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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땅에 발 붙인 연기, <고당도> 배우 강말금, 봉태규

살아 계신 아버지의 장례식을 미리 치른다. 선영(강말금)과 일회(봉태규) 남매가 천륜에 반하는 일을 떠올린 것은 단순한 생활고가 아닌, 조카이자 아들 동호(정순범)의 의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슬픔으로 진실을 위장한 채 선영과 일회는 상복을 입고 장례식 손님을 마주한다. 권용재 감독의 데뷔작 <고당도>에서 배우 강말금봉태규는 서로를 원망하면서도 끝내 버릴 수 없는 가족관계를 솔직하게 그려낸다. “개인적인 경험과 나이대에 따라 다양한 감상을 할 수 있는 영화”(강말금)에 관해 두 배우는 관객이자 연기자로서 <고당도>에 관한 각자의 시선을 들려주었다.

봉태규, 강말금(왼쪽부터).

- 두 배우 모두 권용재 감독과 <고당도> 이전부터 인연이 있었다고.

강말금 2019년 권용재 감독의 단편 <조의(JOY)> 때 처음 만났다. 그때는 선영이 아닌 미영이란 이름이었고 가짜 장례식을 치르는 어른들의 상황을 풍자하는 인상이 강했다. 이후로 <고당도>도 함께하자고 연락을 받았는데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봉태규 권지애 감독의 단편 <어느 날 아들이 새우가 되었다>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당시 권용재 감독이 프로듀서였다. 세심하게 현장을 챙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던 참이었는데, 마지막 촬영 즈음 넌지시 이야기하더라. 본인이 준비 중인 작품에 잘 어울릴 것 같다고. 그러고 두세달 후에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무척 재밌어서 바로 하겠다고 했다.

- 영화를 보며 각본 단계에서부터 상당히 재밌을 것이라 예상했다.

강말금 전반적으로 사건은 비슷한데 영화에서 더 깊어졌다. 권용재 감독은 계속 진화하는 느낌이다. 단편 촬영 현장과 결과물 <조의 (JOY)>를 보고 받은 각각의 인상, 장편 촬영 때 디렉팅하던 모습과 완성된 <고당도>를 만났을 때의 느낌이 전부 다르다. 장례식이 주요 소재이다보니 나이대에 따라 받아들이는 감정이 다르고 또 시간이 흐른 후에 감독과 배우로서 재회해서 더 그런가보다.

봉태규 시나리오는 영화보다 훨씬 더 친절하고 설명이 잘돼 있었고 완성본은 많이 덜어냈다. 그러면 설명이 부족한 지점이 생길 수 있는데 기가 막히게 편집으로 흐름을 잘 잡아냈더라. 편집 단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해봤다던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감독의 역량이 대단하다. 결과적으로 시나리오보다 훨씬 재밌게 나왔다.

- 선영과 일회 모두 현실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그에 비해 둘의 과거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데 맡은 인물의 전사를 어떻게 설정해뒀나.

강말금 <조의(JOY)>를 찍을 때 권용재 감독이 A4 2장 분량의 미영에 관한 글을 전달해줬다. 워낙 이야기꾼이라 그 글만으로 미영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고, <고당도>에서 선영을 연기할 땐 영화 <배드 지니어스>를 레퍼런스로 이야기해줬다. 그 밖의 인물 배경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선영은 지방 병원의 간호사로 살아가며 그 병원에 아버지를 몇년간 모시고 있다. 어린 시절 공부를 잘했는데 집에서 충분히 서포트를 받지 못했다. 간호사 일도 원해서 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병원의 젊은 의사들에게 쌀쌀맞게 굴고, 열심히 공부해 의대에 합격한 조카 동호에게 애틋하게 대하는지도 모른다. 동생 일회와는 의절한 상태다. 편집된 장면 중 옥상에서 일회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장면이 있다. 살펴보면 그 메시지에 앞서 한참 전부터 소식이 끊겨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봉태규 일회에 관해선 시나리오에서 주로 유추하려 했다. 일회가 유년 시절 내 아버지와 유사했고, 내 삶에 오랫동안 붙어 있던 가난에도 익숙했기에 인물을 표현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남자는 결혼하면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는데, 경제적 능력을 상실했을 땐 전의도 완전히 상실하더라. 실제로 내 아버지가 그러했고, 어린 시절에 오랫동안 봐온 그의 무기력한 모습을 많이 참고했다. <펜트하우스> 등 극적인 작품에 출연하다보니 내가 삶에 밀착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낯설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메이크업도 하지 않고 촬영 시기에만 잠시 담배를 피웠다. 티가 잘 나진 않았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피곤해 보이는 외형을 만들고 싶었다.

- 제작발표회 때 “큰 아들이 있는 아버지 역이어서 좋았다”고 말했던데 그 이유는.

봉태규 내게서 아버지 캐릭터가 잘 연상되지 않나보더라. 배우로서 설득해나가야 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권용재 감독이 내게 장성한 아들을 둔 아버지 역을 맡겼다는 것이 재밌었다. 관객 반응이 궁금했는데 아직 어색하다는 말은 없어 다행이다.

-동호를 대하는 선영과 일회의 태도에 관해 묻고 싶다. 선영이 동호를 예뻐하는 건 어린 시절 집에서 지원을 받지 못한 자신을 투영해서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반대로 일회는 동호를 대하는 태도가 부모라기보다는 형이나 사촌 형의 것에 가까워 보였다.

강말금 실제로 동호 같은 조카가 있다면 무척 예뻐했을 것 같다. 쓰러져가는 집안에 연꽃 같은 아이가 나타난 게 아닌가. 일회도 빚더미에 앉았고 선영도 형편이 여유 있는 건 아니라, 선영은 동호가 의사가 된다면 가족의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의대에 반드시 입학시켜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기였던 셈이다.

봉태규 일회는 아마 성실한 가장은 아니었을 거다. 여기서 성실하지 않다는 말은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그간 자식과 부모 사이의 유대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을 거란 의미다. 말한 대로 일회와 동호는 거의 남에 가까운 관계다. 그런데 비겁하게도 자식이 진짜 걱정될 때 부성애가 튀어나오긴 하더라. 내가 큰 수술을 했을 때 아버지가 나를 무척 걱정하셨는데, 그런 아버지의 표정을 본 게 살면서 처음이었다. 그래도 우리 영화에선 모두가 동호를 위해 무엇이라도 하려 한다. 부자간의 감정적 교류가 끊긴 상태라 할지라도 일회는 결정적인 순간 동호를 위해 몸을 던진다. 그게 <고당도>가 지닌 차별점이라고 느꼈다.

- 영화에서 치러지는 세번의 장례식 중 몇 번째 장례식이 가장 기억에 남나.

강말금 가장 힘들었던 건 여럿이 합을 맞춰야 했던 세 번째 장례식인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은 첫 번째 장례식이다. 찍을 때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결과물을 보니 정말 좋았다. 양말복 선배가 연기한 고모 금순의 대사가 다소 상투적이다. “오빠랑 연도 끊은 내가 여길 왜 왔지?” 같은 대사가 시나리오상으론 평이하게 느껴졌는데, 현장에서 양말복 배우가 직접 발화하니 그 속에서 인생이 느껴졌다.

봉태규 나도 완성된 작품을 보고 첫 번째 장례식이 정말 중요했다는 걸 체감했다. 장례식이란 절차가 가벼이 치부하기 힘들다보니 관객들도 영화를 보며 웃어도 되나 싶을지 모른다. 그런데 첫 장례식부터 블랙코미디를 섞어 긴장감을 풀어주니 다들 마음 놓고 웃으면서 후반부의 사건도 따라갈 수 있게 된다. 사실 고모 한명 초대해놓고 가짜 장례식을 치르는 건데 그때 오가는 고모의 말과 일회, 선영의 표정이 멋있었다. 패기가 느껴진달까. 장례식을 여러 번 치러본 내 입장에선 리얼함마저 느껴졌다.

- 첫 장례식을 치른 후 부조금을 더 받기 위해 일회가 단체 문자로 부고 메시지를 돌린다. 이후 선영과 일회가 제대로 맞붙는다.

봉태규 그 신이 첫 촬영 신이었다.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라 첫 번째로 촬영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감정의 밀도가 잘 파악되지 않을 때라 걱정했는데 오히려 하고 나니 편해졌다. 잘해서라기보다 중요한 감정 신을 처음에 해버리니 뒤의 촬영이 크게 부담되지 않았다. 중요하게 생각한 건 일회의 감정 신이 너무 느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일회를 조금이라도 감싸주려는 기미가 보인다면 바로 느끼해지고 몰입이 깨질 거라 생각해 감독님에게도 일회가 더 못돼 보여도 된다고 말씀드렸다.

강말금 일회가 선영과 병원 로비에서 먼저 다투고, 건물 계단으로 옮겨 또 말다툼을 하지 않나. 그중 건물 계단 신만 먼저 촬영했는데 감정 잡기가 쉽지 않았다. 첫 촬영이라 아직 선영이라는 인물이 정확히 잡히기 전이었고 상황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때였다. 나중에 보니 선영의 말에 자신감도 없고 날도 서 있지 않았다. 선영은 절대 그런 인물이 아니다. 아쉬움이 남아서 감독님에게 후시녹음을 제안했고 2시간 동안 없던 대사도 넣으며 최선을 다했다.

- 장례식 도중 일회가 “아버지가 진짜 돌아가신 건 아닌데, 우리라도 절은 나중에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니 선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선영의 복잡한 심정을 대변하는 웃음이었다.

강말금 우울하고 끔찍한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촬영했다. 선영은 울고 싶은 마음을 계속 품고 있었을 테다. 와중에 일회가 그런 말을 하니 기가 막히지 않았겠나. 대본에도 ‘실소를 터트린다’고 적혀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 강말금 배우는 <조의(JOY)>의 미영을 선영으로서 다시금 연기했고, 봉태규 배우는 12년 만에 장편영화에 참여했다. 여러모로 <고당도>가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겠다.

강말금 현장의 주인이 되고 싶게 한 영화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찍을 때 느낀 건 주연배우는 불평불만 대신 자신의 책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당도>에선 그걸 제대로 행하고 싶었다. 그래야 성숙한 배우가 될 수 있을 텐데 그럴 기회가 많지 않았다. 다행히 <고당도>에선 그런 감각을 느낄 수 있었고,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할 계기가 된 작품이라 무척 소중하다.

봉태규 연기가 재밌다고 느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고당도>이후로 작품을 하나 더 찍었는데, <고당도>에서 좋은 기운을 받았기에 더 여유롭게 임할 수 있었다. 앞으로 꽤 오랫동안 연기를 계속 할 수 있는 땔감을 마련해준 영화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