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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파격은 다시 새롭게 정의되는가, 유선아 평론가의 <아바타: 불과 재>

한때 가장 급진적이었던 기술적 선택에서 <아바타: 불과 재>(이하 <불과 재>)는 한 걸음 물러난다. 어떤 장면에서도 생성형 AI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강조하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말이 격세지감 속 낯선 선언처럼 들리고 만 이유는 최첨단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낸 이미지의 결실이었던 2009년의 <아바타>가 2025년의 <불과 재>에 이르러 또 다른 최첨단 기술의 생성형 AI 이미지와 대적하려는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불가사의한 지형의 판도라 행성은 실체 없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영화 기술의 진화와 실재하는 이미지 퇴행의 시대에 그 자체로 상징적 장소가 되어버렸다.

월드와이드웹에 반(反)하여

<아바타: 불과 재>

돌이켜보면 디지털영화 시대에 접어들어 등장한 <아바타>는 디지털네트워크의 미래가 아닌 디지털 이전의 직접 연결성으로 돌아가기를 상상했다. 문자 그대로 드넓게 펼쳐진 망(網)을 상상케 하는 월드와이드웹(WWW)은 다대다 동시접속이 가능한 디지털네트워크다. 영혼의 나무는 나비족의 기억과 의식을 총망라한 네트워크의 집합체이지만 그 개념의 등장에 앞서 먼저 도착하는 것은 나비족의 신체 일부인 ‘쿠루’와의 연결로 가능해지는 일대일의 접속과 교감이다. 신체 외부로 돌출된 신경계 쿠루는 상대의 것과 직접 연결되는 순간 의식과 기억의 교환이 가능해진다. 이는 또 판도라 행성의 보이지 않는 우주 질서를 관장하는 여신 ‘에이와’와 죽은 나비족의 기억의 아카이브로 접속할 수 있다는 설정으로 이어진다. <아바타>는 몸과 몸이 접촉하여 연결을 맺으면 집단의식과 영혼의 기억에마저 닿을 수 있다는 신화적 믿음으로 회귀했다. 원시는 이 때문에 호출된다.

<불과 재>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납득하기 쉽지 않은 단 한 가지는 미국 할리우드 산업시스템 속 상업영화의 최전선에 있는 이 영화가 ‘나는 기린이나 악어와 같이 살아 있는 모든 것과 영혼의 형제’라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꿈꾸는 방랑자 같은 메시지를 전쟁의 스펙터클만큼이나 진지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샤머니즘에 기반한 직관으로 전진하는 서사나 인간 중심의 서사에서 인류라는 프로타고니스트를 전멸시켜야 하는 적으로 상정한 점을 고려하면 제작은 쉽게 실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학살되지 않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 전쟁의 아이러니, 신탁에 휘둘리는 영웅이 아니라 전사의 운명에 눈을 떠 각자의 길을 선택한다는 인물의 이야기는 더 이상 미국식 침략과 저항이라는 구식 서사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율배반에 가까울 정도로 할리우드 자본 논리와 충돌하는 <아바타> 시리즈의 신화와 원시적 서사의 과감함은 <불과 재>에 이르러 AI와 대적해 기꺼이 퇴보하려는 컴퓨터그래픽의 기술적 포지셔닝과 겹쳐 보인다. 영화 기술이 발전해온 양상을 선형적으로 읽는다면 생성형 AI는 현재 기술 단계의 다음으로 예정된 순서일 테지만 <불과 재>를 기점으로 삼으려는 지점은 여전히 과거의 직접 연결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푸른 얼굴의 나비족은 그 역할을 맡은 배우와 일대일의 연결을 맺는다. 적어도 <아바타> 시리즈 안에서 시간과 함께 나이 들어갈 샘 워딩턴의 얼굴에서 세월을 목격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모션 캡처 기기의 연결선은 배우의 신체와 테크놀로지를 최소한으로 연결 짓는 외부 신경계처럼 이어져 있다. 닮았지만 동일한 얼굴이라 할 수 없는 나비족의 얼굴과 배우의 얼굴을 보이지 않게 잇는 연결 사이에 메워질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사실만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육신의 벽을 꿰뚫고 그 안에 자리한 정(精)과 영(靈)을 마주 본다는 뜻의 나비족 인사 “당신을 봅니다”는 이제 스크린의 푸른 얼굴 너머에 있었을 배우의 진짜 얼굴을 같이 떠올려 달라는 말처럼 들린다.

세계와 접촉하는 마지막 피부의 리얼리즘

<아바타: 불과 재>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아름다운 판도라 행성과 그들만의 정신적 우주는 파괴의 스펙터클과 공존해야 하는 거대 자본 영화의 입지적 환경이기도 하다. 전쟁만을 다룰 수는 있어도 순수와 영혼의 세계만을 다뤄서는 자본 회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파괴되기 위하여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행성의 숭고한 생명체와는 달리 <아바타> 시리즈에서 인류는 서사적으로 나비족의 적대자이며 기술적으로 영화에 리얼리티라는 중력을 더한다. 애니메이션의 하위 장르로 분류되지 않기 위해 <아바타> 시리즈는 모션 캡처를 고수하고 인류를 내몰지 못할 적으로 두어 그들과 끝까지 싸우게 할 것이다. 자연생태와 영적 네트워크를 수호하는 나비족은 그런 인류에 맞서 우세를 점한 현대 영화 기술의 피부이다. 지금은 어쩌면 리얼리즘이 먼지 쌓인 경전의 자리에 남아 신격화되는 시기가 언제일지 상상하는 것이 오히려 빠를지 모를 시대의 기로에 있는 게 아닐까.

이상일 감독의 <국보>속 한 장면은 이 기로의 형상화를 보여준다. 키쿠오(요시자와 료)는 각고의 노력 끝에 혈통으로 세워진 가부키의 견고한 전통에 입지를 세운다. 야쿠자의 자식이 혈통 대신 이름을 물려받고 가부키극의 대배우가 되어 마침내 일본의 국보가 된다는 파격적 서사보다 더욱 급진적인 것은 가부키 명문가의 정통한 후계자였던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가 한쪽 다리를 잃고 나서 무대에 서는 장면이다.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진 본연의 신체를 얼마나 잘 훈련하여 통제할 수 있느냐가 관건인 무대 위 공연자는 보통의 인식에서라면 침해당한 적 없는 완전한 신체를 전제로 한다. 그러니 기모노 자락 아래 숨겨진 의족으로 무대에 선 배우-무용수가 보인 파격은 전통적 이미지의 보수성에 격렬하게 도전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전통적 이미지를 위협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면 그런 슌스케에게 잃어버린 왼발 대신 주어진 금속의 다리란 카메라 앞의 존재론적 이미지에 끼어들어 그것을 위협하는 테크놀로지 기반의 이미지를 말하려는 과격한 은유와도 같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 놓인 격변의 진화는 <불과 재>에서 컴퓨터그래픽이 구현한 세계에 끼어든 리얼리즘의 현신이라는 중간 지점에 도달한다. 지각적 리얼리즘의 생태계에서 간신히 생존한 스파이더(잭 챔피언)는 벼랑 끝에 선 리얼리즘의 마지막 보루다. 나비족의 몸으로 태어나는 동일 경로는 <아바타> 시리즈에서 반복된 적 없다. 이제 와서 보니 <아바타>에서 인간의 몸을 버린 제이크 설리(샘 워딩턴)의 환생은 푸른 얼굴의 디지털 세계로 편입된 리얼리즘에 다름 아니다. 의식을 다른 신체로 옮기거나 기억을 다운로드받은 아바타로 다시 태어나지 않은 스파이더는 그를 연기하는 배우의 몸 그대로 리얼리즘의 현신으로써 에이와의 네트워크로 들어선다. 스파이더가 발을 딛고 선 그곳은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낸 산 자와 죽은 자가 서로를 마주하여 연결되는 중중무진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