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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소연의 클로징] 어떤 연구용역 보고서

동덕여자대학교 공학 전환을 둘러싼 그간의 과정을 지켜보며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래커를 사용한 학생들의 평화적인 의사 표현을 일부 언론은 왜 폭력이라고 부를까? 여대와 이해관계가 없어 보이는 남자들이 왜 유독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학생들을 비난할까? 학교는 학생 2889명과 교원 163명, 직원 124명의 의견을 1:1:1로 반영하는 것을 왜 ‘평등’이라고 말할까? 그러던 중 지난 12월3일 발표된 공학 전환 타당성에 관한 연구용역 결과를 전해 듣고 찾아본 50장짜리 슬라이드 자료는 충격적일 정도로 의문투성이였다. 공학 전환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이 자료에서 유일하게 제시된 객관적인 근거는 재정 안정화 시뮬레이션뿐이다. “유학생 증가, 대학 위상 향상에 따른 연구비, 재정지원사업 등 전입 및 기부수입이 매년 2%씩 상승한다고 가정할 경우, 2040년까지 안정적으로 운영될 것”을 보여주는 그래프가 포함된 슬라이드 한장이다. 나머지 공학 전환의 근거는 대부분이 추정일 뿐 실증적인 데이터가 없으며 인식조사 역시 편향적으로 분석되어 있다. 하나씩 짚어보자면 이렇다. 남학생이 입학하면 학교의 경쟁력이 높아진다는 말이 근거도 없이 반복된다. 여대에서 공학으로 전환한 학교의 전수조사를 해서 수치로 보여주면 될 일인데 말이다. 그나마 제시되는 근거라고는 정부의 대규모 이공계 인재양성 사업에 참여하는 여자대학이 없다는 사실뿐이다. 전국 대학 중 50곳 정도만 참여하는 사업에 여자대학이 없다는 것을 문제 삼는 것도 의아하지만 남학생을 뽑으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은 더 의아하다. 이 보고 자료의 압권은 여성 교육과 여성 리더십을 다룬 부분이다. “국내 여성 교육을 통해… 다양한 성과를 이루었으나 해당 교육이 사회 진출로의 연결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어 교육적 측면을 넘어선 사회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분석의 결론이 여성 교육을 포기하는 것이라니! “여성이 리더가 되기 어려운 (사회구조적인) 이유”를 여섯 가지나 든 후 공학 교육의 장점으로 “예방주사 효과”가 써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읽고 있는 것이 진지한 연구용역 보고서가 맞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방주사 효과란, 여학생들이 혹독한 성차별 사회에 나가기 전 남학생들과 미리 경쟁하면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대처 방식을 터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얼마 전 만난 공대 여학생이 떠올랐다. 현장실습 기회를 주는 기업체에서 남학생을 선호해서 성적 좋고 열의 넘치는 여학생 대신 상대적으로 학습 능력이 저조한 남학생들이 실습 기회를 얻게 되어 속상해했다. 과연 여기에서 예방주사의 효과는 무엇인가? “여성의 강점”을 “타인의 감정을 읽는 사회적 민감성”이라 적은 대목에서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학생회장 선거 벽보의 '남학생 회장, 여학생 부회장'을 익숙하게 마주치는 공학과에서 회장, 부회장이 당연히 모두 여성인 여대 학생들은 ‘여성의 강점’을 각각 무엇이라고 배우게 될까? 대기업 여성 임원을 가장 많이 배출한 이화여자대학교 출신 여성의 강점은 무엇일까? 다행히 이 자료에도 딱 하나, 쓸 만한 내용이 있기는 하다. “여성이 포함된 혼성그룹이 단성 그룹보다 집단지성이 높게 측정”된다는 것이다. 여대와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단성 그룹’이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다. 사실상 ‘남고’로 운영되는 자사고, 남교수나 남학생으로만 채워진 이공계 학과나 실험실, 중장년 남성들로 가득한 국회나 기업 이사회 등이 진정한 의미에서 ‘혼성그룹’이 되는 날, 공학 전환 타당성 연구보고서가 나온다면 그때 다시 진지하게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