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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의 아주 사소한 사회학] 천생연분? 현대사회에는 존재할 수 없다

경쾌한 음악을 듣자. 오래전부터 사용한 카카오톡 프로필의 문구다. 우울하고 울적할 때마다 빨리 회복하려는 단순한 의지의 표현이다. 물론, 마음의 우울함이 H.O.T.의 <캔디>나 노이즈의 <상상속의 너>와 같은 경쾌한 음악 몇번 듣는다고 해결되는 건 아닐 거다. 하지만 일단 듣는다. 또한 기분의 울적함이 엔니오 모리코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S.T <Deborah’s Theme>처럼 슬픈 음률을 듣는다고 해서 더 나빠지는 것도 아니다(때론, 이렇게 극복한다). 그렇지만 혹시나 해서, 내 심신이 바닥으로 치닫는 신호가 올 땐 여지없이 언제 들어도 기분 좋아지는 음악을 빨리 찾는다.

따라 불러야만 효과가 배가 되기에 가사를 기억하는 노래 몇개가 리스트의 전부다. 아이들 등교를 준비하면서 갑자기 밀려오는 부끄러운 짜증을 마주할 땐 이한철의 <슈퍼스타>를 틀어놓는다. 괜찮아, 잘될 거라면서. 글쓰기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며 스스로의 부족함이 원망스러울 때는 지누션의 <말해줘>를 개사해서 흥얼거린다. “나에게 말해줘, 사실을 말해줘. 정말 글 잘 쓴다고 말해줘.”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는 가사를 거의 다 안다. 그래서 설거지할 때마다, 서태지 아니었으면 내가 이 지루한 노동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할 정도다. 그럼 <난 알아요>나 <컴백홈>을 인생에서 가장 많이 들은 것 같지만 최근 몇년 사이 새로운 노래가 떠올랐다. 솔리드의 <천생연분>이다. 젊은 시절에 노래방에서 신나게 부르다가 십수년을 까먹고 있었는데,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재활운동을 하면서 다시 소환했다. 재활은 빨리 회복하려는 조바심에 더 큰 통증과 마주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때마다 정신이 완전히 무너지곤 했는데, 이 경쾌한 노래를 따라 부르며 버티고 버텼다. 템포도 아주 좋다. 전주가 나오는 50초간 워밍업을 한 다음 세 번째 랩이 끝날 때까지 2분 약간 넘게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그리고 30초 정도 휴식을 취하고 다른 자세를 취한다.

무릎을 다친 게 2019년이니, 6년 넘게 나는 이 노래를 짧게는 20분 길게는 50분 정도 매일 듣는다. 평균적으로 하루 열번이라면, 대강 계산해도 일만번은 훌쩍 넘겼다는 거다. 그 정도 되면 랩과 노래를 솔리드 삼인조 수준처럼 할 것 같지만 음치에게 그런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촉이 왔다. 한 7천번쯤 들었으려나, 그때 갑자기 이 노래에 담긴 엄청난 사회문화적 의미가 팍 떠올랐다.

이 노래, 가사가 중복되지 않는다. 소개팅 제안을 받고 처음엔 거절했지만 그러지 못해서 너에게 미안했고, 막상 만나러 갈 때는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할 정도로 기분이 참 좋았는데, 그 와중에 소개팅 상대가 예쁘고 키도 컸으면 하는 희망 사항까지 생겼는데, 막상 만나보니 네가 앞에 있어서 당황했지만, 서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린 결국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천생연분이었음을 확인했으니 미안해하지 말자, 예쁜 추억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자. 이렇게 쭉 이어진 다음 ‘난 너를 사랑해’라면서 끝나는데 이 구절만 한번 반복될 뿐이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사는 한마디 중복 없이 거침없이 질주한다. 애인이 친구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경위를 속사포처럼 내뱉는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도, 이별의 복잡한 애처로움을 삶의 다양한 결로 드러낸 리쌍의 <발레리노>도 후렴구는 동일하다. 내가 모든 음악을 알 수 없겠지만,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제외하고 <천생연분>처럼 성실하게 글을 짜낸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다른 노래는 한심하고, 특히나 요즈음의 아이돌 그룹들이 중독성만 노리고 후크송 성격의 노래를 부르기에 급급하다는 걸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좋아서 듣는 음악을 잔인하게 비판할 이유는 없다. 다만 긴 호흡으로 말하고, 듣고, 읽는 게 너무 낯설어진 ‘쇼츠’ 현대사회가 아쉬워서다. 영상은 짧아야 하고, 긴 글은 요약해야 하고, 간결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말이 많다고 욕부터 먹는 시대가 야속해서다. 3쪽이 넘는 글을 3줄로 줄여달라고 당당하게 인공지능에 묻는 사람들의 간편함이 무서워서다.

무섭다는 표현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천생연분>을 수천번 들었을 때 머리를 파고드는 하나의 의문은 이거였다. 만약 지금이라면? 몰래 소개팅을 하러 갔는데, 앞에 애인이 앉아 있었다? 추억이라 생각하자며 서로 웃고 끝날까?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잔인한 복수가 이어질 거다. 이 문제로 변호사가 고용될 것이고 집안끼리도 모든 물리력을 동원해 진실공방을 하기 바쁠 것이다. 서로의 카톡이 공개되고 심하면 철저한 사생활로 영원히 봉인되어 있어야 할 영상까지 세상을 떠돌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상대를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방법을 찾지 않겠는가. ‘애인이 몰래 소개팅 갔다는 이유로 살해했다’는 기사가 등장해도 별로 낯설지 않은 게 지금이니까 말이다. 그런 기사에 ‘나였어도 죽였다’라는 댓글이 달리는 게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긴 호흡으로 말할 수 없는 사회에서, 긴 말이 없으니 들을 필요도 없는 사회에서 인간의 감정은 온전히 전달되기가 불가능하다. 그 행위를 했는가, 안 했는가만 중요할 뿐이다.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봐~”라는 말이 진정으로 오가지 않는다. 그저 “잘못했는지만 말하라고!”라는 윽박지름이 전부다. 한순간에 돌변해 연인을 죽도로 때리는 누군가만을 설명하는 논리가 아니다. 학교폭력은 물론이고, 층간소음이나 주차 문제로 다투다가 화가 솟구쳐 살인을 저지르는 해괴한 사건에서도 같은 결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시시비비를 재판을 통해 가리려는 괴상한 사회풍토가 지나치게 팽창한 것도 이 연장선이다.

우리는, 대화를 길게 하지 못한다. 언어가 겹쳐야지만 드러나고 해결될 무수한 상황이 너무나 빨리 폭력과 협박의 단계로 접어든다. 그런 곳에서 천생연분이 어디 있겠는가. 갈등 속에서도 서로 선을 넘지 않으며 대화를 통해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것, 그게 천생연분 아니겠는가. 지금은? 하나만 수틀리면 바로 사생결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