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경과 인사를 나누며 순간 멈칫했다. 오늘 그를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지 미처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 <고백하지마>에서 연출과 출연을 겸한 그는 감독이자 배우였고, 이 작품의 배급사 ‘류네’의 대표이기도 했다. 호칭의 결정권을 떠넘기자 그 역시 난감한 듯 웃었다. 때때로 바뀌는 호칭에 맞춰 대화는 첫 장편을 완성하기까지의 여정에서부터 1인 배급사 대표의 우여곡절까지 넓어졌고 그 안에서 류현경의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첫 장편 연출작 <고백하지마>는 우연히 시작했다고 들었다. 배우 충길(김충길)이 동료 배우 현경(류현경)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오프닝이 제작 계기가 됐다고.
색소포니스트 김오키 감독의 영화 <하나, 둘, 셋 러브>현장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 작품에 함께 출연한 나와 충길, 스태프 모두 비가 와서 예정된 신을 찍지 못한 것도, 이대로 헤어지는 것도 너무 아쉬웠다. 뭐라도 남겨보자 싶어 일단 충길과 나란히 앉았다.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단순한 설정만 정한 터라 충길이 어떤 말로 입을 뗄지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어느새 고백하는 남자가 되어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거다. 거기에 맞춰 나는 당황한 표정과 멋쩍은 웃음으로 반응했고 이런 식의 즉흥연기와 상황 자체가 정말 즐거웠다. 이다음부터는 김명준 촬영감독과 장면을 구상해나갔고 그가 <고백하지마>의 촬영감독이 됐다.
- 초가을의 고백 1막이 끝나면 겨울 부산에서의 2막이 펼쳐진다. 3개월 뒤 따로 부산을 찾은 현경과 충길이 재회할 듯 말 듯한 2막은 비교적 시간 여유가 있어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 당시가 1막을 찍고 완성은 해야겠는데 답은 안 나오는 시기였다. 묘수를 찾기 위해 스태프 회의를 하던 중 <고백하지마>의 공동 연출과 각본을 맡은 김오키 감독이 “부산 공연을 하나 잡아볼 테니 거기서부터 이어가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좋은 아이디어라 생각해 부산행을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극 중 현경은 연기 특강 때문에, 충길은 새출발을 위해 부산을 찾는다는 설정을 만들고 타로 집과 옷 가게, 라이브 클럽으로 이어지는 동선도 꽤 세세하게 짰다. 그렇지만 대본이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이때도 확고해서 배우들과는 이런 흐름의 대사였으면 좋겠다는 대화만 나눴다. 돌이켜보니 실제 촬영에 들어갔을 때도 이 작업이 장편이 될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 최종적으로 69분의 장편이 되기까지 어떤 숙고의 과정을 거쳤나.
우선 찍은 건 거의 사용했고, 편집을 정말 오래 했다. 연출도 하는 박종민 편집감독에게 의지해서 끝도 없이 만졌다. 신기한 게 호흡이 너무 긴 것 같아 자르면 너무 짧고 이제 됐다 싶어 돌려보면 어딘가 부족했다. 클럽 신에서 아이폰으로 녹음한 사운드를 고르게 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여기에 조명 없이 찍은 부산 장면들을 색보정하고 영화에 쓸 충길의 옛 출연 작품을 고르는 과정까지, 다시 생각해도 어떻게 했나 싶다.
- 배급사는 첫 장편처럼 충동적으로 시작한 건가.
<고백하지마>가 초청된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넥스트 링크’라는 배급사 미팅을 열심히 다녔다. 어렵게 연결된 한 회사와 긍정적인 논의가 오가던 중 소식이 끊겼고 한참 뒤 “배급은 힘들고 대신 회사 유튜브 채널에서 공개하면 안되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영화는 극장에서 함께 보는 것이라고 믿어온 내게 그 말은 너무 큰 충격이었다. 정중히 거절했지만 그럼 이제 극장 개봉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막막했다. 여러 조언을 듣고도 좀처럼 에너지가 생기지 않던 시기가 길어질 때쯤 수입·배급사 엠엔엠인터내셔널 분들과 만났는데 내게 배급 일을 직접 해보라고 권하시는 거다. 처음엔 그렇게 어려운 일을 내가 어떻게 하냐고 손사래를 쳤는데 계속 별로 어렵지 않다고 하시니까. (웃음) 알려준 대로 집에서 해보니 정말로 쉬웠다. 절차대로 온라인으로 등록하고 인증받고, 동사무소 한번 간 게 다였다. 그 뒤로 친한 언니가 포스터를, 색보정을 맡아준 기사님이 예고편을 만들어줬다. 여기까지 오면 끝이라고 했는데, 웬걸. 어마어마한 업무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 무엇이었나.
개봉관을 잡기 위해 전국 독립예술영화관과 멀티플렉스 아트하우스관 편성팀에 메일을 보내야 했다. ‘안녕하세요, 류현경입니다. 제가 만든 영화를 귀 극장에서 상영하고 싶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내용을 몇번이고 썼다. 매니지먼트에 프로필 돌리는 신인배우의 간절함을 담아서 말이다. DCP(극장 상영용 포맷)를 직접 만들면서도 과연 몇개 관에서 볼 수 있을까 걱정이 컸는데 최종적으로 10개 관 정도가 잡혔다. 긍정적인 답변을 받을 때마다 정말 감사했고, 상영이 확정된 극장에 포스터를 들고 갈 때면 그저 신기하고 기뻤다.
- 12월17일 개봉일도 직접 정했나.
그렇다. 처음엔 한국영화 개봉작이 비교적 적은 1월을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자문한 분들 모두가 <고백하지마>는 연말 영화라면서 12월을 추천했다. 치열한 시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연말 분위기를 가진 영화인 건 분명하니 12월17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 언론·배급시사회를 준비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겠다.
영화를 세상에 소개하는 자리라고 해서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이게 또 짧은 배급 인생의 고비였다. (웃음) 가장 빠르게 신청 메일을 보낸 사람이 원하는 시간대의 상영관을 차지할 수 있는 일종의 티케팅 방식이라 조마조마했다. 몇번의 미끄러짐과 읍소 끝에 결국 원하던 오후 2시,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시사회를 열 수 있었다.
- 배급사 이름 ‘류네’는 어떻게 탄생했나. 사무실이 따로 있는지도 궁금하다.
대학 시절부터 영화사를 차리면 류네라고 정해두고 있었다. 동네 이름 같고 친근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사무실은 없다! 집에서 일하다 보니 집이 각종 자료로 발 디딜 틈이 없다.
- 배우 류현경과 감독 류현경, 배급사 류네의 다음 스텝을 들려준다면.
출연한 스릴러영화 <사피엔스>가 내년 개봉예정이다. 꽤 도전적인 작품이라 기대가 크다. 내년 1월까지 드라마 촬영이 이어지지만 <고백하 지마>릴레이 GV 일정이 빽빽해 연말연초가 정신없이 지나갈 것 같다. 새로운 작품은 이미 완성해둔 시나리오가 있어 내년 촬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번에도 내가 출연하고, 남녀의 세월을 담은 이야기다. 류네의 미래는 <고백하지마>에 달려 있다. 많은 관객에게 사랑받길 바라며 일단 류네 로고가 박힌 대표 명함부터 만들어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