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자>를 찾아서
-<옥자>를 자꾸 ‘봉자’라고 잘못 부르게 됩니다. 저만 그런가요?
=많아요. ‘봉자’, ‘영자’, ‘순자’ 등등. (웃음)
-캐릭터 작명 과정을 즐기시는 걸로 알아요. <옥자>에는 동물 옥자와 소녀 미자가 나오고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실종된 반려견 이름이 순자였는데요. <옥자>(OKJA)라고 하면 미국 관객은 이름인 줄도 모르겠어요.
=영어권에선 재미있어해요. ‘오케이 자’라고도 읽고 틸다 스윈튼을 비롯한 출연배우들도 “억자”라고 발음하며 신기해해요. 최고로 촌스러운 일제강점기 작명 패턴의 이름이라고 설명했는데 미국에서도 마거릿 같은 이름이 도시 여성들이 질겁하는 구식 이름이라고 하더라고요.
-티저 예고편에서 옥자는 거대한 돼지로 보이는데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동물인가요?
=유전자 조작은 아니고 친환경 육종이랄까, 자연적 돌연변이를 교배해서 태어난 돼지죠.
-미자가 가족 같은 옥자를 찾아 나선다는 전제만 들으면 ‘플란다스의 돼지’가 될 것도 같고 <괴물>의 후속 ‘애물’이 될 것도 같아요. 또 언론 플레이를 하는 자본의 모습이 언뜻 예고편에 스쳐가는 걸로 봐서는 <설국열차>를 넓게 펼쳐 놓은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고.
=‘괴돈’인가요? (웃음) <옥자>에서 틸다 스윈튼의 캐릭터 루시 미란도는 옥자를 태어나게 한 다국적 기업 CEO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설국열차>의 윌포드(에드 해리스)와 비슷한 면이 있어요. 한편 미자 입장에서 <옥자>의 스토리는 강원도에서 맨해튼까지 가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와 비슷한 여정이니 <설국열차>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꼬리칸부터 머리칸까지 가는 경로와 유사하죠.
-동물 찾는 모험은 <플란다스의 개>, 자본과의 싸움은 <설국열차>, 가족 재회 프로젝트로 보면 <괴물>이군요.
=의식한 건 아닌데 엮여든 거죠. (웃음) <괴물>만큼 가족이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고 사랑 이야기입니다. 저의 첫 사랑영화. 근데 상대가 동물이야. (웃음)
-미자와 옥자의 멜로드라마군요. 보통 할리우드영화에 나오는,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반려동물을 넘어서는 끈끈하고 본능적인 관계로 보면 될까요?
=소녀와 동물 하면 디즈니적 그림을 연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또 저의 과거 영화를 보셨다면 그런 기대는 없겠죠.
-<설국열차>의 메이슨에 이어 틸다 스윈튼에게 나치 선전상 괴벨스를 연상시키는 역할을 주신 것 같은데, 배우에 대한 애정과 별개로 “인간 중에 나와 가장 이질적인 존재”라는 인상을 받으시는 걸까요?
=이번에도 ‘여자 허문도’죠. (웃음) 아, 최근 작고하신 걸로 아는데 유가족께는 죄송합니다. <설국열차>와 차이라면 메이슨 역은 틸다를 캐스팅하기 전부터 존재했고 캐스팅 과정에서 남성 중년 배우들을 만나기도 했어요. 그러다 도중에 젠더가 바뀐 경우라면 <옥자>는 처음부터 틸다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본인과 의논하며 쓴 캐릭터예요. 한국으로 치면 송강호 선배처럼 언어의 뉘앙스와 즉흥대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탁월한 배우라 대사를 함께 만들고 다듬고 후시녹음 중에도 상의해서 추가했어요. 실생활에서 틸다의 반려자인 샌드로 콥이 옥자의 컨셉 아트 드로잉에 참여해서, 두 사람은 <옥자>의 공동 프로듀서이기도 합니다.
-공동 각본가 존 론슨은 <초(민망한)능력자들>(2009)과 <프랭크>(2013)가 전작인데 한뼘만 비껴가면 굉장히 애처로운 유머를 지닌 작가라는 인상입니다. <옥자>의 분위기와 관계있을까요?
=<초(민망한) 능력자들>은 아마 원작만 썼을 텐데, 원래 영국의 르포전문 저널리스트죠. <프랭크>를 배꼽 잡고 웃고 울며 봤어요. 착각일지 몰라도, 저는 프랭크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옥자>에 나오는 영어 쓰는 인물들의 느낌과 통하는 면이 있겠다 싶었습니다. 뭐 그렇게 상태가 좋진 않은 인물들이죠.
-넷플릭스가 존 론슨 작가를 추천했나요?
=<옥자>는 저와 존 론슨,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 틸다 스윈튼, 폴다노, 제이크 질렌홀 캐스팅에 VFX 회사까지 패키지가 끝난 상태에서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고 그다음에 플랜B의 프로듀서들이 합류했어요. <괴물>의 김태완, <마더>의 서우식, <설국열차>의 최두호 프로듀서가 제작자로서 각각 기획 개발, 한국 제작, 미국 캐스팅과 에이전시 관련 업무를 맡았습니다. 플랜B의 프로듀서는 디디 가드너, 브래드 피트, 제레미 클라이너 세 사람인데 <옥자>의 모든 촬영현장을 함께한 전담은 제레미 클라이너예요. <문라이트> <노예 12년> <월드워Z>에 참여했고 <문라이트>의 오스카 작품상 소감 발표 때 무대에 선 제작진 중 <백 투 더 퓨처>의 조지 맥플라이(크리스핀 글로버) 닮은 사람입니다.
-넷플릭스와 아마존이 제작에 적극 진출하며 메이저 스튜디오로 부상하고 있어요. 감독의 입장에서 넷플릭스의 제안이 갖는 매력은 무엇이었습니까?
=미국에서는 농담처럼 유니버설, 폭스 등을 올드 스튜디오라 하고 아마존과 넷플릭스를 디지털 스튜디오라고 부르더군요. 넷플릭스와 계약하면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하고 극장 와이드 릴리즈 범위가 제한돼 아쉽긴 하지만 특정기간 극장 개봉을 했다가 오랫동안 블루레이와 VOD로 남고 영화제나 회고전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일생을 한 주기로 길게 보면 큰 차이가 없어요. 오히려 4K 화질로 영화를 온라인에 아카이빙해놓고 언제든 원하면 볼 수 있다는 느낌이 있고 광고나 이상한 글씨가 끼어들지 않아 영화 자체를 리스펙트하는 면이 많습니다. 또, 개봉 흥행 압박이 없고 클릭 수도 대외에 공개되지 않아 감독으로선 정성껏 작품을 완성하면 끝이죠. 어찌 보면 약간 사회주의적인 측면이 있어요. 전세계 수많은 가입자로부터 십시일반 돈을 걷어 만든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고 거기에 항상 영화를 걸어놓는 형태니까요. 극장 와이드 릴리즈에만 매달린다면 아쉽겠지만 창작의 자유도 커요. <옥자> 제작비가 5700만달러인데 이 규모면 할리우드에서 대부분 최종 편집권을 감독이 갖지 못해요. 2000년대 중반 파라마운트와 J. J. 에이브럼스가 맺은 계약 이야기를 들었는데 당시 에이브럼스가 스타였는데도 불구하고 예산이 3500만달러 이하일 경우만 최종편집권을 줬다고 해요. 그런데 <옥자>는 명확히 감독의 파이널컷을 보장했고 필요하면 18세 관람불가 등급으로 만들어도 좋다고 명시했어요.
-<설국열차>까지 35mm 필름을 고집한 감독님의 첫 디지털영화가 넷플릭스 배급이라니 좀 역설적이기도 한데요.
=처음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과 논의할 때는 “35mm 필름으로 찍자!”고 신나서 의기투합했죠. <옥자> 직전에 그분이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로스트 시티 오브 Z>와 전작 <이민자>를 연이어 필름으로 촬영하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투자자로 결정된 넷플릭스가, 35mm 필름을 스캔해서 주겠다는 우리 제안에도 복잡한 이유로 난색을 표해 디지털로 찍게 됐습니다. 대신 다리우스 콘지는 전세계에 열 몇대밖에 없다는 알렉사65 카메라- 디지털 버전의 70mm- 를 예찬하면서 거기 파나비전 렌즈를 결합했어요. 뭐든 스스로를 흥분시킬 거리를 찾아내시는 것 같아요. (웃음)
-다리우스 콘지의 <옥자> 참여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생각한 그분의 전작은 마르크 카로,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델리카트슨>(1991)과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1995)였는데 <옥자>의 이미지와 관련해 본인 전작을 언급한 예가 있나요?
=콘지의 전작보다는 스티븐 쇼어 등 사진가들의 작품을 많이 주고 받았어요. 사진마다 색감, 공간 무드 등 특정 요소만 추출해 보기도 했고요. 한국 촬영에서 다리 형(<옥자>팀이 그를 부르는 애칭이다)이 제일 좋아했던 것은 우리 제작진이 준비한 깊은 로케이션들이에요. 강원도 신은 정선과 춘천 부근에서 찍었고 서울 장면은 서울은 물론 대전과 광주의 서울 대역도 포함돼 있어요. 오픈 세트는 없었고 남양주 세트가 있었습니다.
-동물에 대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갖고 살아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어려서부터 동물을 좋아해 기억도 많죠. 지금도 쭈니라는 개와 살아요. 학대까지는 아니지만 <플란다스의 개>를 찍을 때 강아지들을 고생시켜서 <옥자>에는 속죄의 의미도 있어요. (웃음) <옥자>를만든 계기 중 하나는 제가 공중파에서 유일하게 꾸준히 보는 <TV 동물농장>인데,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오랫동안 일관된 방향과 관점을 갖고 다루는 뛰어난 제작진이라고 생각합니다. <옥자> 시사회에 제작진을 모시고 싶어요. 미국으로 이민 간 친척 중에 동물보호협회(Humane Society) 부의장을 지낸 분도 있어 생명권 관련 이야기를 많이 듣기도 했고요.
잠실의 추억
-아버님이 디자인을 하셨고 모계쪽으로 화가(박문원)와 소설가(박태원)가 계십니다. 책과 그림이 흔한 가정이었습니까?
=엄청 예술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아버지 방에 외국에서 사온 디자인책과 화집, 사진집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어요. 못 보게 하진 않으셨지만 보다가 침흘릴까봐 조심스러웠죠. 컴퓨터가 없던 시대라 아버지가 포스터컬러와 물감으로 작업하시는 모습도 많이 봤어요. 부모님은 뭘 하라고도 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지 않는 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권위적인 면이 전혀 없어서 혼자 이상한 유머를 하며 텔레비전 보시고 맛있는 음식 나오면 좋아라 하는 분이 었어요. 딱 하나 영향이 있다면, 아버지 직장이었던 서울 디자인포장센터에 5공 시절 퇴역군인이 대표로 부임했을 때 퇴근 후 한 시간씩 한탄하셨던 일이에요. 그런 아버지를 보며 군사독재에 대한 반감을 키운 게 아닐까 합니다. (웃음)
-영화 이전에 만화 그리는 걸 좋아하신 걸로 압니다. 한장의 그림이 아니라 최초부터 컷을 나누어서 이야기를 만드는 식이었나요?
=미술은 제대로 배운 적이 없고 만화가 그림을 흉내내면서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도라에몽> 아류작 같은 걸 그리고 자가발전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콘티죠.
-콘티에 촬영 가이드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도 같은데요.
=즐길 때도 있지만 불안을 해소하는 기능이 커요. 감독 17년째지만 여전히 현장이 무섭거든요. 돌발변수뿐만 아니라 사람이 너무 많잖아요. 사람이 많으면 일단 무섭죠. 불안 증세가 심한 사람치고는 사회생활을 제법 잘해내고 있지만, 어쨌든 남이 없을 때 혼자 조용히 그린 결과물을 들고 와글와글 사람 많은 곳에 가서 그대로 하면 되니까 콘티의 존재가 의지가 돼요. 머릿속으로 한번 영화를 찍어보고 다행히 만화 훈련이 돼 있으니 내 손으로 그려서 나눠주는 거죠. 한때는 제 영화가 콘티와 거의 다르지 않다는 점에 만족했는데 요즘에는 이게 문제는 아닐까, 내가 짠 콘티인데 내가 파괴하고 싶다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성격적으로 용이하진 않네요. <옥자>콘티는 아이패드 프로로 그렸고, <설국열차>는 마카펜으로, 그 이전 작품들은 연필을 썼습니다.
-콘티가 자연스럽게 영화에 흘러드는 우연을 막기도 하지 않나요?
=카메라의 위치와 숏 사이즈, 움직임 등 공간적 설계는 정해져 있는 대신 배우에게는 최대한 자유를 주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제반 요소가 모두 복잡하게 설계돼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배우의 자유와 마찰을 일으킬 때가 있어요. 송강호 선배를 봐도 테이크마다 계획되지 않은 느낌을 찾으려고 분투하고 저 역시 다큐멘터리처럼 그런 모멘트를 찍고 싶기 때문에 많이 고민합니다.
-만화 애독자이지만 미국 코믹스에 대한 언급은 접해본 기억이 없네요.
=DC나 마블의 그림체에는 시각적으로 집중을 못하겠어요. 미국에 가면 포비든 플래닛 같은 숍을 찾아 구석의 얼터너티브 만화 서가를 뒤져요. <프롬 헬>이나 <쥐>처럼 재미있는 그래픽노블도 있고 캐나다 작가 중에도 재밌는 사람이 많아요. 한국에서도 <염소의 맛> <폴리나>의 바스티앙 비베스는 인기 있잖아요. <폴리나>의 인체 라인을 굉장히 좋아해요.
-학창 시절 그림 잘 그리는 아이들은 친구들을 위해 주문생산하기도 하잖아요?
=남학생들은 야한 만화를 주문하는데 저는 그쪽으로 재주가 없었고 고등학생 때 뜻맞는 친구들 서너명을 모아 학급신문을 낸 적이 있어요. 제가 카툰, 레이아웃, 타이틀, 일러스트를 맡았죠. 전두환 집권기에 제가 다니던 공립고등학교에 육사로부터 낙하산 교장이 부임했거든요. 주 2시간 교련수업에 추가로 보충수업을 넣어서 방과후 한두 시간씩 제식훈련을 하고 사열을 시켰어요. 수업 시간 중에도 교장이 복도를 걸어다니며 교실 뒷문에 낸 조그만 창으로 1분씩 들여다보곤 했는데 그 모습을 한컷 만화로 그렸어요. 학생들이 창에 검은 리본을 달아 영정사진처럼 만드는 내용이었죠. 100원씩 받고 복사해서 뿌렸는데 담임선생님이 불러서, 잘했는데 날 봐서 이번만 하고 참아달라고 하셨어요. 프랑스어 담당 선생님은 편집팀을 따로 불러서 네루의 <세계사편력>을 선물해주셨고요.
-공교롭게 저도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감독님과 같은 잠실 장미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TV영화를 제외하면 영화를 처음 집중해서 본 경험이 동네의 ‘대원비디오’라는 대여점을 통해서였는데 감독님은 극장에 많이 다니셨나요?
=대원비디오 알죠. 영화관은 엄마손극장과 호수극장이 기억나네요. 야하다고 해서 버트 레이놀즈, 레이첼 워드의 <샤키 머신>(1981)을 호수극장에서 봤었죠. 그러나 무엇보다 전 TV영화를 병적으로 챙겨봤어요. KBS <명화극장>과 MBC <주말의 명화>에서는 할리우드 고전을, 일요일 낮 교육방송에서는 펠리니, 트뤼포 같은 감독들의 유럽영화를 봤죠. 그러다 형이 “저건 실존의 어쩌고를 표현한 거지” 하고 옆에서 아는 체하면 뭔 소리야 쳐다보고. (웃음) <AFKN>의 금요일 미드나이트 영화에서 강렬하게 본 작품들이 알고보니 존 카펜터, 브라이언 드 팔마, 샘 페킨파 작품이었고, 키스 신 구경하려고 남학생들이 많이 봤던 <제너럴 호스피털>이나 토요일 오전의 코믹 서커스 만화도 열심히 시청했어요. (시그널 음악을 흥얼거린다) 대사를 못 알아들으니 이미지를 보면서 내러티브를 막 구성했죠. ‘아까 걔가 한 말이 그거겠지?’ 하면서.
공간의 변태
-이제 감독님이 좁고 긴 공간을 선호한다는 사실은 작품을 통해 널리 알려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광장공포증이 있으신지요?
=넓은 장소 자체보다 사람 많은 장소가 두려워요. 영화 작업은 일이라고 생각하니 괜찮은데 제일 힘든 경우가 연말 시상식이에요. 1, 2부 사이 광고 시간에 화장실 갈 때 애매하게 아는 영화인들 마주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제일 불안해요. 그래서 화장실 칸에 문닫고 들어가 15분 동안 문자하고 인터넷 보다가 나오기도 하고요. (웃음) 공연을 가도 조용히 싹 보고 싹 나오죠. 비행기요? 창가 자리를 선호해요.
-그런 성격인데 왜 집이나 작업실을 이용하지 않고 카페를 전전하며 시나리오를 쓰세요?
=<플란다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까지는 카페에서 쓰지 않았는데 고립된 공간에서 쓰다보니 자꾸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자는 거예요. 아시겠지만 쓰다보면 등이 아프잖아요? <어댑테이션>(2002) 보다가 니콜라스 케이지가 바닥에 등대고 누워 있는 장면 보고 데굴데굴 굴렀어요. 역시 찰리 카우프먼이 글을 써봐서 아는 거죠. 아무튼 그래서 다른 감독처럼 콘도나 여관에서 일할 수가 없어요. 카페에 가면 바닥에 눕진 않을 거 아니에요? (웃음)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를 함께한 류성희 미술감독에게 감독님의 공간접근법을 여쭤봤습니다. 뉴욕을 영화에 담을 때 우디 앨런처럼 정확한 로케이션에서 샅샅이 대리체험하게 하는 방식과 마틴 스코시즈처럼 LA 세트를 포함시키더라도 ‘뉴욕’이라는 아이디어를 재구성하는 방식이 있는데 감독님 경우는 후자라고 하시더군요. <살인의 추억>의 화성을, <마더>의 마을을 전국의 많은 로케이션을 종합해 재현했고 <괴물>도 한강 다리의 실제 위치와 동선이 일치하진 않으니까요.
=익숙함과 낯섦의 문제라고 해야 하나? <괴물>의 한강이나 <플란다스의 개>의 아파트처럼 익숙한 공간을 낯설고 신기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동시에 누가 봐도 한강처럼, 서울의 아파트처럼 보여야 하거든요. 결국 이건 장르를 대하는 법과도 관련이 있어요. 장르적으로 친숙한 공간-조폭영화의 폐공장이나 직장 선후배가 맥주 한캔 마시고 화해하는 장소로서의 한강 둔치가 있는 반면, 장르 맥락에서 낯선 공간이 있죠. 또한 (<괴물>의 모티브가 된) 맥팔랜드 독극물 유출사건처럼 실화지만 몬스터영화 도입부와 같은, 현실 속의 장르성이 있어요. 말하자면 실재와 장르의 경계를 이상하게 비트는 걸 좋아하는 취향이 영화 속 공간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요. <괴물>에 해석된 한강은 실제 한강을 몬스터 무비와 링크시킬 때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과인 거죠. 사실 한강은 카메라를 대면 찍을 게 별로 없어요. 밋밋하고 심심해서 서스펜스나 긴장감 있는 이미지를 만들긴 쉽지 않아요.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교각 밑의 공간이나 원효대교 아래의 우수구, 괴물의 은신처를 쓴 거죠.
-한강을 수평적 공간이 아니라 층이 있는 수직적 공간으로 바라본 점이 <괴물>의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투신 자살자가 나오는 프롤로그부터 그렇죠. 현서(고아성)가 괴물의 둥지에 갇혔는데 기어 올라오지 못하는 설정도 그렇고요. 화면비율을 1.85:1로 택한 이유이기도 하고 <괴물>은 버티컬한 강(江)영화라는 점이 핵심이었어요.
-달리 말하면 봉준호 영화는 장르가 회수를 ‘제대로’ 건너면 변태하지 않을 도리가 없음을 입증하는 시도로 보이기도 해요. 주인공과 적대자의 자리에 그 나라의 영웅과 악당을 바꿔넣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거죠.
=티 안 나게 장르를 스리슬쩍 해체시키고 싶었어요. 왜 그랬을까는 모르겠어요. <설국열차>가 그나마 제 영화 중에는 장르가 확실하죠. 뭘 했건 SF니까. <옥자>는 앞서 말한 대로 사랑영화이고 도입부는 2007년 본론이 시작되면 2017년으로 자막이 나오니 완전히 동시대가 배경인데 장르는 뭐라 해야 할지 몰라서 늘 그랬듯 마케터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감독님에게 영화는 애초에 콘티로서 머릿속에 존재하고 시나리오는 비즈니스 절차를 위해 글로 옮긴 서류로 보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장르도 분류를 위한 편의적 라벨일 뿐 발상은 그 구획에 기초하지 않는 걸까요?
=실제로 프랑스 DVD 업체 홈페이지에는 드라마로 분류된 제 영화가 미국에서는 액션 어드벤처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기도 해요. 그런 식으로 분류되는 게 싫지도 않고요.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괴이하게도 <설국열차>가 영국 개봉을 못 했는데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모두 개봉했는데 영국은 극장들이 원했다는데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못했죠. 우리의 막연한 추측은 저와 웨인스타인의 대립 구도에서 디렉터스 컷을 공개적으로 열렬히 지지한 영국의 배우 틸다 스윈튼과 존 허트에게 보내는 웨인스타인의 대답이 아닐까 정도예요. 지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틸다와 하비 웨인스타인이 마주쳤는데 묘한 긴장이 있었다는 후문도 들었고요.
-그동안 길리엄 역의 존 허트가 고인이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 프로모션 투어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까워졌던 부인 앤웬 리스 메이어스에게 긴 편지를 드렸어요. <설국열차>에서 처음 확정된 캐스트였고 “에일리언이 내 배에서 나왔잖아!” 하면서 SF에 대한 애정을 밝히며 제작초창기에 힘을 많이 불어넣어줬어요. 돌아가신 후 더블린영화제에서 존 허트 회고전 중 <설국열차>가 상영됐고 부인이 관객 앞에서 고인이 얼마나 이 영화를 사랑했는지 전한 스피치를 답장으로 보내왔어요.
깽판의 레이어
-취조 상황의 대화를 유난히 즐기며 쓰시는 인상이에요. 어떤 재미인가요?
=취조 신은 쓸 때도 찍을 때도 너무 좋아요. 취조 당하는 입장, 하는 입장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 쓰는데 모두 흥분돼요. 변태인가봐요. <살인의 추억>에 네개 이상의 취조 시퀀스를 각각 달리 찍다가 <마더>에서 오랜만에 다시 취조 장면을 하는데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취조란 전혀 바람직한 대화 방식이 아니고 두 인간이 최악의 상황에서 만나는 것인데 왜 좋을까요? 제가 거짓말을 좋아하나봐요. 취조는 하는 쪽도 함정을 파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당하는 쪽도 거짓말을 하잖아요. <LA 컨피덴셜>(1997)에 보면 잘 나와 있죠.
-그러고보니 영화에 항상 약간 진짜처럼 들리는 거짓말을 넣는 습관이 있으시죠. <마더>에서 허벅지 혈자리에 침을 놓으면 망각이 촉진된다거나, <설국열차>에서 산업폐기물이 환각작용을 일으킨다거나.
=한 인물이 ‘썰’을 푸는 장면도 반드시 나오죠. <옥자>에서도 폴 다노가 할 거예요. (웃음) 잉마르 베리만의 <화니와 알렉산더>(1982)에 나오는 거짓말의 의미가 생각나네요. 그 영화에서는 창작의 다른 이름으로 거짓말을 이야기하잖아요.
-연출 외에 영화계에서 가질 수 있는 직업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어떤 일이 떠오르세요?
=스틸 사진작가, 사운드 믹싱이요. 눈을 혹사하다가 귀로 넘어가면서 사운드를 디자인하고 배치하고 밸런스 맞추는 작업이 제일 행복해요. 촬영은 그날 나가서 못 찍으면 끝이고 다시 하려면 돈과 사람이 많이 필요한데 사운드는 모든 걸 다 해볼 수 있잖아요. 데이비드 린치나 마틴 스코시즈 영화를 보면 사운드 자체가 엄청난 뭔가를 만들어내죠.
-저는 감독님이 단편영화에서 직접 카메라도 잡았고 관심 있는 분야로 알고 있어서 촬영일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감독님 영화 규모가 커서 불가능하겠지만 스티븐 소더버그처럼 직접 카메라를 잡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제 눈에 자신이 없어요. 신체검사에서 적록 색약판정을 몇번 받아서 색에 관련된 작업을 할 때면 불안해져요. 남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마더> 흑백판을 내고 큰 안도감을 느꼈죠. (웃음) 물론 홍경표 촬영감독님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었고 흑백영화만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색보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신다고 들은 터라 좀 의외인데요.
=촬영감독, 컬러리스트와 많이 의논하죠. 또 색보정은 색만의 문제가 아니고 날씨, 콘트라스트, 입자, 스토리텔링 등이 결부된 작업이니까요.
-최근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대담을 가지셨습니다. 지역 정치학과 사회풍경을 담은 호러색이 짙은 장르영화를 만든다는 점이 두분의 공통점 같아요. 감독님 영화 중에 딱히 호러는 없지만 제가 원동력이라고 느끼는 감정은 분노보다 두려움이에요. 다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는 적막하고 봉 감독님의 영화는 매우 시끌시끌하죠.
=둘 다 공격당하는 자의 시각에 입각해 만드는 새가슴 감독들이죠.(웃음)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는 가장 정적인 롱숏에서 물처럼 스며나오는 공포가 매력적이고 제 영화는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깽판’이죠. 카오스를 연출할 때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즐거워요. 깽판을 내가 통제하니까 마음이 편한가봐요. (웃음) “깽판의 레이어를 한번 일곱개까지 가볼까? 저기 뒤에 저분 넘어지시라 그래!” 하면서 흥분하죠. 이병우 음악감독님과 예전에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어요. “봉 감독은 아름다운 것, 고운 걸 보면 그걸 부수려고 해.” “저도 아름다운 거 좋아해요.” “아니야 파괴해.” “뭐 그 자체가 아름답지 않은가요?”라고.
-본인이 창조한 인물에게 관심은 있지만 애정을 품고 연연하는 인상은 받은 적이 없어요. 히치콕처럼 인물을 바라보는 어떤 냉혹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옥자>의 미자와 옥자에게는 애정을 듬뿍 줬습니다. 같이 울고 웃으면서. 저도 그들을 사랑하고 자기들끼리도 사랑하고. 특히 옥자가 무척 사랑스러워요.
-스토리의 패턴으로 보자면 감독님의 영화는 한점으로 수렴해 달려가는 구조입니다. <플란다스의 개>는 실종된 개 때문에 만날 일 없던 다양한 계급의 인물이 마주치고, <괴물>의 괴물과 현서는 흩어진 가족을 모이게 만드는 점입니다. <살인의 추억>에는 공간으로서 터널이 있고 서사 요소로서는 잡히지 않는 범인이 소실점으로 있습니다. <마더>는 엄마의 눈에서 시작해 엄마의 눈으로 돌아가고 공간적으로는 도준(원빈)이 돌을 던지는 골목의 한뼘의 암흑이 있습니다. 이야기가 확산되거나 축적되기보다 한점을 향해요. 흔히 ‘추격의 영화’로 봉준호 영화를 정리하지만 넓게 말하면 집착의 영화로 묶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격이 안 좋아서인가? 앞으로는 더 심해질 것 같아요. <옥자> 다음 영화도 두편 정도 준비 중인데 제작 규모가 작고 좀더 단순한 영화라 더욱 집중된 구조가 될 것 같아요. 기차에 4년, 돼지에 4년, 도합 8년이 가버렸는데 이젠 작은 영화를 더 자주 하고 싶어요. 손에 탁 쥐어지는 딴딴한 돌멩이 같은 영화를. 그러다보면 한점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더 강화되지 않을까요.
-같은 맥락에서 봉준호 영화에는 기능 없이 ‘노는’ 장면이 거의 없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장르영화에 대해서는 대단한 칭찬이기도 한데요. 시나리오를 퇴고할 때 어떤 장면부터 삭제하는지 궁금해지곤 해요.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잉여의 숏이 없다는 말씀 같은데, 시나리오 단계에서도 촬영 단계에서도 전 회차를 줄이려고 해요. 예산 문제만이 아니라 제가 힘들어서죠. 러닝타임 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요. 90분에 다가가는 영화가 목표죠. <옥자>도 러닝타임이 1시간55분이고 촬영회차도 77회 정도예요. <설국열차>도 73회? 한 신 안에서 숏도 어떻게 하면 최소의 숏으로 축소할 수 있을까 고민해요. 그래서 <마더>는 600여컷으로 마무리했고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800컷 언저리예요. <옥자>도 900여컷이고. <설국열차>만 1100컷 넘게 나왔죠. 최동훈 감독에게 넌지시 물었더니 “당연히 2400…” 그래서 속으로 대단하다고 경탄했어요. 대신 제 영화는 숏안에서 움직임이 많아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면 가장 적은 숏으로 신을 만들까 강박적으로 생각해요. <산딸기>(1957)같은 잉마르 베리만 초기작이나, 로베르 브레송 영화를 봐도 불필요한 숏이 없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것이 궁극의 리듬을 만드는 거죠. <조디악>(2007)은 긴 영화이고 <펀치 드렁크 러브> (2002)는 짧은 영화지만 영화적 리듬이 둘 다 완벽하고요. 과연 잉여의 숏을 구사해서 그런 리듬이 나올지는 의문입니다. 영화의 리듬 중 숏과 숏의 경계는 일부에 불과하고 숏 내부에 아주 많은 리듬이 있죠. 그걸 딱 손에 넣는 순간 감독으로서 개안할 텐데 전 대체 그날이 언제 올지.
-영국 잡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 설문조사에 감독님이 베스트로 고른 영화 중 <조디악>이 있어서 좀 놀라기도 했어요. <살인의 추억>과 유사성이 거론되던 영화라서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과연 <살인의 추억>을 봤을까요? 직접 말을 나눈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슈퍼 에이트>(2011)와 <클로버필드>(2008) 경우는 J. J. 에이브럼스가 <괴물>의 오마주가 있다고 명확히 이야기를 했고 <클로버필드> 프린트를 스탭들과 보라고 보내주기도 했죠.
-데이비드 핀처, 데이비드 린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중에는 누굴 좋아하십니까?
=글쎄요. 크로넨버그는 <폭력의 역사> 정도를 좋아하고 핀처와 린치를 좋아하긴 하는데 의미는 모르겠네요.
-(웃음) 폴 토머스 앤더슨과 웨스 앤더슨 감독 중에서는요? 웨스 앤더슨은 지금 제작 중인 영화가 퍼펫애니메이션 <개들의 섬>(The Isle of Dogs)인데 개를 찾아가는 일본 배경의 이야기라 개봉되면 아마 <옥자>와 묶여서 논의되지 않을까 상상 중입니다.
=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웨스 앤더슨 영화가 <판타스틱 Mr. 폭스>(2009)예요. 틈만 나면 반복해서 봅니다. 그 영화의 노란색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러면 여전히 봉준호 감독님이 생각하는 미국영화의 현존 최고봉은 코언형제와 마틴 스코시즈인가요?
=개별 작품 말고 필모그래피 전체로 보면 코언 형제가 놀랍다고 생각해요. 타란티노나 에이브럼스, 고어 버빈스키 감독과 대화해봤지만 <설국열차>의 소규모 시사에 틸다 스윈튼이 초대한 조엘 코언 감독을 만났을 때 같은 긴장은 처음이었어요. <설국열차>의 교실칸 장면이 제일 좋았다면서 시끄러운 술집에서 낮은 목소리로 길게 말씀하시는데 도저히 무슨 이야긴지 안 들렸어요. 적어달라고 할 수도 없고. (웃음) 대학 영화동아리 시절부터 영화를 봤던 감독이라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타란티노 감독과는 같이 술을 마셔도 “아, 이 형은 말이 정말 많구나” 정도인데. (좌중 폭소) 코언 형제 같은 필모그래피를 쌓을 수 있다면 감독으로선 더 바랄 게 없지 않을까요?
꿈과 악몽
-<씨네21> 창간 22주년 기념호 특집에서 역대 한국영화 베스트 여성 캐릭터 상위권에 <마더>의 도준 모(김혜자)와 <플란다스의 개>의 현남(배두나)이 자리해 있습니다. 영화에서 젠더 묘사와 영화 밖의 성 정치학적 권력에 대한 최근의 화제를 어떤 생각으로 접하고 계신지요?
=여성주의나 젠더의 관점에서 시나리오를 써본 적은 없습니다. 그쪽 논쟁에도 무척 무지하고요. <마더>는 젠더보다 김혜자라는 배우의 존재에서 출발했고 <옥자>의 미자나 <괴물>의 현서나 <플란다스의 개>의 현남을 여성으로 설정한 것은 워낙 시나리오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에 고민해서 결정했다는 의식 자체가 없어요. <옥자>의 경우도 산골 소녀 영자 사건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소녀를 떠올렸습니다. <괴물>은 가족들의 좌충우돌하는 어리석음을 원하다보니 박씨 부자 2대에 걸쳐 아내/엄마의 존재를 빼버렸어요. 가족 중 시스템을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구성원이 엄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엄마가 완전히 배제된 가정에서 어린 중학생 현서가 더 작은 아이들에게 엄마 역할을 하는 역설도 있었고요. 물론 이것도 직관적으로 쓰고 사후에 스스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직업 감독이 된 후에도 외서를 포함해 영화 서적을 읽으시는 걸로 아는데 추천하신다면?
=번역된 책 중에는 일본 영화인들의 추천으로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의 맨살>을 군데군데 읽었는데 재미있었습니다. <이키루>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의 공동 각본가인 하시모토 시노부의 <복안의 영상>이라는 회고록도 좋습니다. 전통 료칸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포함해 세명이 <7인의 사무라이>를 집필하는 과정인데 무시무시하면서 감동적이고 웃겨요. 번역 안 된 책 중에는 <Hitchcock at Work>라는 빌 크론의 책을 한국어로 자세히 보고 싶습니다. BFI 모던 클래식 시리즈도 좋던데 누가 전질을 번역 출간했으면 좋겠네요.
-전작 <설국열차>는 박근혜 전 대통령 취임 몇달 후 개봉했고 <옥자>를 준비하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국가가 당신을 지켜줄 것 같아요? 천만에요”로 요약되는 남한 시스템의 역기능을 그린 영화를 만드셨는데, 그런 병폐의 응집 같은 세월호 사건도 있었습니다. 잠복기가 있겠지만 많은 영화 만드는 사람들에게 이 사건의 여파가 영향을 줄 거라는 예상을 합니다. 감독님은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어떤 마음으로 당시를 겪으셨습니까?
=<옥자>는 2010년에 시놉시스를 썼는데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자식 있는 사람으로서 뉴스를 보고 화가 나는 차원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이 괴롭고 힘들었어요. 한동안은 구체적으로 책임 있는 사람들을 짚어내 갚아주고 싶다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어요. 당시 <괴물>의 장면과 세월호사건을 일대일로 짝지어놓은 블로그 포스팅도 봤는데 해양구조업체 언딘과 “일곱 회사가 돌아가며 작업한다”고 말하는 <괴물>의 방역업체 직원 대사를 연결했더군요. 현서가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는 신을 에어포켓에 있던 학생이 문자를 보냈다는 루머와 연결했고요. <괴물>은 당연히 2005년 이전에 한국 사회가 재앙을 맞아 어처구니없는 카오스에 빠진 경험을 반영한 영화였는데 사회가 제자리걸음하고 비극이 반복되다보니 세월호를 예견했다고 읽히는 상황을 보고 더 우울해졌습니다. 제일 섬뜩했던 일은 여관방에서 도주한 선장이 젖은 지폐를 말리고 있었다는 뉴스였어요. <괴물>에서 방역요원이 물에 젖은 만원짜리를 줍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러나 <옥자>에 이 감정들이 투사돼 있진 않아요. 그로부터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썼죠.
-이후 작품에도 영향이 없을까요?
=많은 감독들이 내가 세월호 영화를 찍는다면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생각해봤을 거예요. 거대한 십자가를 짊어지는 용기가 필요할 거예요. <살인의 추억> 때도 막상 경기남부 연쇄살인사건을 조사하면서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거대한 사건임을 깨달았어요. 저 역시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은 책도 사보고 뉴스를 보면서 머릿속에 제정신으로 찍기 힘들 많은 이미지가 떠오르긴 했어요. 시점숏의 이미지와 사운드들이 스쳐가고 꿈도 꿨습니다. 그러나 정리된 생각은 없어요. 누가 하든 엄청나게 힘든 작업일 겁니다.
-포장을 뜯지 않은 DVD와 블루레이 중 시간이 나면 1순위로 감상할 작품은 무엇인가요?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카를로스>(2010)와 정말 오랜 시간 기다려 지난해에 크라이테리언이 출시한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입니다. 후자는 예전에 <NHK>의 <BS2>에서 좋은 화질로 방영해서 양질의 공테이프로 녹화했는데 워낙 길다보니 중간에 파바박 (전광석화 같은 손동작 재연) 테이프를 갈아끼웠는데 그만 20초가 유실돼 출시를 고대해왔죠. 두 영화 모두 러닝타임이 길어 가장 좋은 컨디션에서 보려고 벼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