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사이 우리는 배우 전도연의 손에 총칼이 들려 있는 자태에 익숙해졌다. 영화 <길복순>에서는 전문 킬러를 연기했고, <리볼버>에서는 무기를 끌어안은 채 복수에 사활을 걸었으니까. 12월5일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자백의 대가>는 그 연장선상에서 볼 때 더 짜릿해진다. 이번에도 화면 속 전도연은 와인병을 내던지고, 조각칼을 휘두르지만 그 맥락은 판이하다. 자발적으로 폭력을 자행한 전작의 여자들과 달리 신작에서 전도연이 분한 윤수는 남편을 살해했다는 의혹에 억울해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는 한껏 잔혹해지기에 시청자까지 교란하는 윤수는 교도소에서 사이코패스 모은(김고은)을 만나 수의를 벗을 기회를 잡는다. 전도연은 <협녀, 칼의 기억> 이후 10년 만에 한 프레임에 들어온 후배의 도약을 체감하며 “나는 성장을 멈춘 걸까” 자문했다지만 <자백의 대가>는 증명한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 드라마 <인간실격><일타 스캔들><자백의 대가>를 2년 주기로 공개했다. 영화 시나리오와 달리 드라마 대본을 검토할 때 더 관심을 기울이는 지점이 있나.
드라마는 전 회차 대본을 다 보고 출연을 결정할 수 없다. 많이 봐도 5, 6부까지 읽을 수 있는데,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변형되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캐릭터를 찾으려는 편이다.
- 윤수에게서도 그런 힘을 봤나.
<자백의 대가>는 윤수라는 인물에 끌렸다기보다 두 여자가 스릴러의 중심에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다. 그 안에 있는 윤수가 매력적이라고는 못 느꼈다. (웃음) 오히려 겉으로 드러난 특성이 많지 않으니 내가 그 이면을 탐구하면서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가족 없이 자라 가정에 대한 집착이 강한, 그러나 모성애가 강하다기보다 자기중심적인 여자로 윤수를 구체화해나갔다.
- 연극 <벚꽃동산> 서울 공연 직후 <자백의 대가>를 촬영했고, 그 뒤로 부산과 해외에서도 <벚꽃동산>공연을 이어갔다. 오랜만에 무대와 카메라 앞을 오가는 경험은 어땠나.
아직 <벚꽃동산>투어 일정이 남아 있다. 매번 공연을 할 때마다 새롭게 연습해야 하니 항상 맨땅에서부터 시작하는 기분이다. 이 연극을 계속하는 게 맞는지 고민하다가도 막상 무대에 올라가면 계속해야 할 이유를 찾게 되더라. 아무리 힘들어도 이 경험을 좋아하니까 포기하지 못하고 버티고 있다.
- <벚꽃동산>과 <자백의 대가>에서 맡은 인물 모두 생을 뒤바꿀 만한 전락을 겪는다는 점에서 닮았다. <자백의 대가>는 그 낙차를 그리고자 윤수의 결혼식을 첫 장면으로 내세우는데, 이때 영화 <너는 내 운명> 속 도트 무늬 원피스를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어 반가웠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웃음) 윤수는 일반적인 웨딩드레스를 입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만의 스타일이나 결혼식 컨셉부터 고민했다. 구두가 아닌 단화, 드레스가 아닌 원피스를 떠올리면서 접근했다. 단순한 접근일지도 모르지만, 윤수의 자유로운 영혼이 보헤미안 패션과 강렬한 색감으로 표현되기를 바랐다.
- 그 후 남편의 죽음은 여러 인물의 관점에서 반복 재현된다. 특히 윤수가 결백을 주장할 때와 검사 백동훈(박해수)이 반론을 펼칠 때 각각 다른 얼굴을 꺼내 보여야 했는데.
감독님은 초반에 윤수가 남편을 죽인 범인으로 보일 수 있게 시청자를 혼란스럽게 하고 싶어 하셨다. 촬영할 때도 그 모호함을 신경 썼는데, 편집 과정에서 그런 복잡함이 조금은 걷어진 듯하다. 윤수까지 시청자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결론 지으신 게 아닐까. 감독님도 나도 직접 촬영하고 연기하기 전까지는 인물이 처한 상황을 직접 겪어볼 수 없으니 나 또한 윤수와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운 순간들이 있었다.
- 윤수처럼 혼란을 느꼈다는 말은 윤수를 주도면밀한 인물로 해석하지는 않았다는 뜻일까.
시청자 입장에서 그녀가 범인으로 보이는 동안은 면밀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윤수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감정적이고, 순간순간 즐겁고 싶을 뿐이다. 둘째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욕심이 큰데, 살림을 잘하지도 않는다. 그런 자신을 따뜻하게 챙겨주던 남편 없이 아이와 홀로 서야 하는 처지인 셈이다.
- 남편의 장례를 치를 때도 침착하던 윤수가 처음 감정을 폭발시키는 신은 교도소에서 딸 소식을 들었을 때다. 신음하듯 우는 소리가 후에 모은과 거래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한편 윤수가 교도소에 오기 전 아이를 돌보는 모습이 그리 살갑지만은 않다는 점도 눈에 들어왔다.
대본에는 윤수의 모성애가 훨씬 더 극명하게 묘사돼 있었다. 다만 나는 여자들 이야기에 모성이 식상하게 쓰이는 게 싫다. 신파적인 장면을 빼더라도 기본적으로 아이가 있으면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본능은 내가 뭔가 표현해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드러나지 않겠나. 사실 많은 엄마와 딸이 여느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서로를 살뜰하게 챙기지만은 않는다. 나는 좀 현실적이고 싶었다. 물론 교도소에서 울 때만큼은 윤수의 절실함이 극대화돼야 했다. 아이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자신은 억울하니 교도소에서 나가야 한다는 절실함.
- 이후 윤수와 모은은 독방의 벽 하나를 두고 처음 대화한다. 실제 촬영은 어떻게 했나.
고은이 찍을 때는 내가, 내가 찍을 때는 고은이 옆에서 대사를 쳐줬다. 벽을 두고 촬영했는데, 서로의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얼굴도 보이지 않으니 감정 쌓기가 어려웠다. 윤수가 조금 더 극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윤수는 나약하고 무기력하다. 독방 바닥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니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꿈처럼 몽환적으로 들리지 않았을까. 그러니 감정적으로 부족해 보일지 몰라도 환청을 듣는 듯한 표정으로 연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 윤수가 모은의 자백을 통해 살인 누명을 벗는 대가로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아이러니는 어떻게 받아들였나.
윤수가 윤수만의 방식을 택한다고 봤다. 윤수가 어떤 사람인지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이 모은이다. 즉 윤수가 자기 방식을 찾아갈 수 있도록 모은이 윤수를 몰아붙인 것 같다. 그래서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되는데, 윤수가 그 과정에서 너무 고군분투해서 차라리 감방에 있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웃음)
- 이창동 감독과 재회한 영화 <가능한 사랑> 크랭크업 소식도 들었다. 짧게 후기를 전해준다면.
현장 분위기가 무척 즐겁고 화기애애했다. 나와 (설)경구 오빠는 워낙 편한 사이라 우리끼리만 있으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상냥한 (조)인성이와 (조)여정이 덕분이었다. 이창동 감독님과 함께한 결과물은 늘 예측하기 어렵다. 나도 내가 어떻게 찍혔는지 궁금해하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