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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문제를 인식하는 사람에겐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 권오중 문제없는영화제 총괄 디렉터를 만나다

“이제 개최만 남았다.” 문제없는영화제를 2주 앞두고 만난 권오중 총괄 디렉터는 긴 장정의 끝에서 비로소 숨을 고르는 듯했다. 지난 1년간 그는 영화제 사무실로 출퇴근하며 수백편의 출품작을 보고 긴 회의를 거듭하며 카메라 뒤에서 빽빽한 일정을 소화했다. 선례가 없는 제1회 영화제였기에 운영부터 심사, 홍보까지 모든 영역을 기초부터 세워야 했으나 그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오히려 제한 없이 꿈꿀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무엇보다 그를 버티게 한 건 작품들로부터 발견한 작은 희망이었다. “보내주신 영화를 보면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관심이 있고,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이 존재한다는 걸.” 그와 마주 앉아 총괄 디렉터로서 첫 영화제를 어떻게 구축해나갔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어 11월20일 개봉을 앞둔 주연작 <마사이 크로스>에 대한 대화도 이어갔다. ‘차별과 격차, 침묵 속에서 외면된 이야기’를 다루는 이 작품은 그가 영화제를 통해 건네고자 한 문제의식과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었다. 배우로서도, 디렉터로서도 그는 결국 같은 질문에 다다른다. 우리가 더 나은 쪽으로 움직이기 위해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권오중의 첫걸음은 그 물음에 대한 한 가지 응답처럼 보였다.

영화제의 길을 열다

- 어떻게 총괄 디렉터로 합류했나.

지난해 함께하는 사랑밭이 후원하는 부산실버영상제에서 심사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열과 성을 다해 완성된 출품작들을 보며 느끼는 바가 컸다. ‘영화가 업인 나는 과연 이분들만큼 에너지를 갖고 일하고 있나’ 하며 반성했고, 영화가 젊은 세대만의 언어가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의 것임을 실감했다. 이런 소회를 부산실버영상제 시상식에 동석한 정유진 함께하는 사랑밭 대표에게 전했다. 전쟁이 일어난 곳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 달라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던지는 영상은 보기 힘들어 거부감이 들 수 있지만 영화라면 공감대를 형성하기 좋을 것이라고. 영화제를 직접 만들어보는 건 어떠냐는 말도 함께 말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가볍게 던진 말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영화제를 열기로 했고, 총괄 디렉터를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제안이었다. 아이디어를 낸 사람으로서 거절할 수 없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봉사활동을 이어온 시간이 길었던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기꺼이 뛰어들었다.

- 2020년 한국기독교영화제 공동위원장을 역임한 경험이 총괄 디렉터 역할에 밑바탕이 되어줬을 것 같다.

한국기독교영화제에서 3~4년간 심사를 혼자 봤다. 아무리 영화를 사랑한다고 해도 쉽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많이 들고, 상당한 체력도 요했다. 더군다나 주제가 ‘기독교’였다. 워낙 범위가 넓다 보니 연출자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찾아내기 위해 대사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출품된 모든 작품을 다 보고 몇 작품을 추린 뒤 다른 심사위원들과 공유했다. 이제 와 돌아보면 문제없는영화제를 잘 치르기 위한 혹독한 훈련 기간이었다.

- 문제없는영화제에서도 심사를 봤다. 지지하는 영화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나.

심사 테이블은 전반적으로 평화로웠다. 심사위원 각자가 평소 관심을 두는 문제의식은 달랐으나 일찌감치 합의한 기준이 있었다. 연출자가 충분한 고민 끝에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있느냐는 점이었다. 앞서 출품 주제를 정할 땐 고민이 깊었다. 긴 논의 끝에 첫해인 만큼 주제를 좁히지 말고 열어두자는 데 의견이 모였고, 결국 ‘여러분이 생각하는 사회문제는 무엇인가요?’로 정했다.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폭넓게 알고 싶기도 했다.

- 이번 영화제의 심사 기준은 주제 해석력, 영상 완성도, 창의성·독창성, 전달력·공감이었다. 이중 특히 비중을 둔 요소가 있다면.

주제 해석력과 전달력·공감이다. 선택한 사회문제에 대한 작가적 시선이 영화에 얼마나 날카롭게 반영되었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봤다. 이 기준은 내가 여러 영화제에서 심사를 해오며 자연스럽게 세운 원칙이기도 하다. 문제 제기에서만 끝나서는 안된다. 관객의 가슴까지 전달되어야 한다. 그래야 행동이라는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 예상치 못한 어려움은 무엇이었나.

출품작의 제작연도가 은근한 복병이었다. 오래된 작품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냈을 가능성이 있어 언제 만들어진 영화인지 꼼꼼히 확인해야 했다. 또 하나는 애니메이션 작품의 비중이 높았다는 점이다. 배우이다 보니 자연스레 배우가 출연한 작품에 마음이 가기도 했으나 훌륭한 애니메이션이 워낙 많아 애니메이션도 수상작 목록을 다수 채웠다.

- 반영된 아이디어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숏폼은 95초, 단편은 9분5초에서 12분 내로 받았는데, 이 ‘9’와 ‘5’는 내가 제안한 것이다. 구호단체인 우리의 정체성을 숫자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예상치 못한 난관이 생겼다. 95초가 안되거나, 12분을 넘기는 애매한 작품들이 꽤 많았다. 처음엔 냉정하게 탈락을 생각했으나 첫해니까. (웃음)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준 것에 감사하며 일단 모두 받았다. 대신 기준을 지킨 작품들과의 균형을 위해 감점 요소를 두었다.

- 배우 권오중과 영화제 총괄 디렉터 권오중 사이의 접점이 흥미롭다. 두 역할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보나.

시나리오를 읽거나 연기 공부를 할 때처럼 출품작을 바라봤다. 이 장면을 왜 이다음에 배치했을까, 이 신의 의미는 무엇일까, 배우들은 연출자의 어떤 의도를 몸으로 전달하고 있는 걸까 등을 디테일하게 분석했다. 이러한 시선이 좋은 작품을 선정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배우로서의 사명감은 훨씬 커졌다. 작품 안팎에서 항상 책임감 있는 태도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 직접 부딪치며 영화제의 기반을 닦았다. 내년 영화제는 어떻게 키워가고 싶은가.

올해 포괄적 주제의 어려움을 충분히 겪은 만큼 내년에는 주제를 더 좁고 명확하게 잡을 계획이다. 크고 작은 영화제가 많은 상황에서 우리 영화제만의 역할과 개성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계속 고민하고 있다. 처음부터 바랐던 목표는 분명했다. 연출자에게 극장 상영이라는 단 하나의 꿈을 실현해주는 것이다. 큰 스크린에서 내 영화가 상영되는 기쁨, 그리고 스크린에 버젓이 드러난 약점을 보완하고 싶다는 욕망이 다음 작품을 향한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수상자가 쌓일수록 출품작들의 완성도도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이라 믿는다. 포부를 말하자면 문제없는영화제가 사회운동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문제의식을 가진 개별이 모이면 그 안에선 해결을 향한 웅성임이 생긴다.

- 결연 후원을 한 케냐 소녀 나쉬파에(메리스 텐키아)를 찾아 달라는 딸 보미(장윤진)의 부탁으로 케냐를 찾는 아버지 요섭(권오중)의 여정을 담은 <마사이 크로스>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케냐에서 90% 이상 촬영했다고.

처음 기획한 건 2024년 10월쯤이었다. 마사이족은 분명 좋은 문화도 갖고 있지만 소 몇 마리를 얻기 위해 어린 여성을 조혼시키거나 할례 같은 악습도 있다. 이 문제를 널리 알리고 싶어 처음엔 다큐멘터리를 제작할까 했는데, 보는 데 너무 큰 용기가 필요한 영화가 될 것 같았다. 숏폼의 가벼움에 기대볼까 고민하던 와중에 아내인 엄윤경 문제없는영화제 집행위원이 극영화를 제안했다. 코미디의 힘을 더해 날카롭게 재밌는 영화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지난해 3월 케냐로 향했다. 연출은 함께하는 사랑밭의 일원이기도 한 이성관 감독이 맡아줬고 전문 스태프는 3명, 그리고 아내와 나 정도로 구성원은 단출했다. 언어가 안 통하는 타지에서 1인5역쯤 하느라 고생스러웠지만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알 거다. 현장에는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즐거움과 보람이 있다는 걸. 영화 얘길 하다 보니 눈을 맞출 때마다 웃어주던 마사이족 아이들이 그립다. 참으로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 나쉬파에 역을 맡은 메리스 텐키아 배우는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현지 마사이족 소녀였다고 들었다. 어떻게 발견했나.

메리스는 현지에서 진행한 오디션을 통해 발탁했다. 메리스 말로는 학교 주변이 오디션 때문에 시끌벅적해 호기심에 참여했다고 하더라. 원래는 청소년 배우를 기용할 계획이었는데, 메리스를 보는 순간 이 친구라면 나쉬파에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나쉬파에가 지닌 슬픔과 순수함이 그대로 묻어났고 눈빛은 삶의 무게를 감당해온 사람의 책임감으로 빛났다. 카메라 앞에 서본 적이 없으니 처음엔 당연히 어색했다. 신마다 세세히 설명해주고 나만 믿고 따라와 달라고 했더니 똑똑한 친구라 금세 적응했다. 무엇보다 극 중 상황이 자신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보니 실제 감정을 자연스럽게 꺼내놓았다. 메리스의 진정성 있는 연기가 영화의 완성도를 한층 높였다.

- 현재 메리스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고.

결연 후원을 했다. 요즘 메리스는 학교를 잘 다니고 있다. 메리스를 포함해 영화에 참여해준 마사이족 분들이 완성본이 어떻게 나왔는지 무척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마사이 크로스>가 관객수 100만명을 넘기는 기적이 일어나 그들을 한국 극장에 초대해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 꿈이다. (웃음)

- 마사이족 문화를 체험하며 시야가 트이는 경험도 했을 것 같다. 새롭게 깨달은 점이 있다면.

마사이족 하면 잘 걷는 부족, 많이 걸어서 날씬하다는 인식이 있는데, 사실 이들은 좋아서 걷는 게 아니었다. 척박한 땅에서의 유일한 생존수단인 양과 소의 먹이를 찾아 끝없이 이동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마사이족식 걷기’라는 타이틀을 단 신발이 판매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상황을 보며 문제의식을 생길 수밖에 없었다. 고통을 상품화한 만큼 그들에게도 무언가 돌아갔더라면 이들의 삶이 조금은 나아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 앞서 언급한 대로 출품 주제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사회문제란 무엇인가요?’였다.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답을 하고 싶나.

현 시대를 상실감의 시대라고 정의하고 싶다. SNS를 도배한 행복해 보이는 사진들을 보며 스스로 초라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행복의 주류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괜찮은 척 자신을 포장하는 일도 잦아졌다. 내가 조금 못나고 힘들어도 그런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덜했던 과거와 다르다. 또 하나는 잔인함의 평준화다. 뉴스나 영화, 드라마에서 잔인한 장면이 너무 쉽게 노출된다. 누군가의 사고·사망 소식에 놀라기보다 그렇구나 하고 넘기는 경우가 흔해졌다. 심지어 잔혹한 장면을 웃으며 보기도 한다. 자극이 더 큰 자극을 부르는 사회가 사회의 전체적인 온도를 낮추고 있다. 무관심하고 외면하고 냉정해질수록 사람은 더 외로워진다. 특히 젊은 세대의 개인화와 고립을 예민하게 주시하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가족과 뭉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개인 유튜브 채널 <권오중복음>을 통해 영화인 권오중의 여러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시리즈 웹드라마 <권오중의 시네마복음>에서 아들과 함께 출연한 성탄 특집 단편이 눈에 띄더라.

<권오중의 시네마복음>은 한국기독교영화제에서 만난 감독님들과 의기투합해 만든 작품이다. 프로듀싱, 각본, 출연까지 여러 역할을 맡아서 애착이 크다. 지금은 완결된 상태지만 감독님들과는 계속 교류하고 있다. 성탄 단편은 배우 DNA를 물려받은 아들을 위한 작업이었다. 혁준이가 나서는 걸 정말 좋아한다. (웃음) 몇천명 앞에서 노래해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연기를 하고 싶다고 해서 선배로서 냉정하게 조언했다. 그러려면 꾸준히 연습하고, 매일 책도 읽어야 한다고. 기회가 된다면 혁준이와 함께 영화를 더 찍을 생각이다. 이미 구상해둔 이야기들도 있다.

- 어떤 이야기인지 힌트를 줄 수 있을까.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며 깊은 상실감에 빠진 아버지가 주인공이다. 삶을 마무리하기 전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데 그 여정을 통해 오히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되는 로드무비다.

- 문제없는영화제와 <마사이 크로스>를 위해 극장을 찾을 관객과 시민창작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영화제에 작품을 내주신 창작자 전원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부디 포기하지 말고, 영화작업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펼쳐주시길 부탁 드린다. 관객 여러분에게는 작품을 통해 알게 된 문제들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해결점을 찾기 위한 작은 행동부터 시작해주시길 바란다. 열린 마음의 시대, 문제없는 사회가 하루빨리 오도록 나 역시 최선을 다하겠다.

권오중의 ‘내 인생의 영화’

<포레스트 검프>

감동적인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포레스트 검프>가 여전히 최고다. 포레스트(톰 행크스)가 순수함을 잃지 않은 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그 뒤에는 어머니의 헌신이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준다. 같은 장애 아들을 둔 부모로서 과연 나는 어떻게 해왔는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아이의 기를 죽이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런 따뜻한 영화가 다시 많이 만들어지고 잘되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내가 출연하고 싶은 영화도 바로 이런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