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개진 이미지, 노이즈처럼 들리는 사운드, 설명 없이 교차하는 비선형적 편집으로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마샤 실린슈키 감독의 <사운드 오브 폴링>의 서사는 단순하다. 다른 시대의 이야기들이 농가라는 공간에서 상호 연결된다. 집은 고정되어 있지만 그곳의 여성들은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디아스포라다. 최근 디지털카메라의 이미지는 너무나 선명해서 어떤 것도 기록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 영화는 디지털로 촬영되었지만, 필름의 물리적 특성을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여기서 필름 룩은 소프트하고 아날로그 느낌의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아니다. 디지털의 ‘날카로움’과 아날로그의 ‘흐릿한 질감’을 동시에 활용해 기억의 표면을 시각화하는 이미지다. 선명한 이미지의 영화는 대문자만을 드러내면서 차이들과 소수들을 다양체로 보지 못하게 하지만, <사운드 오브 폴링>은 다르다.
원제 ‘In die Sonne schauen’은 ‘태양을 응시하다’라는 뜻이다. 태양을 응시하는 것은 무언가를 피하거나 숨길 수 없는 위치에 서는 일이다. 태양을 바라볼 때 강렬한 빛으로 눈앞에 잔상이 남듯, 세대를 걸쳐 등장하는 여성들의 과거 상처와 고통이 현재의 표면 위에 잔상을 남긴다. 이 영화에서 빛은 역설적이다. 여성들은 빛을 응시하지 못한다. 스크린 위에 가득한 눈부신 빛은 우리의 눈으로 현실에서는 보지 못하는 빛이다. 그녀들에게 닿는 빛은 하늘 위에서 내려온 빛이 아니라 땅 아래에서 올라온 빛들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의 보이지 않는 힘들이 중력처럼 그녀들을 끌어당겨 깊은 곳으로 떨어뜨린다. 그녀들은 역사 속 중요한 인물들이 아닌 너무 평범하고 보통의 인간들이기에 세상은 그녀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하지 않는다. 폭력과 억압 속에 사라져간 여성들이 있음을, 그녀들의 아우성이 심연으로부터 올라와 바닥 위에서 파닥거린다. 알마, 렌카, 앙겔리카에게 어른거리는 빛은 잊힌 그녀들의 목소리가 빛으로 나타난 것이다. 바닥에 흔들거리는 빛이 그 목소리의 현현이다. 네 시기 모두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고 있는 장면들이 많다. 어둠 속에 묻혀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밝히려는 듯. 영화는 기억을 소환하며 잊힌 그녀들의 목소리를 빛으로 발견한다. 그 빛들은 때로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달라 말을 건넨다.
<사운드 오브 폴링>의 이미지적 특징 중 하나는 핀홀렌즈의 사용이다. 핀홀렌즈는 바늘구멍 같은 작은 구멍을 통해 공기를 렌즈로 만들어 사용하며 공기의 질감을 그대로 드러낸다. 핀홀렌즈의 공기로 보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공기 중 아주 작은 입자들이 드러난다. 이 영화는 낙하하는 노이즈 사운드, 바닥에 흔들거리는 빛과 함께 핀홀렌즈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지 않는 존재들의 목소리를 드러낸다. 일반적인 영화는 한 신 안에서 동일한 렌즈를 사용하지만, 이 영화는 한 신 안에서도 핀홀렌즈 등 다양한 렌즈들을 조합한다. 렌즈의 특징은 현실과 환상을 잇는 연결고리, 때로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고리로도 사용된다. 넬리 가족이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수영하는 장면, 헛간에서 숨바꼭질 중에 알마가 바라보는 응시의 시선에서 신 중간에 화면의 질감이 바뀐다. 핀홀렌즈로 바뀌고 눈부신 빛이 카메라 안으로 가득 들어온다. 핀홀렌즈의 플레어를 매개로 리아의 내레이션이 이어지며 과거의 알마에게서 현재의 농장으로 이어진다. 넬리의 엄마를 따라가는 핀홀렌즈의 이미지가 이어지다 동일한 상황과 동일한 숏 사이즈에서 원래의 렌즈로 돌아온다. 과거와 현재, 환각과 현실처럼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 핀홀렌즈의 이미지 안에서 겹친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각 세대의 여인들은 우리에게 그 빛을 보라고 말한다. 핀홀렌즈의 빛은 여성들에게 닿지 못했던 빛을 ‘지금-여기’의 현실로 호출한다.
이 영화는 심도의 활용도 뛰어나다. 필름 그레인으로 화면이 선명하지 않아 심도가 얕아 보이지만, 심도는 대개 고정되지 않고 사운드처럼 움직이고 있다. 얕거나 깊은 하나의 상으로만 대상이나 공간을 들여다보게 하지 않는다. 인물들의 움직임을 따라 심도가 달라지며 공간이 드러난다. 핀홀렌즈를 비롯한 다양한 렌즈의 조합으로 동일한 공간과 상황에서도 다른 심도를 보여준다. 여기서 심도는 마음의 깊이이며 고통의 깊이다. 그 안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얕은 심도가 배경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도록, 시각적 정보들을 지우며 사운드에 집중하도록 만들고, 때로는 깊은 심도로 전체를 다 들여다보게 만든다. 심도를 통해 사소한 것까지 귀 기울이게 한다.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적 상황을 무표정한 얼굴 위에 심도의 변화로 드러낸다.
2차 세계대전을 살아가던 에리카는 여성들과 함께 강변의 돌을 모아 등에 멘 뒤 강으로 걸어 들어간다. 돌은 다시는 떠오르지 않겠다는 단호한 절망인 동시에,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역사의 무게다. 전쟁의 막대한 피해자들은 가해국 안에서도 여성, 노인, 어린이와 같은 약자와 소수자들이었다. 승전국의 점령은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권력의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여성의 신체는 전쟁 중에도, 전후에도 폭력과 위협의 대상이 되었다. 전후 독일 사회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된 비극이자 침묵의 역사이다. 이 트라우마는 세대를 거쳐 후손들에게 ‘소리 없는 고통’으로 전해졌다. 에리카와 함께 돌을 메고 강에 들어간 앙겔리카의 엄마는 뱀장어 때문에 강에 있지 못하고 나왔다. 에리카와 함께 강물 속에 있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성들의 말하지 못한 고통은 공기 중의 습기처럼 집 안 곳곳에 스며들어, 현재의 렌카에게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슬픔으로 전달된다.
영화는 이를 어딘가로 가라앉는 듯한 노이즈 사운드와 핀홀렌즈의 거친 질감과 플레어 등으로 시각화하여, 과거의 고통이 해결되지 않은 채 현재에도 계속해서 소리를 내며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디론가 떨어지고 있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 사운드가 무엇인지,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는 사건보다 감각, 결과보다는 일어날 것 같은 징후에 초점을 둔다. <사운드 오브 폴링>에서 떨어짐은 저항할 수 없이 아래로 끌려가는 감각이다. 대개 시각이 아닌 청각으로 감각하게 하는데, 역설적으로 시각의 모호함이 소리를 더욱 잘 감각하게 만든다. 낙하는 이미지의 사건으로 직접 제시되진 않는다. 대신 소리, 잔향, 소리의 여백으로 표면에 흔적만 남긴다. 표면에서 발생하는 감각의 잔여물로, 사건은 이미 일어났고 우리는 그 여파만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시작, 에리카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헛간 앞에 늦게 도착하자마자 뺨을 맞는다. 이때 주변의 사운드는 완전히 사라지고 에리카의 주관적 사운드만이 들린다. 이어지는 물속 장면에서는 어딘가로 가라앉는 노이즈 사운드가 들린다. 알마의 집 안, 하녀에게 쫓기는 언니들 틈에서 카메라가 알마를 포착한 관적 사운드로 바뀐다. 위령의 날에는 어디선가 불쑥 노이즈 사운드가 들어온다. 알마가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다.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것처럼, 일상의 미시적인 소리를 영화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역사 속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유도한다.
넬리는 현재에서 처음부터 과거의 소리를 듣는, 빛들을 감각하는 인물이다. 영화의 마지막, 넬리가 헛간 2층에 올라가 있다. 빛이 헛간 바닥 군데군데 닿는데, 넬리가 서 있는 공간에도 빛이 닿고 흔들리는 빛이 헛간 바닥에 어른거린다. 그 빛을 한참 바라보던 넬리는 그곳을 향해 뛰어내린다. 넬리의 마지막 행동은 ‘자살의 재현’이 아니다. 영화 전체가 축적해온 감각과 역사, 시선의 귀결이다. 넬리는 그 안에서 더이상 머무를 수 없음을 감각적으로 깨닫는다. 넬리가 향한 것은 탈출구나 문이 아니라 헛간 바닥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다. 이 빛은 이미 영화가 반복해 보여주었던, 땅의 틈에서 스며 나오던 그 빛이다. 지금여기, 역사와 공포, 누적된 폭력의 중력에 의해 몸이 더이상 버티지 못하는 순간. 넬리는 살아 있는 상태로 더이상 존재할 자리를 상실했다. 에리카는 어두운 강물(심연)로 떨어졌지만, 넬리는 빛을 향해 떨어진다. 이는 100년 동안 이 집을 짓눌러온 그 ‘추락의 소리’를, 넬리가 자기 몸으로 다시 쓰며 끝맺는 순간이다.
헛간 바닥의 빛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넬리가 그 빛으로 뛰어내리는 순간, 시공간은 겹쳐지며 넬리는 혼자가 아닌 ‘그 여성들의 고통을 껴안은 채 떨어지는 존재’가 된다. 물리적으로는 추락이지만, 심리적으로는 과거의 유령들을 해방하고 스스로도 그 집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넬리는 핀홀렌즈의 빛까지도 마주하는 유일한 존재다.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그 빛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다. 빛을 향해 뛰어내리는 것은 과거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수용의 의지다. 이 장면에서 영화의 소리는 극대화된다. 이전까지 불길하고 날카로운 소음으로 들렸던 ‘추락하는 소리’는 넬리가 빛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멈추고, 블랙 무지 화면 속엔 정적만이 남는다. 침묵 속에 갇혀 있던 과거 여성들의 비명이 넬리의 행위를 통해 마침내 안식을 찾았음을 시각과 청각으로 동시에 보여준다.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 리아와 알마가 거센 바람을 피하지 않고 맞서며 비상한다.
이 영화에서는 죽은 소녀들의 사진이 등장하거나 리아가 죽었을 때도 사진을 찍는다. 조르주 아감벤은 사진에 찍힌 피사체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사진에 찍힌 사람이 오늘날 완전히 잊혔더라도, 그 혹은 그녀의 이름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져버렸더라도 그 사람과 그 얼굴은 자신의 이름을 요구한다. 사진 속 사람들은 바라본다. 그 시선은 자신들이 잊힌 존재가 아님을 요구한다. 영화 속 여성들의 시선도 이와 같다. 때로는 응시로 관객들에게 바라보라고 요구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세대를 걸친 여성들이 바라보는 시선이다. 다른 세대의 여성들을 바라보며, 동시대, 같은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연대의 눈빛이다. 같은 여성이 서로를 바라볼 때 시선과 남성이 여성을 바라볼 때 시선의 차이를 직접적인 응시가 아니라 이미지의 배열로 드러낸다. 주인공들이 카메라를 응시한 뒤에는 어김없이 다음 세대의 여성이 등장한다. 영화 속 시선은 바닥에서 그녀들에게 어른거리는 빛들을 통해, 여성의 역사가 뿌리내린 땅을 응시하게 만들어놓고 있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도 그 시선은 닿는다. 그 끝에 영화는 소리 없이 묻는다. 알마, 에리카, 앙겔리카, 렌카, 넬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보지 않았는가?
<사운드 오브 폴링>은 사운드로, 빛으로, 시선으로, 사진으로 우리에게 응시하라고 말한다. 넬리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거부하고, 땅의 틈, 바닥, 역사 속에 묻힌 시선을 향해 몸을 던진다. 이 장면은 비극이면서도, 영화가 끝내 도달한 윤리적 시점이다. 추락이 아니라 비상이다. 소리와 빛이라는 물질적 요소가 역사에서 지워진 서사를 현재로 소환한다. 영화는 빛으로, 질감으로, 핀홀렌즈와 같은 렌즈의 물리적 특성으로, 심도로, 사운드로 잊히지 않도록 기록하고 표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