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7일, 배우 김지미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영면에 들었다. 향년 85살. 고인은 1957년 데뷔해 3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고, 1985년 자신의 이름을 딴 제작사 지미필름을 설립해 7편의 영화를 기획했다.
그의 영화 인생은 김기영 감독과의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김기영 감독이 고등학생 김지미를 발견해 캐스팅했다. 그렇게 17살에 처음 찍은 작품이 <황혼열차>(1957)다. 그 필름은 유실되었지만, 당시 신예 김지미에 대한 반응은 한국영상자료원의 구술 채록문에 남아 있다. “미래가 기대되는 신인이라는 평을 받았고, 선배 배우들도 그녀를 보고자 몰려들었으며, 후속작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자신을 발굴한 김기영 감독과 <초설>(1958),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렌의 애가>(1969), <육체의 약속>(1975), <화녀 ’82>(1982)를 함께하는 동안 김지미는 김수용, 박종호, 변장호, 신상옥, 임권택, 정창화, 정진우, 최무룡, 홍성기 등 당대 유명 감독들에게 끊임없이 부름을 받았다. 덕분에 트로피도 쌓였다. <대원군>(1968)으로 제5회 백상예술대상, <너의 이름은 여자>(1969)로 제15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제7회 청룡영화상을 품에 안았을 뿐 아니라 <토지>(1974), <육체의 약속>, <길소뜸>(1985)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세 차례 받았다.
연기자로서 성공적인 행보를 걸은 그는 제작과 외화 수입에도 뛰어들었다. 지미필름 창립작으로 임권택 감독의 <티켓>(1986)을 만들었다. <티켓>, <명자 아끼꼬 쏘냐>(1992)에서는 제작자이자 주연으로 활약했다. 그가 해외영화제에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1987), 폴 버호벤 감독의 <로보캅>(1987)을 먼저 알아보고 수입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그 뒤로는 1995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1998년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으로 일하며 영화계에 이바지했다.
오랜 경력을 쌓아가는 동안 스캔들이 뒤따르기도 했고, 후배 영화인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2010년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펼친 회고전 <그녀가 허락한 모든 것: 스타, 배우, 그리고 김지미> 운영을 두고 이런저런 구설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역사에 기록될 이름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2017년 한국영상자료원은 “작품마다 매혹적인 아름다움과 그녀만의 카리스마로 특유의 매력을 선보인 배우”로 김지미를 호명하며 그의 데뷔 6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을 마련했다. 이 특별전에서는 종교계의 반발에 부딪혀 제작이 중단된 <비구니>(1984)의 부분 복원판 상영 후 임권택 감독, 송길한 작가가 김지미와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한국영화인총연합회는 12월11일부터 14일까지를 추모 기간으로 정해 서울영화센터에 추모 공간을 마련했다. 고인은 떠났지만, 그가 스크린에 새긴 얼굴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