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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오래된 무명의 강인함 <기차의 꿈>

<기차의 꿈>

20세기 초 아이다호의 원시림, 한 남자가 도끼를 휘두른다.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는 그저 노동의 메아리가 아니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모든 나무들의 비명이 곧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고 있었음은 분명해진다. 적어도 로버트(조엘 에저턴)에게는 그것이 아메리칸드림보다 선명한 멜로디였다. 클린트 벤틀리 감독의 <기차의 꿈>은 소설가 데니스 존슨이 쓴 동명의 작품에 기반해 평범한 한 벌목꾼의 80년 생애를 통과한다. 원작 소설이 헤밍웨이적 간결함으로 찬사받았다면 영화는 테런스 맬릭의 기시감을 자아내는 서정시로 탈바꿈했다. 시대적 교집합 면에서는 20세기 초 떠돌이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맬릭의 <천국의 나날들>(1978)뿐 아니라 마이클 치미노의 수정주의 서부극 <천국의 문>(1980)도 어김없이 함께 떠오르는 영화다. 앞서 나온 두 영화는 변화하는 미국을 ‘천국’에 빗대면서 그 염원의 무모함과 불가능성을 가리켰다. 이번 작품엔 ‘꿈’이 있다. 건설업이 부흥하고 기차가 대륙을 가로지르는 시점에 기차의 꿈이란 얼핏 미국의 꿈처럼 들린다. 하지만 철도를 놓아 문명을 확장하는 것이 노동자 자신의 꿈이었던 적은 없다. 산기슭에 통나무집을 짓고 사는 로버트의 꿈은 한철 노동이 끝나면 아내 글래디스(펠리시티 존스)와 딸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더 넓은 곳으로 뻗어 나가기보다 그저 돌아가기를, 정확히는 자신의 터전이라 믿는 곳에 나무처럼 뿌리내리기를 소망한다. 그에게 기차의 꿈은, 고된 노동으로 잠들었다가 도착지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먼 곳에서 집이 불타는 악몽이다. 남자는 산불로 가족 모두가 흔적 없이 사라졌을 때조차 폐허가 된 집터에 그대로 남아 있기로 한다. 지근거리에서 공생하는 야생 곰도 굶주림보다는 극심한 슬픔에 시달리는 걸음걸이로 그의 곁을 지나친다.

<기차의 꿈>의 주인공은 가진 것이 많지 않다. 그를 지탱하는 내면의 양식은 가족애, 그리고 근면 성실한 노동자로서의 자부심인데 영화는 기다렸다는 듯 이 모든 것을 소거한 후에야 본론을 시작한다. 거대 역사의 속절없는 흐름이 개인의 삶에 뿌리내리는 형태는 언제나 교묘해서, 자연재해로 가족을 잃고도 벌목 현장을 전전하던 로버트는 마지막 남은 노동자로서의 존엄함마저 소리 소문 없이 빼앗긴다. 관객이 스크린 타임 속 세월의 부피를 오롯이 체감하기도 전에 도끼질에 능숙하던 남자는 낯선 전기톱 앞에서 뒷걸음질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후로 그는 텅 빈 채로도 운행을 계속하는 기차처럼 그저 세월 속을 살아나간다. 과시적인 인물형의 향연으로 점철된 동시대 스토리텔링의 포화 속에서 배우 조엘 에저턴이 탁월하게 묘사한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너무도 평범해서 희귀종이다. 미국의 우화인 <기차의 꿈>이 시대와 지정학적 위치를 건너뛰어 현실의 수많은 조용한 존재들에 가닿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기차의 꿈>

한편 <기차의 꿈>에서 종국까지 사그라들지 않는 불꽃은 죄의식이다. 1917년 여름, 로버트는 함께 일하던 중국인 동료가 백인 집단의 무차별적 폭력에 살해당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주인공을 가담자로 묘사한 원작과 비교해 영화는 도덕적 책임을 희석했으나 방관의 죄도 무겁게 받아들인다. 나무를 베는 원죄가 불러낸 기후 재앙, 정착민 식민주의가 낳은 인종적 폭력의 긴 역사가 개인의 삶에 그리는 무늬는 이처럼 모호하지만 분명 지속된다. 생각해볼 것은 가해와 속죄 모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동시에 어느 쪽에서도 주역이 아닌 사람들의 인생, 다시 말해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스타일의 차이와 무관하게 소설과 영화가 동일하게 짊어진 무거운 숙명은 문명이 반드시 값을 치른다는 사실이다. 로버트에게 그 대가는 평생의 무명성, 존재의 지극한 사소함으로 찾아온다. 우리의 주인공은 멀쩡했던 나무가 어느 날 육중한 가지를 떨어뜨려 동료를 죽이는 이치를 이해할 수 없다. 산불이 하필이면 왜 자기 가족을 앗아가는지, 잿더미 속에 홀로 남은 자신에게 왜 그제야 단비가 쏟아지는지 알기에도 역부족이다. 종종 그를 보살피는 원주민 이웃을 제외하면 누구도 로버트의 얼굴에 늘어가는 주름살을 알아차리지 않는다. 훗날 인류가 허공을 정복하여 달 탐사까지 성공했음을 알릴 때에도 로버트는 ‘노바디’다. 서글프지만, 그렇다고 해서 쇼윈도 너머로 텔레비전을 멍하니 바라보는 노인에게 필요한 것이 뒤늦은 훈장일 리는 없다.

훌륭한 이야기의 창은 구태의연한 사회를 찌르고, 그 방패는 인간 존재의 한낱 무상함을 보호할 수 있다. 연출자의 불안을 드러내는 빈번한 환상 몽타주와 플래시백이 난삽함에도 불구하고 <기차의 꿈>에 저항 없이 흐느끼게 되는 이유다. 1968년, 로버트는 생애 처음 경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기차의 꿈이 소진되고 비행기의 꿈이 날아가는 시대가 그를 지켜줄 리 만무하지만 이 순간 그는 주어진 행복을 누린다. <기차의 꿈>의 최종 시퀀스는 평생 자기 삶의 미스터리를 풀지 못하는 인간을 마침내 위로한다. 부모도, 가족도, 후계자도 없는 남자를 두고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말한다. “그 봄날, 위아래의 감각마저 뒤집혔을 때 그는 마침내 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한없이 무력하게 상공의 바람과 압력에 흔들려가면서 문득 미소 짓는 남자가 우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지 나는 자신이 없다.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는 평범한 삶들에 대한 차분한 경의로 읽을 때 <기차의 꿈>은 경이롭다. 동시에 이 영화가 끝내 떨치지 못하는 원죄를 기억한다면, 아무리 미약한 개인도 폭력의 사슬을 짊어진 역사적 주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역설 속에서 모든 무명의 인간은 한 그루 나무의 심오함을 배워가는 게 아닐까. 데니스 존슨은 소설에서 이렇게 바꾸어 썼다. “대부분의 우리는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만, 바로 그 과정에서 매우 깊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