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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아임 낫 매드 앳 유

<파고>

미니애폴리스. 코언 형제의 <파고>의 도시. 어리석음의 눈덩이가 설원 위를 굴러가는 동안 아무래도 가장 멋졌던 건 임신한 경찰관 마지(프랜시스 맥도먼드)였다. 2026년, 다시 미니애폴리스. 이제는 러네이 니콜 굿의 도시. 37살 여성, 시인이자 레즈비언, 세 아이의 엄마,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세관집행국(ICE) 요원 조너선 E. 로스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현대영화가 진실의 다각성을 섬세하게 다루고자 천착할 때 현실은 그보다 훨씬 잔혹한 편집점으로 대중을 시험한다. 지난 주말엔 전세계 SNS 사용자들에겐 핸드폰으로 촬영된 미니애폴리스 도로 위의 상황이 다른 사람, 다른 각도, 다른 시점에서 담긴 파편화된 푸티지로 당도했다.

첫 번째 영상. 전경 숏. ICE 요원들이 앞뒤로 러네이의 차에 접근하며 누군가는 내리라고 하고 누군가는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러네이의 차는 멈춰 서 있다가 요원 한 사람이 창문 열린 운전석 안쪽으로 손을 뻗어 차를 붙잡자, 뒤로 후진했다가 도로 진입 방향으로 전진한다. 두 번째 영상. 흔들리는 핸드헬드. 러네이의 파트너인 레베카 굿이 차에서 내려 한 요원을 촬영하며 말한다. “굳이 싸우자는 거예요? 가서 점심이나 드시죠, 형씨. 가시라고요!” 이 두 영상을 근거로 트럼프 행정부는 러네이와 레베카의 차가 ICE 요원을 공격하려 했으며 두 사람이 요원들을 방해하고 조롱했다는 메시지를 전파 중이다. 그리고 공개된 세 번째 영상. 이번엔 운전석에 앉은 러네이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인다. 사건 현장에서 찍힌 피살 직전의 영상이다. “괜찮아요, 친구! 난 당신에게 화나지 않았어요.”(That’s fine, dude. I’m not mad at you.) 이후 차가 움직이고 앞쪽에 서 있던 조너선 로스가 러네이의 얼굴을 향해 총을 두번 쏜다.

누군가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그릇된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누군가는 안심하기 위해 각자의 보기 체계 안에서 이 영상들을 판독했고 나도 그중 하나다. 충격적인 자극에 포획된 것은 아닌지 자문하면서 무언가 찾으려 애썼다. 그러니까 증거 같은 것을 찾고 싶었다. 러네이가 완전히 억울하게 당했다는 분노를 위한 증거? 아니면 반대로 그들에게 최소한의 총격 집행 사유가 있었다는 합리성의 증거? 무의식의 진위를 판별하기에 앞서 절망감이 앞섰다. 무력한 장면 분석이 남긴 것은 두 가지다. 우선 러네이 니콜 굿은 웃고 있었다. 빛이 날 정도로 차분하고도 완연히. 현장의 긴장감이 고조되자 상황을 완화해보려 택한 제스처였을까. 중요한 것은 그 방식이 두려움이나 복종의 표현과는 달랐다는 사실이다. 이후 러네이의 차가 ‘자기쪽으로 향한다고 판단했다고 알려진’ ICE 요원의 첫 총성이 들린다. 이미 총에 맞은 운전자의 차가 도로 진행 방향으로 미끄러지는 것이 분명한 상황인데도 요원은 몸을 돌려 차를 따라가면서 운전석을 한번 더 겨냥한다. 두번이나 총을 쏘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남자의 욕지기가 영상에서 정확히 들린다. “퍼킹 비치.” 그러니까 두 번째 격발에 대해서만큼은 이렇게 확신할 수 있다. 아임 낫 매드 앳 유, 당신이 위협함에도 나는 당신을 해하지 않겠다는 강인한 공표 앞에서 어느 ICE 요원은 격분한 것이다.

피해자의 자격을 박탈하는 전술로써 정체성에 집착하는 보수언론을 지켜보며 두려워졌다. 영화를 경유해 현실의 의제를 보다 깊이 감각하고 발화하는 이들에게 이 비극은 다른 의미로 당혹스럽다. 기시감이 짙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해에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신나게 즐긴 후다. 현실을 모방하는 영화가 시차를 두고 역사의 과오를 사후적으로 진단한다는 통념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너무 길게 썼다. 한마디로 현실의 육중한 퇴보다. 미국 <폭스 뉴스>는 러네이 니콜 굿을 설명할 때 시인이라는 단어 앞에 ‘자칭’(Self-proclaimed) 혹은 ‘이른바’(So-called) 같은 조롱 섞인 표현을 썼고, 성적 지향을 강조하며 그가 전통적 가치관에 반하는 인물임을 암시했다. 미소지니가 뒤섞인 이 미묘한 조작을 통해 곧장 “위협 앞에서도 시적인 대사를 읊으려다가 비극을 자초했다”거나 “깨어 있는 척하려다 역시 호되게 당했다”는 식의 온라인 혐오가 따라붙었다. 혹자는 백인 민족주의 운동에 가깝게 극단화되는 마가(MAGA,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세력이 러네이와 같은 백인을 이토록 빨리 소외시키는 형국이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연한 수순이다. 러네이 니콜 굿은 백인 여성의 정상성 모델을 따르지 않으며, 시를 쓰고 여성과 결혼하고 정치적으로 리버럴한 성향을 공표한 시민 활동가다. 오히려 그가 백인이기 때문에 마가의 이상을 정면으로 깨부수는 존재이며 그러므로 (그들 입장에서는) 위협적이다.

영화라는 작은 국가의 시민 중 상당수는 인종, 젠더, 성지향성과 정체성을 막론하고 대개 이상하며 급진적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개 주인공이거나 주인공의 친구다. 훌륭한 주인공들이 높은 확률로 자연스럽게 가지는- 그저 평범할 뿐인- 특성들을 나열한다고 가정해보자. 예술가이고 퀴어이며 현실적인 감각이 부족하고 부조리에 저항적이며 때로는 매우 감상적이라는 형용은 높은 확률로 중복 적용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부당한 권력에 미소 짓는 시인’ 캐릭터는 뻔해서 당대 작가들에게는 외려 채택되지 않는 인물일 확률도 높다. 친절하고, 불합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간적 자질이 시스템의 폭력을 무마한다는 결말을 상상하면 너무나 당연해서 도통 재미가 없고 교조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런 와중에 지난 주말 영화 세계 밖에서 우리가 목격한 결말이 선고한다. 배부른 감상입니다.

다시 <파고>의 관찰자에게로 돌아가본다. 러네이 니콜 굿의 시간과 겹쳐보는 상상이다. 지역사회의 비극 앞에 제각기 다른 반응을 내보이는 동료들 사이로 ‘시나 쓰는 연약하고 고집스러운 퀴어 여성이 법 집행 현장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었다’는 말이 떠돈다. 마지의 좋은 이웃도 러네이의 죽음이 그 자신의 업보였다고 믿으며 안심하는 것 같다. 귀가 후 텔레비전을 틀자 사건 현장을 담은 혼란스러운 영상 조각들이 짜깁기되어 나오더니 이윽고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 시위대의 풍경도 다뤄진다. 그리고 채널을 돌리는 남편. 평온하기 그지없는 자연다큐멘터리가 이어진다. 마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거리로 나간다. 시위대를 지나치고 (어쩌면 합류하고) 영화관으로 향할지도 모른다. 걸작도 졸작도 아닌 평범한 영화 한편이 상영 중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시적인 대사를 읊는다. “난 당신에게 화나지 않았어요.” 마지는 너무 멋진 말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이런 말을 건넬 때 적어도 죽임을 당해선 안된다고 그제야 확신한다. 멍하니 영화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