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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오히려 더 차가운 피가 돌도록, <자백의 대가> 배우 김고은

이번엔 일생일대의 제안을 건네는 쪽이다. <은중과 상연>에서 조력 사망의 여정을 함께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김고은이 <자백의 대가>에선 ‘내가 당신을 교도소 밖으로 나가게 해주겠다’는 카드를 꺼내 든다. 그가 분한 모은은 떠들썩한 치과의사 부부 살인사건의 피의자로 세간의 이목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다. 그의 초점 없는 시선을 단숨에 붙든 건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수감된 윤수(전도연)다. 혐의를 부정하던 뉴스 속 여교사의 간절한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모은은 윤수에게 또박또박 전한다. ‘내가 당신 남편을 죽였다’고 자백하겠다고. 대신 ‘언니는 나가서 누군가를 죽여달라’고.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태연하게 묘사하는 모은은 언론이 명명하듯 사이코패스일까. 아니면 은밀히 자신만의 과업을 수행 중인 치밀한 설계자일까. 김고은을 만나 모은이라는 수수께끼의 여자를 해독해보았다.

- <은중과 상연>을 찍고 연달아 <자백의 대가>에 들어갔다. 휴식을 미루게 한 작품의 매력은 무엇이었나.

<자백의 대가>를 처음 알게 된 건 훨씬 전, 초반 기획 단계였다. 그때도 흥미로웠지만 예정된 일정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흘려보냈다. 그러다 다시 제안을 받고 대본을 읽는데 여전히 독특했다. 전개나 그림에서 예상치 못한 구석이 있었고, 분위기 자체도 남달랐다. 무엇보다 극을 끌어가는 두 여성배우의 시너지효과가 분명히 날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 놓치고 싶지 않았다.

- 데뷔 이래 가장 짧은 헤어스타일이다. 반삭에 가까운 모은의 쇼트커트는 시나리오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나.

그렇지 않았다. 어떤 대본이든 읽으면 캐릭터의 외적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편이다. 데뷔작인 <은교>때부터 그랬다. 단발 설정이 없었는데도 내 느낌에 은교는 분명 단발일 것 같아서 과거 내 단발 시절 사진을 감독님에게 보여드리며 의견을 피력했다. 재희(<대도시의 사랑법>)의 자유로운 히피펌도 그렇게 탄생했고. 처음부터 모은은 반삭에 가까운 머리일 것 같았다. 헤어스타일은 물론, 세상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은 친구니까. 또 숨을 곳이 전혀 없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고 표정이 다 보이는데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면 했다. 쇼트커트 아이디어를 들은 감독님과 작가님이 처음엔 모은이 너무 세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셨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가느다란 목선이 모두 드러나 더 연약해 보일 것이라고 설득했다. 당시에 당차게 제안했으나 실물을 보지 않은 상태라 불안하긴 했다. 그런데 테스트 촬영날, 긴 머리의 윤수와 나란히 서서 한컷을 찍었는데 감독님이 자르길 잘한 것 같다고 하시더라.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 모은의 ‘알 수 없음’은 말투에서 나온다. 목소리에 고저가 거의 없고, 말의 속도는 자로 잰 듯 균일해 의중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것도 배우의 아이디어일까.

맞다. 처음 모은에게 접근할 때 사이코패스가 아닌 감정이 부서지고 고장 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상태가 말투에도 드러나길 바랐다. 또 모은은 목소리 하나로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 역할이 주어진 인물이라 어떻게 말할지 많이 고민했다. 이를테면 옆 징벌방에 있는 윤수에게 거래를 제안할 때 당신이 꼭 해야 한다고 호소하기보다는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말할 때 상대가 더 호기심을 갖고 귀를 기울일 거라고 봤다.

- 폭우 속 교도소 운동장에서 모은이 윤수를 향해 “언니, 파이팅”을 외치는 돌발적인 장면에서도 모은의 움직임과 톤은 기이하다. 이 장면은 어떻게 준비했나.

이 신이 도연 선배와의 첫 장면이었다. 어떻게 움직여줬으면 좋겠다는 감독님의 디렉션은 따로 없었고 자유롭게 몸을 썼다. “언니, 파이팅”은 현장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후시로 넣었다. 모은과 윤수, 한배를 타게 된 둘에게만 들리는 내면의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찍었다. 선배와 밀착한 장면이 호송차 안에서 윤수가 모은의 어깨를 전략적으로 무는 신이었다. 내부는 좁지, 의자는 빽빽하지, 거기다 손까지 묶여 있어 제약이 많았다. 쉽지 않은 환경에서 어떻게 하면 임팩트 있는 액션을 만들 수 있을지 무술감독님과 배우들이 고심했던 기억이 난다.

- 온몸의 흉터들로 짐작건대 모은은 과거의 큰 충격으로 무감각해졌거나 혹은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과잉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를 어떻게 해석했나.

모은은 하고 싶은 일을 억지로 참는 성격이 아니다. 어떻게 보여야 한다는 의도도 없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솔직한 사람이다. 독약을 만드는 게 그에겐 너무 쉬운 일이라 “여기 굴러다니는 몇개”만 있어도 독약 제조가 가능하다고 말한 것이고, 말하기 싫을 땐 싫다고 한 것뿐인데 상대들은 그런 모은을 사이코패스니 마녀니 하며 이상한 사람으로 본다.

- 모은을 보며 <차이나타운>의 일영, <몬스터>의 복순을 떠올렸다. 셋 모두 김고은 필모그래피에서 잔인한 세계 속 기구한 여성 캐릭터로 불릴 만하다.

모은은 그 둘보다 더 슬픈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을까. 첫 살인이 모은을 더는 스스로에게 관대해질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 윤수에게 거래를 제안할 때 모은은 “내가 아닌 언니의 절실함을 믿으라”고 조언한다. 요즘 김고은은 무엇에 절실한가.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땐 ‘더 잘했어야 했는데’ 하며 스스로에게 무척 야박하게 굴었다. 그런데 이제는 매사를 매달리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는다. 연차가 쌓이면서 신마다 강약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 공동 작업의 구성원으로서 나무보다 숲을 보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감독님이 오케이하면 나도 오케이. 말 한마디에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 잘하고 싶은 마음은 내가 알아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주문들이 나를 한결 편안하게 해준다.

- 어둠 속에 홀로 놓인 모은이 <백현진쑈: 공개방송>무대 위 김고은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 공연이 벌써 2년 전이다. 오랜만에 선 무대였고, 관객과의 거리가 굉장히 가까워서 생생함이 남달랐다. 8~9분짜리 독백이라 쉽지 않았지만 핀 조명을 온전히 누리는 재미가 컸다. 정말 좋은 경험이었고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있다.

- 내년 상반기에 <유미의 세포들>이 시즌3로 돌아올 예정이다. 30대의 시작부터 함께하는 작품이라 의미가 깊겠다.

그렇다. 시즌3는 8부작이고 이미 촬영을 마쳤다. 이제 유미는 아주 잘나가는 웹소설 작가다. 유미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실감했던 게 유미의 집과 작업실이 소박하지 않다. 처음 보고 ‘왜 이렇게 좋아?’ 하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웃음) 작가로서의 삶과 새로운 파트너인 순록(김재원)과의 로맨스가 자연스럽게 엮이는데 그 과정에서 유미의 성숙함과 변화가 선명하게 드러날 거다.

사진제공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