가운 느낌이다. 백화점 입구에 들어설 때의 회벽도 그렇고 백화점 안에는 박제된 느낌을 주는 인형들이 있다. 심지어 남자친구 리처드와 함께 자전거를 타는 공간도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가득해 싸늘하고 인조적인 느낌을 준다. 캐롤의 경우 굉장히 인상 깊었던 게 부엌에서의 장면이다. 패턴이 있는 벽지를 배경으로 남편과 딸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데 캐롤만 그 공간에 어울리지 못하는 게 느껴졌다. 이처럼 인물이 처한 상황이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우는 소재에 의도적으로 반영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현주_‘하고많은 시기 중에 왜 연말을 배경으로 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12월이 지나면 다시 1월이 시작되고 그로부터 열두달이 순환한다. 끝과 시작의 경계선에 있는 달이기 때문에 12월을 배경으로 한 게 아닌 게 싶다. 캐롤이 테레즈에게 보낸 편지에도 그런 말이 있지 않나.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에요.’ <캐롤>을 보면 영화 곳곳에서 이러한 순환의 테마를 감지할 수 있다.

한아름_캐롤이 (테레즈의 추천을 받아) 딸에게 사준 장난감 기차도 계속 순환하지 않나.

함현주_여행도 마찬가지다. 동부에서 서부로 여행을 떠나지만, 아무리 벗어나고 싶어도 캐롤은 끊임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씨네21>_상류층과 중산층, 이미 가정을 이룬 중년 여성과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20대 여성 등 캐롤과 테레즈를 둘러싼 수많은 대립항들이 있다. 이러한 차이가 그녀들의 의상에도 적극적으로 반영된다는 느낌이다.

함현주_<캐롤>의 시대적 배경은 1952년이지만 1940년대부터 60년대까지의 룩이 혼재 되어 있다. 원래 ‘룩’이 무 자르듯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의 룩이 늘 산재하고 교차하는 것이니까. 캐롤이 친구 애비와 함께 차를 타고 하비 가족이 있는 파티 장소로 가면서 “이러고 나타나면 어머님 표정이 가관이겠네. 집에 가서 갈아입고 갈까?”라고 말한다. 이 말이 무슨 말일까 싶었는데 파티 장면을 보니 이해가 되더라. 파티에 캐롤이 입고 가는 옷은 디오르의 ‘뉴 룩’(1947년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창조한 새로운 여성복 스타일을 지칭하는 단어. 가는 허리와 풍성한 치마를 강조한 이 룩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여성복에서 사라졌던 화려함과 여성미를 강조한다.-편집자)을 연상케 하는, 당시로서는 굉장히 모던한 투피스다. 같은 장소의 다른 귀부인들은 비비안 리가 입을 것 같은 1940년대 스타일의 우아한 드레스 차림이다. 그러니까 캐롤은 어떠한 장소와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 하는, 그 시대 여성치고는 자아가 강한 사람이다. 그런 점이 확실하고 선명하게 그녀가 입는 옷에 반영되어 있다. 테레즈가 입는 옷들은 사실 현대 복식에 가까운 옷들이다. 영화를 보면 캐롤이 테레즈에게 이름이 독특하다고 말하자 그녀가 ‘테레즈는 체코식 이름’이라고 말하지 않나. 테레즈가 이민자의 후손이라는 짐작이 가능한 대목이다. 영화에서 남자친구 외에 테레즈의 어떤 가족도 소개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녀가 여전히 이 미국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인지 테레즈가 입는 의상도 정체성이 모호하다. 특정 시기의 어떤 룩에 해당되지 않고 그저 모던하고 캐주얼한 느낌이다.

한아름_나는 의상감독님처럼 디테일한 부분을 보지는 못했지만 개념적으로 접근해보자면, 등장인물들의 욕망과 혼돈이 그들이 입고 있는 의상의 패턴과 색상에 반영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쉽게 보면 욕망의 색깔은 ‘레드’다. 캐롤이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말할 때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면, 그 ‘레드’가 여행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테레즈에게 옮겨가더라. 그리고 무언가를 결정할 수 없거나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 왔을 때 인물들의 의상에 체크 패턴을 많이 쓴 것 같다.

함현주_나도 공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테레즈에게 체크 패턴을 많이 썼다는 생각을 했다. 반면 캐롤의 패턴은 ‘도트’ 무늬다. 상류층 여성이라는 점을 반영하듯 프린트된 도트 패턴을 사용한 게 아니라 자카르(패턴을 넣어 직조하는 방식)를 사용한 도트 패턴을 연속적으로 그녀의 옷에 사용했다. 캐롤과 테레즈의 의상에 사용하는 소재도 다르다. 캐롤의 옷에는 울, 모피, 광택이 나는 소재 등을 사용하는 반면 테레즈는 상대적으로 블라우스, 면스커트 등의 매트한 소재를 많이 썼더라. 그런데 두 사람이 여행을 떠났을 때, 캐롤이 입은 로브(실내에서 입는 무릎 아래까지 오는 길이의 느슨한 가운)에서 처음으로 테레즈가 주로 입었던 체크 패턴이 등장한다. 두 사람의 관계에 따라 서로를 상징하는 패턴을 주고받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전수아_의상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 영화의 앵글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다. <캐롤>은 유리와 거울이 많이 등장하는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테레즈가 바깥 풍경을 보는 장면이나 그녀가 밤에 신문사에 가는 장면을 보면 모든 공간이 뿌연 유리로 갇혀 있다. 처음에는 왜 이런 방식으로 표현을 했을까 싶더라. 그러다가 영화의 후반부, 캐롤이 양육권을 포기한 뒤 카페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을 보는데 마치 테레즈가 처음 등장했을 때 유리로 구획지은 공간에 갇혀 있던 것처럼 연출했더라. 캐롤은 이 장면 이전까지 어떤 앵글에서든 유리에 갇힌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아마 거침없이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려 했던 그녀의 심리를 반영한 연출이 아닐까 싶다. 반면 테레즈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창가에 비치는 모습이 흐릿하고 뿌옇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그녀의 삶을 표현하기 위한 의도적인 연출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함현주_심지어 캐롤의 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줄 때도 그렇다. 캐롤이 앉아 있는 좌석의 창가는 굉장히 깨끗하다. 그런데 테레즈가 앉아 있는 쪽은 뿌옇다. 처음에는 앵글 때문인가 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캐롤이 애비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장면을 보면 아예 유리창 자체가 없다. 오픈카를 타고, 시어머니 흉을 보며 자유롭게 달리지 않나. (웃음) 테레즈와는 굉장히 큰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수아_캐롤과 테레즈가 그들 서로가 아닌 제3자와 얘기할 때 앵글을 잘라버리는 연출도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조차 투숏을 잡지 않더라. 애비가 테레즈를 데리러 올 때도 그렇고, 캐롤과 변호사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도 그렇다. 제3자는 캐롤, 테레즈와 한 화면에 함께 존재하지 못한다. ‘너희들은 제3자잖아’라는 식으로 의도적으로 그들을 배제하는 앵글이 많더라.

색다른 소재의 멜로영화가 보고 싶다

<씨네21>_캐롤과 테레즈의 관계는 두 사람이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여행을 떠나며 깊어진다. 공간의 이동과 두 사람의 감정적 변화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다고 느꼈나.

한아름_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한다고 하면 차가운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 가는 느낌도 있고,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좀더 자연적인 곳으로 향한다는 느낌도 든다. 두 사람이 여행을 떠나며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도시의 밀도가 차츰 낮아진다는 생각을 했다. 대도시의 강렬하고 화려한 색감과 패턴들을, 그녀들이 서부로 향할수록 조금씩 걷어내더라. 더불어 같은 코트를 입더라도 뉴욕에서는 굉장히 화려하게 보였는데 서부에서는 공간과 조화롭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전수아_나는 솔직히 동부건 서부건 토드 헤인즈 감독이 의도적으로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뉴욕이라고 했을 때 연상되는 거리들, 반드시 보여주는 장소들이 있지 않나. 그런 뉴욕의 유명한 명소와 화려함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정작 그녀들이 여행을 떠나 머물게 되는 공간- 이를테면 시카고의 드레이크 호텔- 은 명확하게 보여주더라. 워털루, 아이오와 등 수많은 장소를 거쳐감에도 이 영화에서 특정 지역은 표지판에 불과하다. 그녀들이 어떤 공간으로 향하든 이 영화의 지향점은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시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아름_자신이 머물던 곳을 떠났다면 새롭게 당도한 곳의 풍경이 와이드하게 펼쳐져야 하는데…. 보이는 건 룸, 룸, 호텔룸뿐이다. (웃음)

함현주_이 영화에서는 방향성의 문제도 중요한 것 같다. 뉴욕은 미국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나라이고, 북으로 올라가면 캐나다가 있어 국경을 넘어야 한다. 남부에는 캐롤의 남편이 함께 연말을 보내자고 제안했던 플로리다가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서부밖에 없다. 어쨌거나 <캐롤>은 어느 장면 하나도 ‘그냥’ 연출한 것이 아닌 것 같다. 모든 장면에는 나름의 의도가 있고, 수많은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전수아_맞다. 철저하게 계획된 영화다. 테레즈가 여행에서 돌아온 뒤 집 벽을 에메랄드그린으로 칠하잖나. 그 색이 캐롤의 여행 가방 속에서 테레즈가 보았던 니트의 색감과 거의 흡사하다. 심지어 오프닝 타이틀 활자의 색감도 에메랄드 그린이다. <캐롤>을 보면 벽지부터 시작해서 녹색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는데, 이 영화의 톤 앤드 매너를 보여주는 색감이 아닐까 싶다.

<씨네21>_멜로드라마 장르의 자장 안에서 <캐롤>은 어떤 작품으로 다가왔나.

함현주_<캐롤>을 보며 관습적이고 수용적인 형태의 멜로는 요즘 관객에게 더이상 와닿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21세기 멜로영화의 큰 화두가 아닐까 싶다. <로렌스 애니웨이>처럼 여성의 정체성을 가진 생물학적 남자, 그리고 <그녀>(2013)처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이버상의 인물과 사랑을 나눈다는 것. 이처럼 사랑의 대상이 다채로워질 때 사랑이라는 감정이 더 효과적으로 표현될 수 있지 않나 싶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다채로운 멜로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상업적으로 제작이 어려우려나?

전수아_투자가 안 되지 않을까.

한아름_기존 멜로영화들이 사건을 좇아서 진행되었다면, 이제는 그런 방식의 멜로들이 좀 진부해지지 않았나 싶다. 색다른 소재의 멜로영화가 많이 나와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전수아_이제는 멜로영화에서 사건보다는 디테일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캐롤>은 디테일을 절제할 줄 아는 미덕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멜로드라마 장르의 정수를 보여주는 추천작 여섯편

<세비지 그레이스>

전수아 미술감독 추천작

<세비지 그레이스>(2007)와 <아이 엠 러브>(2009)

“<세비지 그레이스>는 아버지에 대한 부성애를 다른 남자에게서 찾는 아들 토니(에디 레드메인)와 남편에 향할 애정을 아들에게 쏟는 엄마 바바라(줄리언 무어)의 이야기다. 토니가 유년 시절 엄마가 지켜보는 가운데 목욕을 하고 그녀에게 아침을 가져다주는 장면의 의상과 공간 연출이 너무나 아름다운 작품이다. <아이 엠 러브>는 밀라노의 재벌 가문에 시집온 러시아 여인 엠마(틸다 스윈튼)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다. 엠마가 살고 있는 대저택이라는 공간의 분위기와 그곳을 채우는 공기의 정서를 감각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의상도 훌륭했고.”

<퐁네프의 연인들>

한아름 미술감독 추천작

<퐁네프의 연인들>(1991)과 <이터널 선샤인>(2004)

“일상적인 느낌의 멜로영화보다는 감정적으로 센 영화들을 좋아한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원초적인 감각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좋았던 작품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빛과 어둠을 통해 기억을 지워나가는 등 비현실적인 표현 기법들이 당시에는 무척 센세이셔널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로렌스 애니웨이>

함현주 의상감독 추천작

<로렌스 애니웨이>(2013)와 <그녀>(2014)

“두 작품 모두 멜로드라마 장르의 관습적인 요소들을 여우처럼 영리하게 이용한 것 같다. 그리고 시각적으로는 컬러의 활용이 인상적이었다. 먼저 <그녀>의 경우 영화를 보고 나면 머릿속에 밝은 톤의 핑크빛이 떠오른다. 이 핑크빛의 이미지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여성의 목소리를 지닌 인공지능에게 굉장히 전략적으로 덮어씌운 것이다. <로렌스 애니웨이>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색은 로렌스의 보랏빛 코트일 것 같다. 블루와 레드 사이에 위치하는 보랏빛 코트를 그가 입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성적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 로렌스 커플이 쟁취해낸 거룩하고도 지독한 사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색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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