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류현경 감독의 장편 데뷔작. 배우로 익숙했던 류현경이 연출·각본·주연을 맡고 배우 김충길과 함께 호흡을 맞췄다. 대본 없이 이야기의 큰 흐름만 공유하고 배우들의 즉흥적인 선택과 반응에 운명을 맡긴 이 영화는 우연과 자연스러움을 중심축으로 놓고 서사를 이어나간다.
이야기는 영화 촬영장에서 시작한다. 충길(김충길)과 현경(류현경)은 함께 출연한 영화의 촬영을 마친 뒤 뒤풀이에 참석하고 충길은 그곳에서 현경에게 고백을 한다. 이 고백은 흔히 기대하는 오래된 감정의 폭발이나 용기낸 결심과 거리가 멀다. 충분히 준비한 말도 아니고 고민 끝에 내린 결론도 아니다. 타이밍과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마음이자 말로 꺼내는 순간 어긋나버리는 감정에 가깝다. 현경 역시 그 고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명확한 거절이나 대답 대신 설명할 수 없는 어색함이 두 사람 사이에 남는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고백 자체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백의 결과를 향해 달려가기보다 복잡한 감정과 정리되지 않은 관계를 그냥 내버려둔다. 대신 고백 이후의 시간, 말이 불러일으킨 파장과 불편함이 인물들 사이에 떠다니는 과정을 지켜보게 한다. 관계는 길을 잃고 말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언뜻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감정이 인물과 인물 사이를 오간다.
3개월 후, 각자의 이유로 부산을 방문한 두 사람은 다시 마주치게 되고 낯선 도시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특별한 기분을 느낀다.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서 가능했던 만남. 재회하는 장면 또한 평범하고 우연적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만큼 흔한 사건이라 오히려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다. 영화의 목적지가 불분명하기에 장면들은 서사를 구성하기보다 감각과 분위기를 만드는 데 쓰인다. 부산 거리를 일없이 돌아다니는 동선, 말을 고르다 결국 아무 말도 못하는 침묵, 음악을 듣고 바다를 함께 걷는 시간. 그렇게 교차하는 장면은 설명 없이도 충분히 의미가 전달된다.
어쩌다 도착한 곳이 마침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일 때, 그 순간은 계획대로 됐을 때의 성취감만큼 강렬한 기쁨을 준다. 영화 속 인물들은 그렇게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결론에 도달하려 애쓰기보다 시간을 타고 흘러가며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간다.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관계, 말해버린 감정과 말하지 못한 마음이 서로를 밀어내며 떠다니는 시간, 그리고 그 불편함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 힘을 빼고 상황을 내버려둘 때 비로소 드러나는 감정의 본모습을 영화는 믿고 따라간다. 그러다 도달하는 뜻밖의 힐링.
영화 밖의 삶이야말로 대본이 없다. 대부분 불확실하고 불분명하고 불편한, 뭐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시간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때로는 이 영화처럼 되는 대로 흘러가도 괜찮겠다는 여유가 상영시간 동안 깃든다. 작위와 거리가 멀어질수록 관객은 영화에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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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사건 없이 평탄하게 흘러가는 <고백하지마>는 말이나 행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백이 생길 때마다 삽입곡으로 틈새를 메운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관객은 서사를 따라 가려는 긴장에서 풀려나 풍부해지는 분위기와 여운에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즉흥에 가까운 여정을 동행하는 또 하나의 안내자. 음악이 영화의 완성도에 얼마나 크게 기여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에 삽입된 곡은 김오키의 <안녕>(feat. 이하이), 김오키의 <내 이야기는 허공으로 날아가 구름에 묻혔다>(feat. 서사무엘), 김일두의 <문제없어요>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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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또한 고백을 다루지만 그 방식은 다르다. 대본 없이 흘러가는 <고백하지마>는 설정과 즉흥의 경계가 불확실한 반면,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영화제작을 위해 일본 소도시를 취재하는 과정과 그것을 바탕으로 완성된 영화를 두 챕터로 나누어 보여줌으로써 제작 과정과 결과물이 분명히 구분된다. 배우들이 실제 여행처럼 움직이며 만들어낸 이 영화는 대본이 있음에도 즉흥처럼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고백이라는 사건을 중심에 두고 한편은 즉흥의 감각으로, 다른 한편은 계획을 통해 고백에 천천히 다다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