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적 미래는 이미 당도해 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촬영을 위해 방문한 인도네시아 자바의 ‘세마랑’. 해수면 상승으로 육지가 바다에 잠식되어가는 지역이었다. 미디어에서 호들갑을 떠는 건 줄로만 알았는데, 해수면 상승이 초래한 종말의 풍경은 이미 우리 가까이에 와 있었다. 빠듯한 일정 속에 다큐멘터리 촬영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나는 다시 짐을 꾸렸다. 먼 미래에 도착할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지금’의 풍경을 톺아보기 위해서였다. 나의 무지함이나 무신경함을 사과라도 하고 싶었다. 바닷물이 밀고 들어와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기후 난민들에게, 귀를 닫은 우리에게 여태 경고를 보내온 활동가들과 과학자들에게, 그리고 지구에게. 영화를 촬영하는 무거운 카메라를 내려놓고 작은 사진기를 챙겼다. 더운 나라이니 옷가방도 가벼웠다. 몸이 가벼우니 세마랑의 묵시록적 풍경은 더욱 무겁게 다가올 터였다.
여행 인프라가 갖춰진 곳이 아니었으니 무턱대고 다시 찾아가 몸으로 부딪치는 수밖에 없었다. 촬영을 도와주었던 현지인 코디네이터한테서 주소를 하나 받아두었는데, 그거면 충분했다. 한번 다녀가본 곳 아니던가. 내가 알아볼 수 없는 체계의 주소를 공유택시 기사에게 보여주고 한 시간 넘게 달려 어딘가에 내렸다. 정확한 목적지는 아니었다. 낙후된 지역이라 주소가 정확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세마랑의 드넓은 지역이 침수되고 있었으니 거기도 마을이 물에 잠겨 있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 천천히 마을을 둘러보았다. 1층의 허리까지 바다에 잠긴 집이 수두룩했다. 사람들은 물이 차오른 만큼 생활공간을 조금씩 높여가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증축이라 할 수도 없고 수리라 할 수도 없는 처절한 생존 본능이었다. 수상가옥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선 집이며 가재도구가 제대로 유지될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살아갈까. 그러다 한계에 이르면 집을 버리고 근처에 다시 집을 지었다. 물론 누군가는 마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했겠지만 대부분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간다고 한다. 온 마을이 천천히 수몰되어가는 위협적인 상황인데도 온갖 추억이 새겨진 공동체를 떠나는 일은 이토록 어렵다. 농사 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경작지가 없어졌으니 주민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서툰 솜씨로 그물을 놓거나 쪽배를 몰아 어로 활동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봐야 손바닥보다 작은 물고기 몇 마리 잡는 게 다였으니 취미로 하는 낚시보다 못한 어획량이었다. 평생 농부였던 사람이 갑자기 물고기를 잡아봐야 얼마나 잡겠는가. 아낙들은 땅과 식물이 그리웠던지 마당 한쪽에 화분을 두고 약간의 채소나 꽃나무를 키웠다. 땅에 바닷물이 스며들어 맹그로브가 아닌 나무들은 죄다 말라죽어가고 있었으니 생명이 자라는 흙은 귀한 대접을 받았다. 차가 다녔을 길로 작은 배가 다녀 얼핏 보면 운하의 수로 같기도 했으나 베네치아 같은 운치는 없었다. 땅에 있어야 할 것들이 물에 걸쳐 있는 마을은 스산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신작로를 따라 끝까지 걸으니 길이 채 끝나기 전에 드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태평양과 이어진. 바다 위로 솟은 전봇대 몇개가 더없이 기괴하고 서러워 보였다. 인간의 비극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는 묵묵히 파도를 철썩였다.
적도에 면한 지역답게 오후가 되자 갑자기 세찬 비가 쏟아졌다. 우산으로 막을 수 있는 비가 아니었다. 마침 길가에 작은 모스크가 보여 몸을 피했다. 무슬림의 전통 복장을 한 누군가가 마실 물을 가져다주며 맞아주었다. 사소한 호의라도 크게 고마웠다. 이교도의 신분이라 쭈뼛거리며 들어섰는데 당장 마음이 편해졌으니. 아잔 소리를 들으며 구석에 기대어 있던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이른 아침부터 걸었으니 피곤할 만도 했지. 마을이 너무나도 조용해 세찬 빗소리가 세상을 가득 메웠다. 오랜만에 듣는 빗소리가 좋았다. 마을에 닥친 비극과 무관하게 당장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마을에선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은 너무 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지만. 얄궂은 역설이었다. 죽어가는 땅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생의 활기가 돌 까닭도 없었다. 마을에 들어온 바닷물이 수십년 내에 다시 빠져나가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 머지않아 돌아갈 고향이 없어질 주민들은 느리지만 선명하게 진행되는 재앙 앞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전 지구적 재앙을 가장 먼저 맞닥뜨린 사람들. 그럼에도 세마랑 사람들은 천성인가 싶게 환한 표정으로 무슬림식의 인사를 주고받았고 멀리서 온 여행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 맑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더 아렸다.
나는 무기력해져서 숙소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나를 데려다준 공유택시 기사에게 재차 픽업을 요청했다. 워낙 외진 곳이라 미리 부탁하긴 했지만 정말 와줄까 싶었다. 한참을 기다려 비가 그칠 즈음 그가 도착했다. 나도 배가 고팠고 약속을 지켜준 것이 고마워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기사는 길가의 식당에 차를 댔다. 합판을 대충 덧대어 만든 허름한 식당이었다. 근방에 제대로 된 식당 하나 없는 시골이었으니 달리 선택지도 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인도미’를 시켰다. 계란을 하나 넣어 달라는 호사도 잊지 않았고. 다 찌그러진 양철 그릇에 담겨 나온 따뜻한 라면 한 그릇. 반가웠다. 인도네시아의 인스턴트 라면 브랜드인 인도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라면 중 하나인데, 가격이 워낙 저렴해 세계의 서민들이 즐겨 먹는다. 청년 시절에 배낭여행을 하며 경비를 줄이려고 매일같이 먹은 라면이었다. 일주일에 10개는 족히 먹었던 것 같다. 내 딴에는 인도미가 반가워서 가난하게 여행하던 시절 얘기를 들려줬는데, 기사가 대뜸 물었다. 몇 나라나 여행해봤냐고. 단박에 답하기 무안해서 어물쩍 넘겼는데도 기사는 짧은 영어로 연신 ‘러키, 러키’를 외쳤다. 촬영팀 막내로 일하며 최저 시급에도 못 미치는 박봉을 그러모아 여행을 다닐 때부터 저개발국의 청년들에게서 종종 들었던 말이다. 그동안 세계의 불균형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안다. 기사는 쌀밥이 나오는 백반 정식 같은 것을 먹었는데, 둘이 합쳐 2천원 정도가 나왔다. 지나치게 저렴해서 조금 슬퍼졌다. 그동안 인민의 삶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만 같아서였다. 좋아진 것도 없는데 설상가상으로 이따위 재난이나 당해야 한다니. 식당을 나서자 멀리서 아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기분 탓인지 그 소리가 유난히 슬프게 들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