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가에 멜로 로맨스의 불꽃을 지피고 있는 <만약에 우리>의 원작 영화 <먼 훗날 우리>에는 작품을 관통하는 한줄의 대사가 있다. 오랜 우여곡절 끝에 재회한 린젠칭(정백연)에게 샤오샤오(주동우)가 말한다. “I miss you.” 린젠칭이 자신도 보고 싶었다고 답하니 샤오샤오는 울먹이며 내뱉는다. “내 말뜻은, 내가 널 놓쳤다고.” 소진된 인연의 끝에 선 남녀는 가난한 마음으로 놓쳐버린 순간들을 그리워하며 회한에 잠긴다. 때론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말들이 아쉽고 모자란 마음을 더 적절하게 담아내는 것 같다.
2022년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의 포스터에는 ‘안녕, 모든 에반게리온’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진즉에 과거가 되어버린 ‘에반게리온’이 이 문구를 보는 순간 현재로 되살아났다. 안녕이라는 인사를 입에 올리는 순간, 이제 정말 페이지를 닫고 떠나보내는 ‘bye’의 안녕과 다시 만나 반가운 ‘Hello’의 안녕이 겹친다. 어쩌면 우리가 무언가를 제대로 다시 마주 보는 순간은 이별을 고하는 순간이 아닐까. 곁에 있을 땐 당연해서, 영원할 줄 알았던 것들이 언젠가는 떠나간다는 사실을 그제야 인식하고 똑바로 바라본다. 어느새 인식 바깥으로 밀려 지워졌던 것들이 비로소 다시 말을 걸어 내 안에 담기는 시간. 떠남의 인사와 재회의 반가움이 겹치는 순간.
지난주 안성기 배우의 추모 특집을 마련하면서 정성일 평론가의 한 문장이 가슴에 박혔다. “귀한 줄도 모르고 누리기만 했던” 것들이 우리 곁에 얼마나 더 있을까. 미처 헤아리기 전에 귀한 이들이 서둘러 떠나고 있다. 지난 1월19일 이소룡의 후계자에 가장 가까웠던 액션 스타 양소룡 배우가 77살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70, 80년대 이른바 홍콩영화계의 4룡(이소룡, 성룡, 적룡, 양소룡)으로 불리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 위대한 배우는 주성치 감독의 <쿵푸 허슬>에서 화운 사신 역을 맡아 다시금 전성기를 누렸다. 전성기에 삼합회와 다투었다는 등 전설적인 일화를 남긴 그는 마지막 남은 협(俠)객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1월18일(현지 시간) <라이온 킹> 로저 앨러스 감독도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살.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디즈니의 르네상스를 이끈 그가 남긴 숱한 업적보다도 내게는 2002년 <릴로 & 스티치> 스토리작가로 참여한 것이 더 감사한 거장이었다. 한창 스토리텔링 작법 공부를 할 때 <라이온 킹>과 <릴로 & 스티치>를 분석하며 감탄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시대의 페이지가 닫혔다는 소식에 마음이 울적해진다.
그리고 벨러 터르. (호들갑을 떨자면 감히,) 현대영화 최후의 시네아스트. 슬로 시네마로 대표되는 영화언어의 시인이자 영화와 미술의 경계 너머 극장의 개념을 확장시킨 예술가. 일찌감치 스스로 문을 닫고 영면을 고한 예언가. 그에 대한 추모는 마땅히 그가 추구했던 영화의 길을 거슬러 점검하는 것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번주 구태여 벨러 터르 특집을 준비한 이유다. 애초에 올해 준비 중인 전작 기획전에 맞춰 특집을 구상했으나 (어쩌면 운명처럼) 지금이어야 했다. 떠난 이들에 대한 각자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기억에 발을 딛고 각자의 안녕을 고한다. 안녕을 말하며 다시금, 그들이 일궈놓은 위대한 시절을 마주한다. 이별을 계기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몰랐던 모습을 발견할 기회를 얻는다. 안녕과 안녕 사이 깃든 시네마의 무게를 되새기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