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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그렇게 어머니가 되다, <한란> 배우 김향기

2025년, 배우 김향기는 연기자로서 경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매체에 발을 들였다. 상반기에는 숏폼 드라마 <귀신도 세탁이 되나요?>를 공개한 뒤 여름부터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무대에 올랐고, 늦가을을 맞아 영화 <한란>이 개봉했다. 12월에는 넷플릭스 시리즈 <캐셔로>, KBS 단막극 <러브: 트랙>의 한 에피소드로 시청자를 만날 예정이다. 그중 올해 가장 오래 몰두한 일은 연극이었다고 돌이킨 그는 “매 공연 일정하게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것”이 새로웠다고 한다. “같은 연기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굴레에 빠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생애 첫 연극에 얽힌 소회는 어쩐지 20년 경력자의 태도를 간추린 말처럼 들린다. 자신을 둘러싼 틀을 짓고 부수면서, 2006년 영화 <마음이…>로 데뷔한 6살 소녀는 제주 4·3사건의 복판에서 딸을 찾아 헤매는 어머니의 얼굴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 <한란>의 하명미 감독과의 첫 미팅 일화를 들었다. 3시간 정도 대화를 나눈 끝에 “그만 설득하셔도 된다”며 바로 출연 의사를 전했다고.

아무리 캐릭터와 주제가 좋고, 연기해보고 싶은 장면이 있어도 시나리오가 잘 안 읽히면 배우로서 선택하기 망설여진다. <한란>은 글이 술술 읽혔다. 뒷이야기가 궁금해 한장 한장 잘 넘어가더라. 모녀 이야기가 중심에 있지만, 그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 관한 서술도 흥미로웠다. 아진(김향기), 해생(김민채) 모녀가 안쓰러우면서도 강인하게 묘사되는 것 또한 인간적이고 따뜻했다.

- <한란>에서 어머니 역을 맡았다는 사실에 놀라는 반응들이 있는데, 전작 <영주><아이>에서 이미 보호자의 위치에서 어린 존재를 보듬는 배역을 소화했다. 그간 그려온 캐릭터의 궤적이 엿보이는 한편 배우 본인은 이 경과를 어떻게 의식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한란> 캐스팅 소식이 알려지면서 정말 많은 분이 내가 엄마 역을 맡는 것에 놀라시더라. 그런데 나는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촬영을 마칠 때까지, 그러니까 이 영화를 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번도 내가 ‘엄마’라는 역할 안에서 무언가를 특별히 보여줘야 한다고 의식하지 않았다. 매번 작품 자체가 주는 느낌을 중시했다. 그리고 아진의 모성애가 강한 것은 맞지만, 그 모성이라는 것도 때로는 친구처럼, 자매처럼, 아빠처럼 발휘될 수 있다. 아진에게도 무모하고 아이 같은 면이 있지 않나. 모든 걸 다 품어주는 어머니상이 아닌 ‘나는 이 딸과 함께 나아갈 거야!’ 하고 다짐하는 마음이 더 큰 어머니로 아진을 표현하고 싶었다.

- 가장 큰 도전은 모든 대사를 제주어로 말하는 것 아니었을까.

다행히 촬영 전 제주어 감수자 선생님께 일주일에 몇번씩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초반에 감 잡기가 너무 어려웠다! 선생님이 녹음한 대사를 몇번씩 들어도 헷갈리는 부분은 다시 녹음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다 내가 왜 이렇게 감을 못 잡는지 고민해봤는데, 선생님 억양을 따라 하는 데 집중한 나머지 대사에 감정을 넣으면 흐름이 깨졌다. 제주 방언은 생소한 단어도 많지 않나. 그래서 아예 접근 방식을 달리했다. 사투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제2외국어로 대사를 뱉는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잘 됐다. 대사를 무조건 입에 붙이려 했다.

- 철저히 준비한 후 맞이한 현장은 어땠나.

현장에 제주도 출신 배우가 많았다. 감독님은 촬영에 앞서 대사를 다 정리하셨지만, 그분들의 의견도 듣고 싶어 하셨다. 특히 단체 신에서는 인물들이 품은 서로에 대한 애정이 전해져야 하는 만큼 더 자연스러운 표현이 무엇인지 여럿이 모여 토론했는데, 그 모습이 귀여웠다. (웃음)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어도 혼란스럽기보다는 편안했다. 나 혼자 완벽히 해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달까.

- 개봉 전 제주에서 시사회를 열었다. 제주어를 평가받는 자리이기도 하니 긴장했을 듯한데.

떨렸는데, 기분 좋았다. 개봉 전에 제주도 관객에게 처음 보여드릴 수 있다는 게. 객석에서 질문을 받는 시간도 잠시 가졌다. 특정 장면이 좋았다는 말씀, 해생 역의 (김)민채가 귀엽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지만, 이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받아 감사했다.

- 김민채 배우가 어떤 어린이인지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만났을 때 만으로 6살이었는데,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다. 첫인상은 말이 없고 조용해서 큰일 났다 싶었다. (웃음) 나를 어려워하면 어떡하나,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 그런데 좋아하는 음식, 만화 등을 물으며 한번 말을 트니까 엄청 말을 잘하는 어린이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원래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기보다는 첫 만남에만 긴장을 좀 했다고 한다. 현장에서는 또 너무 재밌게 지냈다. 쉬는 시간에 같이 도토리 줍고, 버섯 구경하며 힐링했다.

- 김민채 배우를 보며 어릴 적 자신을 보는 느낌도 받았을 테고, 그 시절 선배들의 심경을 대리 체험했을 것만 같다.

영화 <마음이…>를 찍을 때 내가 딱 6~7살이었다. 민채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해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애썼는데, 너무 오래된 일이라 쉽지는 않았다. (웃음) 그래도 민채와 도토리를 줍다가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나도 쉬는 시간에 엄마와 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고, 이거 먹어도 되는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제야 민채도 부담스럽게 챙겨주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마음 편히 있게 해주는 게 최고겠구나 싶었다. 민채에게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달라는 정도로만 얘기했다. 연기적으로는 감독님과 소통할 테니 나는 바쁘게 돌아가는 현장에서도 민채가 즐거울 수 있도록 신경 썼다.

- 서로를 찾아 헤매던 모녀는 극 중반에 재회하고, 엄마는 딸이 목소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를 만나 반가운 와중에 슬픔에도 초연히 대처하려는 복합적인 감정을 겹겹이 쌓아가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시나리오의 긴 지문을 하나씩 체화한 걸까.

지문이 많지는 않았다. ‘해생이 대답을 하지 못한다’, ‘해생이 고갯짓으로 대답하고 아진과 눈을 마주 본다’ 정도였다. 하지만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마음 쓰인 장면이라 잘 표현해내고 싶었다. 아진은 딸이 너무 반갑고, 딸에게 궁금한 것도 많지만, 일단 겉으로 봤을 때 딸이 다친 데가 없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느끼며 마음을 확 놓았을 것이다. 딸이 말을 할 수 없게 된 것도 바로 눈치채지 못했을 거고. 그러다 비로소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진 입장에서는 어떤 판단보다 감정이 먼저 올라오지 않았을까. 이미 긴장은 풀려버렸으니 눈물부터 나왔을 듯하다. 현장에서도 해생이를 먼저 안아준 다음 아진이 어떻게 정신을 차려야 할지 고민하는 감정선으로 연기한 기억이 난다.

- 아진은 자신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토벌대나 산 부대원들과는 구별되는 캐릭터다. 그럼에도 복수를 경계하고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의지로 4·3을 통과한다. 한명의 정치적 주체로서 아진은 어떤 배경 위에 놓여 있다고 이해했나.

아진에게는 어느 날 느닷없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밥 먹고, 잠자고, 이야기 나누는 일상이 위협받지 않도록 방어하는 일이 어떠한 신념보다 1순위에 놓였을 테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갈등을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렇게 찢어져서 해생이를 못 보는 상황이라면 싫다. 그러니 모두가 잘 지냈으면 좋겠다.’ 이 단순하고도 아이 같은 바람이 아진이에게는 본능적으로 올라왔을 것이다.

- <눈길>에 이어 <한란>도 현대사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참담한 역사를 재현하는 일의 무게는 어떻게 감당했나.

<눈길>과 <한란>모두 사건 위주가 아닌 사람 위주로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봤다. 영화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배경에 두고, 그때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를 다루는 것이니 나는 내 감정에 솔직하게 연기하면 되었다. 4·3 생존자 증언집도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감독님들이 이미 작품과 역사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셔서 안정감을 느꼈다. 나는 내 감정 표현에만 집중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 토벌대에 맞서려고 했던 남편 이철(서영주)은 동료들의 의심을 사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영화는 아진에게 슬퍼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의문스럽거나 가혹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나.

아진에게는 정말로 슬퍼할 겨를이 없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죽음을 안 뒤에도 도망가야 했으니까. 아진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다. 연기하는 나도 신기할 정도였다. 도대체 모성애란 무엇이기에 이럴 수 있을지 궁금해 인터넷에 검색해보고, 육아책도 찾아보니, 엄마, 아빠 할 것 없이 부모가 되면 호르몬 체계가 변한다고 한다. ‘내 전부인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회로가 한번 돌아가면 진짜로 다른 문제에는 신경이 안 쓰인다는 거다. 그래서 아진도 잠깐 충격을 받지만, 다시 숨을 골랐을 것이다. 해생이라는 존재가 모든 것을 덮어씌워주는 듯한 감각을 느꼈을 것이기에.

- 아진은 남편처럼 <삼국지>를 읽어보고 싶었다며 딸에게는 자신처럼 물질하지 말고 글공부를 하라고 당부한다. 자신처럼 살지 말라는 대사는 많은 부모들의 입버릇이기도 한데, 먼 훗날 어린 자녀가 연기해보고 싶다고 하면 흔쾌히 지원해줄 것 같나.

왜 연기를 하고 싶은지부터 물어보겠다. ‘재밌어서’라고 말하면 도와주지 않을까. 다른 대답이라면 고민을 좀 해봐야 한다. (웃음) 내가 아닌 인물을 연기하는 상황에 대해 어른이 아무리 잘 설명해줘도 어린이는 자아 형성이 되지 않은 상태라 본능적이다. 가짜라는 걸 알아도 감각은 남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그 과정에서 재미를 느껴야 어른이 되었을 때 상처나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는다. 연기가 재미있으니 어린 나이에도 이 일을 한다는 자각이 있어야 안전할 것 같다.

- 어려서부터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를 앞으로도 추구해야 할지, 그걸 탈피하고자 새로운 캐릭터를 찾아가야 할지 고민한 시기도 있었다고. 20대 중반의 김향기는 어떤 결론을 내렸나.

문득 그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내 욕심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었다. 그 또한 연기를 사랑해서 한 고민이었지만, 결국 배우는 자신에게 들어온 시나리오 중에서 차기작을 택해야 한다. 그러니 특정 시기에 내게 온 제안들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제작진에게 내가 지금 보여줄 수 있을 법한 무언가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뜻 아닌가. 나는 그 믿음의 반을 해내면 되겠더라. 그러고 나니 자유로워졌다.

- 믿음의 반을 해내겠다는 다짐의 의미는.

아역부터 했으니 그때의 이미지를 지우고 변신해야 한다는 부담이 20대 초반에 있었다. 이제 내 나이에 맞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부분은 장점으로 살릴 수 있음을 받아들였다. 내가 말한 50%는 그 장점을 살리는 걸 뜻한다. 나머지 50%는 캐릭터 특성에 맞는 디테일로 채워나가려 한다. 그렇게 마음을 바꾸니 조금 편안해졌고, 앞으로 맡을 역들이 기대된다. <한란>같은 작품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