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몽의 심장은 이 나라의 다른 도시로 이동 중이고, 그의 간, 폐, 신장도 다른 도시의 다른 몸들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렇게 다 조각나 버리면 이제 시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지구상에서 그의 그림자는, 그의 유령은 어떤 모습일까? 시몽의 심장이 낯선 이의 몸에서 뛰기 시작할 때 줄리엣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이 그녀를 맴돌다가 그녀의 눈앞에 시몽의 얼굴이, 훼손되지 않고, 오직 시몽만이 가질 수 있는 그 얼굴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 이게 시몽이야. 이게 시몽이야. 이건 더이상 조각날 수 없지. 마리안은 마음 깊은 곳에서 안도합니다.
마리안은 시몽의 엄마다.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3월8일까지, 국립정동극장)는 시몽 랭브르라는 혈기 왕성한 19살 청년이 불의의 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지게 되고, 그의 심장이 50대 심근염 환자인 끌레르 메잔에게 이식되기까지의 24시간을 그린 1인극이다. 아들의 장기기증에 동의한 마리안은 장기들이 적출되어 각기 다른 수혜자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그 시각에 밤하늘을 보며 위와 같이 생각한다.
올해로 3번째 이 작품에 출연하고 있는 나는, 아직 저 고통의 순간 마리안이 보게 되는 시몽의 얼굴에 대해 자신이 없다. 그 얼굴은 대체 어떤 모습이고 어떤 의미이고 어떤 속성을 지녔을까. 객관적인 이목구비가 아닌 시몽의 역사가 담긴 그만의 표정, 마리안과의 관계 안에서만 읽힐 수 있는 고유하고 내밀한 느낌, 마리안이 경험하고 기억하는 시몽 정도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은 하면서도 막상 무대 위에서 눈앞에 무엇을 어떤 식으로 떠올려야 하는지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 얼굴이 대체 어떤 것이길래 오늘 아들을 잃은 엄마가, 설령 잠시더라도, 이런 식의 작별과 해체에 대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안도할 수 있을까.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사진 출처 프로젝트그룹 일다
책들이 널브러진 책상 위에서 한유주 작가의 <계속 읽기_기억하지 못해도>를 집어든다. 남의 생각을 들으면 내 생각이 열리기도 하고 남의 글을 읽으면 내 글이 써지기도 하니까. 얼마 전 공연 홍보차 출연했던 유튜브 채널 <편집자K>에서 채널 호스트와 함께 서점에 들러 직접 고른 책이다. 수년 전 세계극작가축제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한유주 작가의 <불가능한 동화>라는 장편소설 일부를 대학로 소극장에서 퍼포먼스로 선보인 적이 있는데 그 인연이 떠올라 골라 온 것이다. 지금은 남편이고 그때는 애인이자 동료였던 박모씨와 둘이서 2인극 형식의 퍼포먼스를 별도의 연출자 없이 직접 만들고 실연했는데, 한유주 작가가 연습을 참관하러 연습실에 들른 적이 한번 있다.
그날 나랑 박모 배우는 ‘말 그만하고 일단 좀 하자’, ‘그러니까 너부터 그만 말해’, ‘유치하게 굴지 마라’, ‘너나 유치하게 굴지 마’, ‘조용히 하라고’, ‘너나 조용히 하라고’, ‘너랑 앞으로 다시는 작업 안 해’, ‘누가 할 소리?’ 같은, 정말 밑도 끝도 어이도 체면도 없는 유치한 싸움을 벌였는데 그 싸움의 한복판에 한유주 작가가 눈을 반짝이며 앉아 있던 기억이 난다. 작가님께 ‘죄송하다, 첫 만남에 이런 추태를 보여서’라는 식의 사과를 했더니, ‘혼자 작업하는 작가로서 누구랑 이렇게 얽혀가며 작업하는 모습이 정말 신기하다’는 취지의 답변이 돌아왔다. 작가님은 나를, 그날을, 그 공연을 기억하실까? 사실 나는 작가님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묘하게 흥분된 빛을 발하던 그날 작가님의 눈빛과 아우라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오늘 아침 침대에서 비몽사몽 일어나 남편이 가져다준 레몬소금물을 몇 모금 마시다가 물병을 발로 차는 바람에 물이 바닥에 흥건하게 쏟아졌다. 탄식하며 달려와 바닥을 닦는 남편에게, 예전에 함께 신체극 형식의 퍼포먼스를 했던 것, 연습실에 한유주 작가가 놀러왔던 것, 그때 우리가 정말 유치하게 싸웠던 것을 기억하냐고 물으니 ‘보나 마나 네가 잘못했겠지!’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 말을 하는 남편이 침대 옆을 네발로 기며 내가 쏟은 물을 닦고 있었으므로 나는 가뿐한 마음으로 욕실로 들어간다.
말 그대로 눈곱만 떼고,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 온 친구 집으로 향한다. 오늘 스터디는 그 친구 집에서 집들이를 겸해서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FLOW라고 이름 붙인 이 스터디 모임은 2년 전쯤 뇌과학을 공부하자고 조직되었으나 지금은 예술, 인생, 책, 다과, 넋두리 정도가 키워드가 된 월례 모임인데, 그나마도 나는 지난 한해 자체 휴학하고 올해부터 다시 출석을 시작했다. 친구 집 아파트 창밖으로 페인트칠이 벗겨진 쇠락한 2층 건물이 가까이 보였는데, 집주인이 내게는 워낙 취향 좋고 품위 있는 친구로 여겨져서 그런지 창밖의 풍경이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예술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브루클린처럼. 집주인에게 말했더니 그는 웃으며 “다른 친구는 와서 보고는 멕시코 같다고 했어”라며 웃는다.
연희동 근처에 건강식을 파는 식당들, 영화 <국보>, 이양희 안무가의 공연 , 각종 예술지원사업, e북 리더기, 2026년 계획 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풍경’이라는 단어가 스치듯 지나간다. 배우인 친구 한명이 영화 <국보>에 등장하는 가부키 배우의 대사 “오래도록 찾아온 게 있습니다. 어떤 풍경인데…”라는 대사를 언급하며 “나도 그 풍경을 본 것 같아서 계속 이 일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라고 말을 맺자, 예술계 종사자인 5명의 멤버 전원이 “그렇지…”하며 자기만의 풍경을 더듬듯 상념에 젖는다. 나는 뉴욕에서 연기 실기학교를 다니던 시절 연습실에서, 무대 위에서, 훈련하며 만났던 열린 순간의 감각을 얼핏 떠올린다.
2025 < IN >. 사진제공 LEEYANGHEE_CHOREOGRAPIC
1년여의 뉴욕 생활 시절 나는 절반 넘는 기간을 이양희 안무가의 브루클린 집에 룸메이트로 세 들어 살았다. 우리는 스즈키 트레이닝과 뷰포인트 메소드를 함께 훈련한 경험이 있었고, 아침에 눈뜰 때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틈만 나면 훈련과 공연예술에 대해 논하곤 했다. 그런 이양희가 얼마 전 갤러리 휘슬에서 <IN>을 선보였다. 벌써 3년째 이어지는 이 공연은 매년 초 그해 이루어질 작업의 핵심 모티프를 홀로 연구하는 1부와, 1부의 임시적 결과물을 스코어화해 공연 형식으로 오픈하는 2부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수행이자 공연이자 전시다.
좁은 통유리 갤러리 안에서 류한길의 즉흥음악과 함께 움직이는 2026년의 이양희를 보고 있자니 우리가 함께한 15년여의 시간들, 함께 훈련하고 토론했던 공연예술의 요소들, 우리가 흠모하고 동경했던 열리고 연결된 상태에 대한 여러 생각과 이미지 기억들과 감각들이 스쳐간다. 과거와 지금이 함께, 나와 이양희가 함께 또 따로 있는 풍경들이 펼쳐지고 지나간다. 언니 따라 처음 마셔본 미모사, 뉴욕 차이나타운의 소룡포, 이른 아침 함께 장 보러 가던 브루클린 하이츠의 길거리가, 움직이는 이양희의 몸 위로 겹친다. 그녀가 스치듯 통유리 창밖을 내다보며 설핏 미소 짓는다. 지금 이양희는 어떤 풍경을 보고 있을까.
집들이 식탁 위에는 도예가인 친구 어머님이 평생에 걸쳐 빚어온 비정형의 질그릇들에 소소하고 담박한 요깃거리가 담겨 있다. 각자만의 풍경에 빠져 있던 멤버 중 누군가가 ‘그런가?’ 하다가 또 다른 누군가가 ‘어떤 풍경?’ 하다가 이야기가 유야무야 전환된다. 좋은 예술 작품은 관객이 각자 자기만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여백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도 잠깐 오간다.
나는 풍경이란 단어를 들으면 항상 “이모션이란 내면의 풍경이다”라는 미국의 안무가 메리 오벌리의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공연예술의 즉흥 앙상블 메소드 중 하나인 ‘뷰포인트’의 창시자인 메리 오벌리는, 공연을 구성하는 6개의 요소를 SSTEMS, 즉 Space, Shape, Time, Emotion, Movement, Story 등으로 정리하고 이중 Emotion에 대해 ‘Inner Scenery’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모션, 그러니까 감정이나 정서는, 풍경처럼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우리 몸은 그 변화하는 내면의 풍경에 실시간으로 감응한다는 것이다. 이 설명을 책에서 읽었을 때, 고정되지 않고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비정형의 이모션의 속성을 풍경에 빗댄 것이 절묘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또 하나,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경험적이고 관계적이고 감정적인 장소로서의 풍경은, 이모션의 관계적이고 투과되는 속성 역시 절묘하게 은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뉴욕에서의 시간과 풍경에 관한 대화가 뒤섞여 머릿속을 맴돌다가 문득 ‘풍경으로서의 얼굴’이라는 생경한 문구가 머리를 스친다. 마리안이 떠올리는 시몽의 얼굴은 일종의 풍경이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시몽의 얼굴은 마리안과의 관계 속에서 실시간으로 밀려오고 밀려 나가며 매 순간 변화하고 투과되는 관계적이고 감정적인 풍경이다. 마치 해변의 모래 위에 그려놓은 커다란 사람의 얼굴처럼, 멀리서 보면 시몽의 얼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보면 흘러내리는 모래, 반짝이는 유리 조각, 작은 소라게, 염분, 미생물들이 오고 가는, 실시간으로 움직이며 매 순간 스러지고 다시 세워지는 작은 주체들의 세계. 그 얼굴은 실시간으로 변형되는 모자이크이며, 그 시각의 햇살에 따라 새롭게 그려지는 점묘화이다. 때로는 한순간의 시몽의 눈빛, 시몽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 어떤 날 시몽이 입었던 하와이안셔츠, 시몽과 보낸 주말 아침의 토막 난 기억, 시몽을 떠올리면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그와 함께했던 크리스마스 저녁 식탁의 분위기 같은 것들이 시몽의 얼굴이라는 변화하는 모래 그림의 한 부분들을 순간순간 담당할 것이다. 그의 얼굴은 그녀의 삶 속에서 그녀의 기분과 감정 속에서 매 순간 새롭게 기억되고 경험될 것이다. 그것은 고정되거나 정형화되지 않고 끊임없이 쪼개지고 재조합되는 미시적인 주체들의 배치로 끝없이 갱신되는 세계, 그러므로 시몽의 얼굴은 결코 고갈되거나 흐려지거나 조각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 희미한 안도감이 밀려든다.
풍경으로서의 얼굴, 풍경-얼굴로 <씨네21> 칼럼을 써야겠다고 머리를 굴리며 침대에 누워 있는데 남편이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온다. 나는 머리맡의 조명을 켜고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평소에도 종종 “아이고, 오늘 남편 얼굴을 제대로 못 봤네” 하며 남편 얼굴을 붙잡고 눈코입을 들여다보곤 하는데, 그때마다 생각처럼 지그시 얼굴만 바라보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바로 미주알고주알 이야기가 시작되거나 온통 어떤 생각이나 기억, 기분에 휩싸여 얼굴을 조몰락대느라 생각만큼 이목구비 자체를 바라보지는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떠올리는 누군가의 얼굴이라는 것은 눈코입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유주 작가 앞에서 말싸움하던 그의 성마름, 침대 옆에서 걸레질하며 들썩이던 그의 착한 등, 마주 보자마자 거의 2초 만에 잠에 빠져드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이 순간의 기분 좋은 노곤함이, 모두 언젠가 그의 풍경-얼굴의 한순간이 되어 미래의 나와 만날 것이다.
내일은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공연이 있는 날이다. 내 눈앞에 나만의 풍경이, 필요한 순간에는 시몽의 풍경-얼굴이, 관객에게는 각자 자기만의 풍경이 펼쳐질 수 있기를 기도하며 머리맡의 조명을 끈다.
