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파라마운트가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WBD)에 대해 1080억달러의 적대적 인수 제안을 내놓으면서, 넷플릭스가 기존에 맺어둔 830억달러 규모의 스트리밍 중심 합의안과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겉으로는 단순한 기업 인수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극장 중심 시대의 회생을 꿈꾸는 파라마운트와 스트리밍 절대 체제를 구축하려는 넷플릭스의 근본적 충돌이다. 파라마운트는 WBD 전체- HBO, WB 스튜디오, CNN 등 레거시 자산까지- 를 인수해 ‘극장-first’ 전략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매년 30편 이상의 극장 개봉작을 약속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파라마운트가 인수에 성공한다면 극장산업은 일정 부분 활력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지만, 중복 인력에 따른 대규모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고 전통 TV시장은 결국 느리게나마 쇠퇴할 것이다.
반면 넷플릭스는 WBD 인수에서 스트리밍에 도움이 되는 자산만 남기고 케이블 네트워크 등은 과감히 제외했다. 이는 곧 미국 TV 신디케이션 구조의 근본적 붕괴를 의미한다. 오랫동안 TV시장을 떠받쳐온 대표적 재방송 IP- <프렌즈><가십 걸><길모어 걸스><두 남자와 1/2>- 가 스트리밍 독점 체제로 편입되면 지역 방송국과 케이블 채널이 의존하던 콘텐츠 기반 자체가 사라진다. 신디케이션이 무너지면 TV의 생존 논리도 함께 무너진다.
여기서 더 아쉬운 지점은 다른 OTT들이 그동안 간신히 버텨온 자산들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특히 워너는 광고 기반 무료 스트리밍(FAST) 시장에도 적극적으로 콘텐츠를 공급해왔고, 다양한 채널들이 워너 라이브러리 덕분에 장르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자산이 특정 플랫폼의 독점 체제로 흡수된다면 시장의 미디어믹스는 급격히 단일화되고, 콘텐츠 다양성 측면에서 개인적으로는 매우 아쉬운 결정이 된다. FAST 생태계의 넓은 스펙트럼을 유지해온 중요한 기반이 단숨에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극장 역시 예외가 아니다. 넷플릭스는 극장 개봉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WBD의 극장-first 유산 또한 빠르게 스트리밍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파라마운트는 극장 유통을 지키겠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산업의 패러다임 자체가 OTT 중심으로 넘어가는 상황에서 그 지속성이 얼마나 유지될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넷플릭스는 기존 IP 재가공에도 능숙하다. <원피스><아바타: 아앙의 전설><더 킹>등 기존 팬덤 기반 콘텐츠를 글로벌 히트작으로 재탄생시킨 경험이 있다. WBD의 HBO·DC·WB IP까지 확보한다면 넷플릭스는 사실상 전세계 콘텐츠 시장의 절대적 1강으로 올라선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스트리밍 판도는 어떻게 흘러갈까?
파라마운트가 WBD 인수를 성공할 경우
넷플릭스 – 디즈니+ – 파라마운트+의 3강 체제.
: 극장 시장은 느리게라도 유지되며 FAST· OTT·전통 미디어의 다양한 생태계가 일정 부분 남게 된다.
인수가 무산되고 넷플릭스가 가져갈 경우
넷플릭스 절대 1강, 디즈니+ 단독 1중, 피콕·파라마운트+는 2약으로 밀려남.
: 이는 스트리밍 산업의 완전한 수직적 통합을 의미하며 콘텐츠 유통은 더욱 단일화되고 시장 다양성도 축소될 수 있다.
결국 이 격돌은 WBD만의 문제가 아니라 팬데믹 이후 한번도 정상화되지 못한 할리우드 경제구조, 급격히 오른 제작비, 그리고 스트리밍 중심 성장 모델이 한계에 부딪힌 ‘산업 전체의 병목현상’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의 전망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이번 인수전은 단순히 회사 하나가 다른 회사를 가져가는 차원을 넘어 미국 전체 미디어생태계의 구조조정을 몇년 앞당기는 촉발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우선 극장산업은 완전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개봉 작품 수가 급격히 줄고, 오직 몇개의 글로벌 대형 프랜차이즈만 살아남는 시즌제 블록버스터 구조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파라마운트가 인수하면 이런 구조를 어느 정도 늦출 수 있지만, 넷플릭스가 가져가면 극장 개봉은 ‘프리미엄 이벤트’ 수준으로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
TV산업의 미래는 더욱 명확하다. 신디케이션 기반이 무너지면 지역 방송국(Local Stations)의 광고수익 모델은 붕괴한다. 이는 TV라는 플랫폼의 ‘서서히 죽음’이 아니라 수익 구조 자체가 흔들리는 급격한 축소를 의미한다. 미국 지역 방송사들이 20~30년 유지해온 비즈니스 모델이 단숨에 약화될 수 있다.
FAST 시장 역시 WBD의 이탈로 큰 타격을 받는다. 워너의 프리미엄 라이브러리는 FAST 생태계에서 장르 다양성을 지탱해온 핵심 자산이었는데, 이 공급원이 사라지면 FAST는 리얼리티·다큐멘터리·저가 제작 중심으로 단순화될 가능성이 높다. 삼성·LG 같은 OEM FAST 채널 플랫폼도 경쟁력에서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OTT 경쟁 구도 역시 단순해진다. 넷플릭스는 광고형 모델에서 계약 콘텐츠를 제한적으로 오픈해왔는데, WBD까지 흡수하면 AVOD에서 압도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 디즈니는 마블·스타워즈 중심의 프랜차이즈 전략에 더 깊이 들어갈 것이고, 아마존과 애플은 프리미엄 전략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파라마운트+와 피콕은 사실상 니치 영역으로 밀려날 것이다.
한국 시장에서 보면 판권 구조도 영향이 크다. 넷플릭스가 WBD의 아시아 판권까지 장악하게 되면 K콘텐츠의 글로벌 유통 협상력은 더 약화될 수밖에 없다. 높은 금액으로 확보한 WBD 자산을 적극 활용해야 하는 만큼 한국 슬레이트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IP 부족을 배경으로 인터내셔널 콘텐츠에 투자해온 기존 전략도 구조적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다. 반면 파라마운트 인수 시에는 여전히 다층적 유통 구조가 유지되기 때문에 한국 콘텐츠 사업자 입장에서는 옵션이 더 많이 남을 것이다.
결국 이번 ‘할리우드 쇼다운’은 단순한 인수합병(M&A)을 넘어 우리가 어떤 미디어 환경에서 미래를 맞이하게 될지를 가르는 분기점이다. 극장과 TV, FAST와 OTT가 공존하던 시대는 저물고 있으며 앞으로는 선택된 몇개의 거대 플랫폼만이 이 시장의 질서를 다시 쓰게 될 것이다. WBD를 누가 가져가느냐의 문제는 그래서 단순한 소유권이 아니라, 콘텐츠를 어떻게 소비하고 어떤 세계를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